나라 없는 '신세' 보여준 영화 '터미널'… 같은 신세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 ▲ 김규나 작가.ⓒ제공=김규나 작가
    ▲ 김규나 작가.ⓒ제공=김규나 작가
    빅터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뉴욕 JFK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한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오는 동안 크라코지아에 혁명이 일어나 모든 외교적 창구가 닫혔다는 것이다. 그의 나라는 이제 서류상 지구 위에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고, 그곳으로 가고 오는 모든 여객기 운항이 중단되었으며, 여권은 물론 화폐까지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렸다.

    내 나라가 없어진다는 걸 상상해본 적 없다. 국적 없는 인간이라니. 태어나는 순간 취득되는 국적은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더 잘 사는 나라도 많은데 하필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게 아쉬우면 아쉬웠지 특별히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설움이라거나 목숨으로 이 땅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귀 아프게 들었지만 먼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난민이란 존재도 그들을 받아들일지 말지 따져봐야 하는 논란의 대상이었지,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된다는 건 가정해볼 이유도, 가치도 없었다.

    당신네 나라는 이제 없어요.

    지난달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에 참가한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세계 정상들에게 있으나마나한 그림자, 또는 투명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본인도 잘 알고 있는지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도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최대 동맹국인 미국은 한국 정부를 제외시킨 채 북한 개방에 박차를 가한 지 오래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무역 혜택 중단을 지시하며 우리나라를 꼬집어 언급하기도 했다. 과거 역사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하라는 반복된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일본도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는 엄격한 수출규제를 선언했다.

    국가 차원의 현명한 대응은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는 안방 문을 걸어 잠근 채 두고 보자며 호통만 치고 있고, 외교부 장관은 무슨 이유인지 아프리카만 돌아다녔다. 민정수석이었던 자는 죽창을 들고 싸워 이기자며 ‘겁먹고 쫄지 말자’라는 유치한 구호도 남발했다. 언론들은 ‘섬나라가 한국의 엄중한 경고를 못 알아먹는다’며 일본을 조롱하고, 관련 단체들은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조직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이에 귀 얇은 국민들은 일본이 우리의 주적인 줄 착각하며 독립운동 놀이에 빠졌다.

    기울어져도, 무너져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다시 일어서리라 믿었지만 세계무대에서 대한민국은 이미 주인 없는 집이다. 러시아와 중국의 비행기가 우리 하늘을 제 맘대로 날아다니고 북한여권을 들고 들어와도 인천공항에서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아낌없이 퍼주는데도 북한은 또다시 한국 정부를 조롱하며 미사일을 쏘았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2019년 이후에도 존속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국적불명의 신분이 된 겁니다.”

    2004년에 개봉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터미널>은 나라 없는 사람이 어떤 신세가 되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빅터는 낯선 나라의 공항에 갇힌다. 그에게 허용된 공간은 국제환승 라운지, 그에게 주어진 세상의 배려라곤 식권 몇 장과 공항 내 출입증 카드, 그리고 호출기 하나뿐이다. 돈 한 푼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다.

    든든히 내 생명과 권리를 지켜줄 조국이 없는 사람은 부모 없는 고아, 이 발 저 발에 차이는 천덕꾸러기다. 승진심사를 앞둔 공항 출입관리국 관리자인 프랭크에게도 빅터는 눈엣가시다. 그는 책임구역 밖으로 빅터를 내보내려고 이민국을 비롯한 정부 각 부서마다 연락을 해보지만 나라 없는 골칫덩어리를 떠맡으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빅터와 같은 신세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다. 벌써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짓 탄핵으로 법치가 무너진 나라, 국권과 안보가 함께 추락한 나라, 경제가 곤두박질 쳐서 회생이 불투명한 나라, 외교적으로는 이미 사망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크라코지아는 공산주의 노선을 벗어나기 위해 내전 중인 나라.”

    빅터를 어떻게든 영역 밖으로 내쫓고 싶었던 프랭크는 망명을 권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한다. 크라코지아로 돌아가는 게 두렵다고 말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데도 빅터는 단호하게 ‘노우!(No)’라고 답한다. 영어 소통능력이 부족해서였을 수 있다. 법을 준수하겠다는 선량한 마음에서였을 수도 있고 자신이 태어나 자란 나라, 가족과 친구와 일터가 있는 고향을 부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추측해볼 수 있다.

    불안한 상황이긴 했지만 빅터는 미국에 와서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에 수감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유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극단적 반응, 그가 속해있던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느꼈을 극도의 공포감을 본능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늦은 밤 게이트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던 그는 비행기 굉음과 불빛에 놀라 벌떡 일어나 두 손 들고 간절히 외친다. “돈 슛!(Don't shoot! 쏘지 마세요.)”

    크라코지아는 영화 속 가상의 국가이다. 다만 동유럽의 공산국가라고 소개된다. 그러니까 빅터는 평생을 공산당 치하에서 살아온 인물로 설정된 것이다. 당연히 자기 나라에 대한 부정적 언급, 가령 ‘헬조선’이니 ‘이게 나라냐?’ 하고 말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신 무의식에 잠재된 것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체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을까.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크라코지아의 내전이 끝난다. 공산군과 자유군, 둘 중 누가 승리했는지 정확히 언급되진 않지만 마침내 평화가 왔다는 뉴스를 보며 빅터는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축배를 나눈다. 여권과 화폐가 다시 유효해졌고 빅터는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있게 된다. 장장 9개월의 공항 생활을 접고 빅터는 마침내 바깥 공기를, 자유의 숨을 들이마신다. 그는 뉴욕에 와야 했던 목적을 뒤늦게 이루고 다시 택시를 탄다. 기사가 묻는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그가 답한다. “집으로요.”

    공산주의 노선을 벗어나기 위해 1980~90년대부터 내전을 겪었다는 빅터의 나라와는 정반대로 달려온 것 같은 한국이다. 지금 이 나라는 공산국가 완성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닫고 있다. 노동이니 투쟁이니 하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원전 대신 석탄과 태양광을, 반도체 대신 농수산식품 수출에 올인하겠다는 정부이다. 대중은 광장재판·인민재판에 앞장서고, 사법체계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가능성만으로도 수많은 유죄판결을 내리고 있다. 여당과 야당은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낸 지 오래되었고, 대통령이란 사람은 '자력갱생'을 외치고 있다. 차기 대권을 꿈꾼다는 서울시장이라는 자도 ‘프레지던트’를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건 모순이라며 용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이다. 곧 북한처럼 국무위원장이나 국가수반이나 최고영도자를 신처럼 모시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운명은 둘 중 하나로 예정된 것 같다. 머잖아 세계는 “대한민국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보도하거나 “이제 당신의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라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국적 없는 지구인이 되는 것도 두렵지만, 국적은 있되 내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만약 또 다른 길이 있다면, 그 세 번째 가능성은 깨어 있는 국민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이 우리에게 묻는다. “대한민국,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소설가 김규나(장편소설 <트러스트미> <체리 레몬 칵테일>, 산문집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