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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꼭 20년 전 오늘(11월 6일)은 제가 평양순안공항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쿠웨이트로 건설노동을 떠난 날입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렀어도 사무치게 그리운 제 고향 평양이죠. 사진은 지난 2014년 11월 남북출입사무소를 방문하고 찍은 것입니다. [사진 = 림일 작가]
    ▲ 꼭 20년 전 오늘(11월 6일)은 제가 평양순안공항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쿠웨이트로 건설노동을 떠난 날입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렀어도 사무치게 그리운 제 고향 평양이죠. 사진은 지난 2014년 11월 남북출입사무소를 방문하고 찍은 것입니다. [사진 = 림일 작가]

    김정은 위원장! 오늘은 저의 고향소리를 조금 하지요. 당신의 조부 김일성 주석이 해방 후 1946년 4월 6일 동평양 지역의 문수봉에 올라 나무를 심었습니다. 이후 52년간 매해 4월 6일은 공화국의 ‘식수절’이었지요.

    평양시 동대원구역 랭천동에 소재한 ‘문수봉혁명사적지’에는 당시 조부가 사용했던 작업도구가 보존된 작은 건물이 있으며 그 곳에서 300m 지나 산자락에는 교양마당이 있는데 여기에는 화강석으로 된 대형유래비가 있습니다. 거기서 조금 올라가면 산 중턱에 김 주석이 심은 나무가 보존되어 있지요.

    높이 82m 문수봉 정상의 전망대(사각정)에 오르면 고려호텔, 주체사상탑, 통일거리 등 시가지 일부가 한 눈에 바라보입니다. 또한 미림갑문과 대동강TV공장, 기름진 장천벌 등 평양시 교외의 아름다운 풍경도 그림처럼 펼쳐지죠.

    김일성 주석의 발자취가 어린 문수봉은 대동강구역 사곡동, 소룡동(대략 2000세대 거주의 단층주택마을)과 경계로 있는데 그 소룡동 38반에서 1968년 10월 평범한 건설노동자 가정의 셋째 아들로 제가 태어났습니다. (소룡동에서 25살까지 살았고 이후 중구역 외성동에서 3년 산 것이 저의 평양생활 전부죠.)

    저는 문수봉 자락의 ‘소룡인민학교’에서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김일성 주석이 14살 때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다지며 고향 평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가서 혁명투쟁을 했다는 교육을 받았죠.

    지금도 가만 생각해보면 묘한 감정이 드는 거 있죠. 김 주석이 14살 때 평양을 떠난 것이나 내가 28살 때 “통일이 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마음을 먹고 평양을 떠난 것이나 엄연히 같은 탈북입니다. 그런데 김 주석의 탈북은 ‘애국’이고 나의 탈북은 ‘반역’이라니 이런 황당한 논리가 세상에 어디 있죠?

    김정은 위원장! 저는 당신의 평양이 싫습니다. 각 가정에 당신 조상사진을 정중히 걸어놓고 자기 생일에도 쌀밥 한 그릇 먹지 못하는 배고픈 도시, 일감이 없는 직장에 나가 아침저녁으로 사상학습을 해야 하는 그 평양 말입니다.

    2천만 인민의 영혼을 병들게 만든 ‘만경대초가집’(김일성 생가)이나 만수대언덕의 김일성·김정일 초대형동상이나 개선문과 주체사상탑, 자애롭고 소박한 ‘인민의 어버이’라며 죽어서도 2억 달러짜리 호화궁전에 들어간 선대 수령들 시신보존으로 해서 시민들이 죽을 먹고 살아야 하는 그 곳 평양이 정말 싫다는 거죠.

    제 마음속에는 저의 평양이 있습니다. 진실 속에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순수한 시민들이 사는 곳이지요. 날조된 당신과 조상들의 과거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의 사유재산이 철저히 인정되고 노동의 대가가 충분이 있으며 다정한 이웃끼리 사람 정 느끼면서 열심히 사는 곳이죠. 자기의 능력과 열정, 노력이면 장관, 교수, 국회의원도 되는 사회인데 세계 각국에서 한 해에도 수백 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진짜 인민의 지상낙원 평양이 제 마음 속에 있답니다.

    2016년 11월 6일 - 평양출발 20주년을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