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교장, 오산학교, 서전서숙 교사 지낸 여 준1932년 만주사변으로 서거하기 전까지 평생 독립군 양성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7월의 독립운동가로 평생을 독립군 양성에 바친 여 준 선생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여 준 선생은 오산학교, 서전서숙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로군정서 부독판,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으로도 활동했다.

  • 여 준 선생은 1862년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現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한 선생은 성인이 되자 서울에서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등과 어울려 신학문을 배웠다. 1896년에는 성균관 직원에 임명됐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맺은 뒤 본격적으로 침략하자 여 선생은 이상설, 정순만, 이동녕 등과 함께 민족교육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준비한다.

    1906년 이상설, 이동녕 선생 등이 북간도로 망명해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이듬해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뒤 여 선생이 서전서숙의 제2대 숙장을 맡는다. 그러나 민족교육을 실시한다는 이유로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지고 재정난이 겹쳐지자 당시 3개 반 74명을 단기 속성과정으로 졸업시키고 1907년 8~9월경 서숙을 폐교한다.

    서전서숙을 폐교한 뒤 선생은 국내로 돌아와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는 한편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사가 된다. 1908년에는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 삼악학교를 세워 사람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을 재개한다. 이 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유지회를 구성해 재정 문제를 맡다가 이상룡 선생의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한다.   

    여 선생은 1917년 신흥무관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길림으로 옮겨 항일운동을 계속 했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 정령으로 추대되어 박찬익, 김동삼, 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같은 해 3월, 길림에서 ‘길림군사독판부’ 단장을 맡아 무장투쟁을 추진해 나갔다.

    선생은 같은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임시정부 산하 군정부인 ‘서로군정서’로 편입, 부독판을 맡아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12월, 선생은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에 선임되어 서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 규합과 임시정부 개조 활동을 펼쳤다. 1922년에는 액목현에 검성중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1930년 7월 북만주 위하현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서도 고문으로 활동했으나 1932년 만주사변 와중에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