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월인 탈출 '혈안'...배 삯은 '금덩어리'

    티유 대통령이 사임하고 남월의 정세가 더 급속히 악화되고 있던 어느 날, 우리 해군 LST  810함과 812함은 남지나 해상에서 남으로 항진 중에 있었으며, 며칠 후에는 사이공 항구에 입항하도록 시간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북월 공산군은 동·북·서의 3방향으로 부터 사이공을 포위하고 포위망을 압축하며 진격 중에 있었다. 사이공으로 부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안전통로는 사이공 항구로부터 남행하여 남지나해에 이르는 함선의 수로 뿐이었다.

    이 수상항로는 북월 공산군이 4월 30일 정오를 조금 지나, 사이공 부둣가에 있는 남월 해군 본부를 점령할 때까지도 안전하였다. 남월군 총사령관 빈록(永線) 장군을 위시한 남월군 고위 장성들이 북월 공산군과의 최후 결전을 단념하고 4월 30일 오전 9시경, 사이공 해군기지에서 남월 군함을 타고 해외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우리 해군 LST 810함과 815함은 이 수로를 따라 사이공 항구에 입항했다가 출항하도록 되어있었다.

    해외로 탈출하려는 남월인들은 수송편을 구하느라 혈안이 되었고, 배를 가진 선주들은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뱃삯은 선주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금덩어리를 요구하면 그것을 내야 했고, 미국 달러 뭉치를 요구하면 그것을 지불해야 했다.

    4월 24일 오후에 남월군 태권도 교관인 빈 소위가 우리 대사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빈은  하사관 이었으나,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 소위로 현지 임관한 장교였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남월의 고딘디엠 대통령의 요청으로 1962년 12월 남태희(南泰熙) 육군소령을 단장으로 하는 태권도 교관 네명을 사이공에 파견하여 남월군 체육학교에서 1년간 태권도 교육훈련을 시킨 적이 있었다. 빈은 그때 남태희 소령과 김승규 대위가 가장 신임한 수제자였다. 그는 나에게 4월 26일 사이공 항구를 출항하는 우리 해군 LST에 자신과 처자를 태워 달라고 했다. 북월 공산군에게 체포되면 친한파인 자신은 총살당할 것이 틀림없으니 꼭 좀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이때까지 주월 한국대사관은 본국 정부로부터 재월 한국인 철수계획에 대한 승인만 받았을 뿐, 외국인 해외 탈출계획 같은 것은 고려한 바도 없었거니와 본국 정부의 지시나 승인을 받은 바도 없었다.

    나는 빈 소위를 내방에 대기시켜 놓고, 어느 고위층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본국 정부에 승인여부를 문의할 단계에 가지도 못한 채 빈 소위를 돌려보내야 했다. 나는 빈 소위에게 남월 해군과 접촉하여 남월 군함을 타고 해외로 떠나던가, 아니면 미국 대사관과 접촉하여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출국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본국 정부의 정책을 위반 할 수없는 공인(公人)으로서의 내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사색이 되어 우리 대사관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마음이 무거웠다. 4월 25일에도 친구이며 돈 많은 중국인 등이 찾아와서 우리 해군 LST를 타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나는 그들의 애절한 부탁을 들어 줄 수 없었다.

    ◆ 어째서 한국인이 아닌 월남과 중국, 필리핀 사람들이 세배나 더 많은가?

    재월 한국인 철수작전은 이제 마무리 시점에 와 있었다. 남월에 잔류중인 550명의 한국 민간인들은 4월 26일 사이공 부두에서 출항하는 우리 해군 LST에 승선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면 되고, 한국 외교관 13명과 타자수 1명은 4월 29일 경미국 대사관 측이 제공하는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면 된다. 그리고 만일 낙오되어 있는 한국 민간인이 있다면 4월 28일 입항 예정인 우리 해군 LST 한척에 타고 떠나면 모든 것은 깨끗이 끝나는 것이다.

    4월 26일 9시경, 나는 대사관 직원들은 우리 해군 LST 두 척이 정박 중인 부두로 내보내 한국 민간인들의 승선을 도와주며 통제하게 했다. 그런 다음 본국 정부와의 교신사항과 북월군의 진격 상황을 알아보고 남월 정부의 동향을 물어본 후, 우리 해군 LST 두 척이 있는 부둣가로 차를 몰았다. 내가 타고 다니던 우리나라 정부 재산인 메르세데스 벤츠 승용차를 LST에 실어서 본국으로 보내고, 철수 본부장으로서 한국 민간인들의 철수를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부두에 도착하여 우리 해군 LST에 올라가서 한국으로 철수하는 승선자들을 살피던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 보다도, 한국말을 하지 못하고 월남어나 중국어, 필리핀어를 하는 사람들이 세배 정도 더 많이 타고 있었다. 이날 우리 해군 LST에 승선하여 부산항으로 철수한 인원은 한국인 314명, 한국인의 월남 부인과 자녀 및 월남 부인의 부모 친척 형제 등 659명, 한국인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순수 월남인 342명, 중국인과 필리핀인 20명 등 모두 1천 335명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타야 할 550명의 한국 민간인은 314명뿐이었고, 철수 계획에 들어있지도 않은 외국인들이 한국 민간인 수보다도 훨씬 더 많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해군 LST측에 어째서 철수 본부장도 모르게 외국인들을 승선 시켰느냐고 따졌다. LST 측은 한국 대사관이 발급한 승선표를 일일이 받고 외국인들을 태웠기 때문에 자기들은 잘못이 없다고 했다. 재월한국교민회를 관장하고 있는 이 규수 총영사겸 참사관에게 경위를 물으니, 그는 한숨 지으며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외국인에 대한 우리 해군 LST 승선표 발급은 어제 초저녁부터 오늘 아침에 이르는 동안에한 고위층 인사와 교회지도자 및 몇몇 사람들에 의해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해도 너무한다는 울분이 순간적으로 치솟았으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위기상황에서 우리 대사관 자체의 분열이나 불화가 표면화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에, 모든것을 참으며 침묵으로 넘기기로 했다.

    출항시간이 되자 우리 해군 LST 두 척은 닻을 올리고 미끄러지듯 부두를 떠나 뱃머리를 남쪽으로 하여 안전수로를 따라 남지나해로 향하였다. 바로 이 시각에 북월 공산군 남침군 총사령관인 반띠엔둥 대장은 사이공 북방 5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벤깥(BEN CAT) 읍에 진출 했다. 그는 그곳에 전방 지휘소를 설치하고 북월 정치국 서열 5번이며 파리 평화협상 당시 미국의 키신저 박사 상대역이었던 노회한 레둑토와, 북월 정치국 서열 6번이며 남월 해방지역의 정치 및 군사 총 책임자인 팜흥과 함께 사이공 점령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 해군 LST 입항 취소...재월 한국인 철수 계획 난항

    이 날 오후 북월 측은 미국이 남월에서 손을 떼고 남월군을 해체시킨다면 남월측과 남북평화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는 안하무인격인 제안을 해왔다. 티유 대통령은 제거 되었고, 남월의 힘이 나날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이제는 단숨에 사이공을 무력으로 점령할 수 있으니 평화적으로 협상, 항복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이공에서 미국대사관이 재월 미국인들의 철수작전을 실시한다면, 북월 공산군은 이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소련 정부를 통해 미국측에 전해왔다. 남월의 상황은 급전직하로 악화되고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4월 28일 사이공 항에 입항 예정이던 한국 해군 LST 한척의 입항이 취소되었다. 한국 대사관 직원과 한국 민간인의 철수 수송작전에 관하여 한미 양국 대사관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 측의 연락관은 이상훈(李相薰) 참사관이고, 미국 대사관 측의 연락관은 서기관 한명이었다. 한국인들의 미군 헬리콥터에 의한 철수 수송작전은 다음과 같이 실시되도록 한미 대사관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 대사관 직원들의 철수}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 대사관, 또는 대사관저에 모두 함께 모여 대기하고 있어야 하며, 미국 대사관 연락관이 그곳을 직접 방문, 혹은 전화 연락으로 어느 아셈브리 포인트(헬리콥터 탑승장)에 가서 미군 헬리콥터를 탑승하라고 하면, 그곳으로 가서 헬리콥터를 타고 미 해군 함선으로 철수한다.

    {한국 민간인들의 철수}
    한국 민간인들은 모두 라디오를 가지고 사이공 미국방송을 청취하고 있어야 한다. 미국인  철수작전이 개시되면, 미국 방송은 “사이공의 기온이 비등점(沸騰點)을 향하여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를 반복 방송 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 민간인들은 자기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아셈브리 포인트로 가서 한국 여권을 제시하고 미국인 틈에 끼어서 헬리콥터에 탑승하고 미 해군 함선으로 철수한다.

    이상과 같이 한국 대사관 직원들과 한국 민간인들의 철수를 미국 대사관 측은 구분해 주고 있었다. 국대사관 직원 13명과 LST 연락팀 장병 3명, 그리고 취재기자 1명과 고용원 5명등 합계 22명에게는 동시에 탈 수 있는 미군 헬리콥터를 제공해 줄 터이니 그것을 타고 떠나라고 했다. 또 한국 민간인 230여명은 재월 미국인 약 6천명이 철수 할 때 사이공 시내에 10군데 가량의 헬리콥터 탑승장인 아셈브리 포인트를 운영 할 것이므로, 라디오를 잘 청취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숙소에서 나와 가까운 아셈브리 포인트로 가서 미국인들 틈에 끼어서 헬리콥터를 타라는 것이었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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