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의 하늘은 아름답다. 더욱이 한반도의 하늘은 드높고 아름답다. 임진강 남쪽 산 위에 세워진 전망대를 찾는 실향민들은 강 너머 북녘 땅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었다. 송악산을 넘어 저 멀리 북쪽 하늘에는 흰 구름이 한 점, 두 점 목화송이처럼 떠있었다.

    저 구름 아래에는 대둔산맥(大屯山脈)이 있다. 대둔산맥은 수십 개의 지맥을 북으로 뻗으면서 많은 골짜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중 분지형을 한 골짜기 하나가 고구려 때에 현청 소재지로 선정되어 통일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조 효종(孝宗) 2년에 두개의 현을 통합하는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질 때 까지 장장 1천년 여에 걸쳐 우봉현(牛峰縣)의 행정·사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려조의 송도(松都)에서 이곳을 방문한 문인 백문보(白文寶)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산(山) 사람들 매를 많이 길들여
    서로 부르며 산언덕을 달리네
    저녁 때 돌아와서 술잔 드는데
    집집마다 기둥에 산짐승이 매달려 있구나

    또 홍여방(洪汝方)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소나무 잣나무 우거져 그늘을 지어
    대낮에도 사면이 어두운데
    산에도 만겹 구름도 만겹이로다
    산골짜기에 바람이 일며 호랑이 휘파람 부니
    해떨어지면 집집마다 일찌감치 문잠그네


    ◆ 아름다운 내 고향 '황해도 금천'

    그 옛 고을터의 현재 이름은 우봉리 고우봉동(古牛峰洞)이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다.

  • ▲ 동백꽃 ⓒ 연합뉴스
    ▲ 동백꽃 ⓒ 연합뉴스

    해마다 봄이 오면 산에 아사리 동백꽃이 제일먼저 노랗게 피었다. 다음은 개나리꽃과 진달래꽃과 야생벚꽃이 피었다. 진달래꽃은 높은 산의 아랫부분을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야생벚꽃은 큰산의 허리와 가슴부위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마을에는 앵두꽃,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 배꽃, 사과꽃들이 만발하여 동네사람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꽃가루를 묻힌 꿀벌들이 앵앵 소리 내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들은 지푸라기와 진흙을 물어 와서 벽에다가 부지런히 발라둥지를 만들었다.

    신록이 우거지면 꾀꼬리와 개개미가 날아와서 고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며, 밤나무 가지 끝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멧새, 할미새, 무당새들은 논밭의 둔덕이나 담장에 판 굴속에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산에서는 꿩이 퍼덕거리고, 뻐꾸기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구슬프게 울어댔다. 참새들은 귓기스락에 둥지를 틀며 재잘댔다.

    마을의 삼면은 산에 둘러싸이고 서북쪽만이 들판방향으로 트이는 마을의 출입구다. 여기 들판에서는 종달새가 지저귀었다. 독수리, 참매, 새매들은 공중을 선회했다. 희귀조인 크낙새도 살고 있었다. 밤에는 소쩍새가 피나게 울었다. 애수를 띠고 맑은 소리로 울어대는 소쩍새의 신묘한 울음소리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사정에 따라, 가지고 있는 개성에 따라, 그리고 개인문화의 차이에 따라, 천차만별의 생각을 유발케 했으나 모두가 공유하는 것은 정서(情緖)의 순화였다.

    보리밭이 황금으로 물들어 파도치게 되면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때 우는 매미는 들람매미이고, 밀을 벨때가 되면 찌매미가 나와서 들람매미의 노래에 합창한다. 여름이 깊어지면 싸롱매미와 매용매미가 울어대기 시작한다. 수십마리의 매미가 그 나름의 노랫소리로 마을의 맑은 공기를 흔들며 울어댈 때, 그 아름다운 노랫소리에는 도취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여름의 산골짜기 개울물은 맑게 흘렀다. 물이 차가워서 미역을 감으면 처음에는 섬뜩함을 느꼈다. 개울물에는 버들치와 가재가 많이 살고, 쫑개와 뚝지가 좀 있을 뿐 다른 물고기는 없었다. 개울 주변에는 깊은 산골에만 서식하는 개구리가 살고 있었다. 개구리의 크기는 맹꽁이의 두세 배쯤 되었다. 등은 누런 흑색이고 암컷의 배는 엷은 붉은색과 엷은 노란색을 섞어놓은 색이며, 중국식 도락가들이 즐긴다는 식용 개구리였다. 삼복중에서도 밤이 되면 개울가는 서늘하고 새벽에는 추웠다.

    가을이 되어 논밭의 오곡이 무르익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면 송이버섯, 뽕나무버섯, 사과나무버섯, 참나무버섯, 버드나무버섯들이 야생으로 돋아났다.

  • ▲ 박새 ⓒ 연합뉴스
    ▲ 박새 ⓒ 연합뉴스

    겨울이 되면 철새들이 찾아왔다. 방울새, 박새, 의치, 찍배기, 배바리 등이 계곡과 덤불과 산기슭을 날아다니며 나무 열매를 따먹고, 마른 풀밭에서 씨를 찾아 쪼아 먹었다.

    박새는 초가집 처마 끝의 굴에 들어가서 자기도 하고, 큰 나무 굴에 들어가서 쉬어가기도 했다. 내린 눈이 초가집 지붕에 소복하게 쌓여 장독대 위를 덮고,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어 있는 겨울의 운치도 아름다운 경관(景觀)이었다.

    아마도 이래서 옛날 원님들은 교통의 불편함도 개의치 않고, 호랑이의 출몰도 상관치 않으며, 공간이 좁은 것에도 아랑곳없이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른 곳으로 현청을 옮길 마음도 아예 먹지 않고 천년이 훨씬 넘는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지낸 것 같다.

    그러나 인류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아름다운 경관 하나만으로는 시대적 행정 및 사법요구를 채울 수가 없었다. 그런 한계로 인해 두개의 현이 통합될 때, 한양-평양-의주의 간선도로 변에 있는 넓은 공간을 가진 인접 읍과의 경합에서 밀려나 마침내 폐읍(廢邑)이 되고 말았다.


    ◆ 만두 훔치기 놀이, 토끼 똥 죽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어 내려오던 풍습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아, 몇 백년 동안 계승되는 것도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만두 훔치는 놀이였다. 음력 섣달 그믐날이 되면 집집마다 만두를 빚었다. 빚은 만두를 얼리기 위해 함자에 담아 광에 있는 독 위에 얹어놓고 그 옆에 촛불을 밝혀놓았다. 동네 어린사내애들은 어느 집 사랑방에 모여서 만두 훔치는 조를 짠다. 한개 조가 두서너 집을 할당받는다. 내가 속하는 조는 우리 집과 큰집과 오촌 아저씨 집을 책임 맡았다.

    밤 아홉시쯤 되면 아이들은 만두 훔치기에 들어간다. 이때 적용되는 규칙은 함지 속 만두 총량의 10분의 1 이상을 훔쳐 와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훔쳐온 만두가 수북이 쌓이면 동네 어느 집 어머니에게 넘긴다. 동네 어머니는 동네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자라 먼 옛날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풍습놀이 하는 것을 대견하게 여기면서, 만두 국을 끓여주었다. 이리하여 어린이들의 즐거운 만두 국 회식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설날에는 세배를 올리고 밖에 나가 연을 날렸다. 봄이 와서 꽃이 피면 개구쟁이들은 진달래꽃에 파묻혀 노는 다람쥐를 쫓아다니기도 하고, 꽃을 따서 입에 물기도 했다. 꾀꼬리들이 신록 사이를 노래하며 날아다닐 때, 아이들은 꾀꼬리 소리를 흉내 내면서 꾀꼬리 둥지를 쳐다보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 뛰어다니기도 했다. 나무를 타고 까치둥지까지 올라가서 까치 알을 세어보고 내려오기도 했다. 산에는 새콤한 맛이 나는 싱아라는 산초(山草)가 있었다. 이것을 꺾어서 날로 먹기도 하고, 개울가에 가서 싱아 상꿋을 만들어 쪄서 먹기도 했다.

    싱아 상꿋이란 네모난 큰 돌을 주워 양쪽에 쌓고 그 위에 넓적한 돌로 아궁이를 만든 후, 그 넓적한 돌 위에 꺾어 온 싱아를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싱아 다발을 여러 개의 돌로 덮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돌을 달궈 싱아를 찌는 것이다.

  • ▲ 매미 ⓒ 연합뉴스
    ▲ 매미 ⓒ 연합뉴스

    여름에는 시냇물에서 미역을 감고, 천렵(川獵)을 즐기기도 했다. 싸리나무를 꺾어다가 9자형으로 매미채를 만들어 긴 작대기 끝에 붙들어 매고, 9자형 동그라미 부분에 초가집 귓기스락에 쳐진 왕거미 줄을 빙글빙글 감는다.

    그렇게 만든 매미채로 나무에서 울고 있는 매미잔등에 살짝 대면, 매미가 달달 떨면서 잡혔다. 매미를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다리 하나를 실로 묶어서 앵두나무와 대추나무에 붙들어 매놓고, 매미가 그곳에서 고운 목소리로 울기를 기다려 보기도 했다. 그러면 매미는 다리 하나가 묶인 채 울어댔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가 오면, 밤에 멍석을 개울가에 내다깔고 누워서 총총히 빛나는 큰 별들을 세어보기도 했다. 새벽이 되면 추워서 홑이불을 덮어야 했다.

    그런데 늑대가 가끔 나타나서 동네 돼지를 물어가는 통에 동네 아이들은 힘깨나 쓰는 형들의 보호를 받아야 했고, 늑대를 후려 칠 수 있는 몽둥이를 항상 머리맡에 두고 자야했다. 호랑이의 경우는 1920년대 중반에 총으로 한 마리를 잡고, 또 한 마리는 덫에 걸려 잡힌 뒤로는 멸종이 되어 그 후 부터는 호환(虎患)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가을에는 아이들이야 생 버섯을 따거나 밤 아름을 줍기도 했고, 보리수 열매와 조랑열매, 매주열매, 대추 등을 따먹었다. 초겨울이 되면 골짜기 물속 큰 돌 아래의 굴, 혹은 바위 밑의 굴, 또는 버들 숲 밑의 굴에 들어가서 동면을 시작하는 개구리 암컷을 잡았다.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겨울이 되면 개구리 장사들이 찾아왔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좋은 돈벌이가 됐다. 아이들도 개구리 잡이에 한몫 했다. 내가 보통학교 다닐 때는 개구리를 판돈이 학비에 큰 보탬이 됐다.

    고우봉동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했다. 관청마을의 기름진 논과 밭, 관역 골의 좋은 배 밭 등등 비옥하다는 논과 밭은 모두 개성(開城) 사람들의 소유였다. 수확량의 반을 논밭 주인들에게 소작료로 바치고 나면 보릿고개 넘기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눈이 녹으면 아이들과 아낙네들이 괭이와 바구니를 들고 묵정밭에 나가 메꽃뿌리인 메를 캐 와서 그것을 쪄서 끼니를 때웠다. 또 늦봄에는 산나물을 뜯어다가 좁쌀알을 띄운 나물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춘궁기에 하루 세끼 밥을 제대로 먹는 집은 전체세대의 반도 안 되었다.

    내가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의 어느 날, 몇 살 위인 동네 개구쟁이들을 따라 산토끼 사냥을 나섰다. 그러나 빠른 산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개구쟁이들은 토끼 똥이라도 먹자면서 어른들이 보지 않는 개울가에 가서 나에게 우리 집 쟁개비를 가져오게 하여 주워 온 토끼 똥을 끓여먹었다.

    쟁개비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니 어머니가 계셨다. 모든 것이 들통 났으니 큰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짐승의 똥을 먹으면 병이 생길 수 있으니 다시는 먹지 말라면서 오히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 ▲ 매미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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