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초 안방극장에 즐거움을 선사하다 인기리에 종영된 프로그램 중 '열아홉순정' 이라는 연속극이 있다. 이 연속극이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될 수 있었던 것은 연변처녀 양국화의 때묻지 않은 순박함과 그가 보여준 청초한 로맨스 때문이다. 사실 중국 연변에서 온 조선족 처녀는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연속극이나 드라마를 비롯해 영화와 연극 및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조선족은 중국 전역에 걸쳐 약 2백만 명이 살고 있으나 이중 다수는 현재 지린, 랴오닝, 헤이룽장의 동북 3성을 비롯해 내몽고 자치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조선족의 중국 이주는 조선시대 말기인 19세기 중엽 부족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일부 조선인들이 오늘 날의 동북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의 식민지 합병과 이로 인한 경제적 수탈을 피하기 위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지역으로 이동했으며 이들은 이후 만주지역을 근거로 전개된 항일투쟁의 주요한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항일운동을 경험한 조선인은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정에 적극 동참했으며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 아래 한국전쟁에 참전해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에 맞서 치열한 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인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국적의 구성원이면서도 경제적으로 낙후된 변방지역에서 소수민족의 비애를 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선족 사회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훌륭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조선족이 한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고 있다. 길게는 한 세기 이상을 짧게는 3-4세대를 중국에서 거주한 조선족이 한국어를 뛰어나게 구사하고 우리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이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현상이다.

    오랜 세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조선족의 강인한 의지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자아내면서도 서로간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극복하기 힘든 커다란 격차를 발생시키고 있다.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존재하는 딜레마는 민족이라는 배타적 정서에 빠져있으면서도 경제력의 차이에서 오는 상대적 우월감을 해소하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한국인은 우리와 유사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조선족이 경제적 약자라는 이유로 이들을 우리와 동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족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은 한국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조선족에 대한 성격규정과 대화 속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조선족의 다수는 순박함의 차원을 넘어 종종 시대에 뒤쳐진 존재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연변처녀로 묘사되는 조선족의 모습은 사실 우리가 가공해 낸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오히려 격동의 기간 동안 자신의 삶을 지키고 계승하는 방법을 체득해 온 이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그들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창조해 온 사람들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는 소수민족이라는 한계를, 중국의 개혁 이후 북한으로부터는 자본주의에 물들어 민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배신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한국에서 조차 그들은 우리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2등 국민내지 값싼 대체 노동력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들에게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곳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은 이제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발전했으며 해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험난한 만주지역을 선택했다면 오늘 날은 자아실현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타국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키는 정도에 따라 민족성원을 규정하는 방법만으로는 세계로 확장되는 민족지도를 그릴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선족과 한국사회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는 작업은 앞으로 세계도처에 존재하게 될 또 다른 한국인 공동체의 정착을 후원하고 이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객원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뉴데일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