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없었다면 北에 흡수… 中 대륙문명권 속했을 것이승만, 한미동맹 체결‥'해양문명권'으로 대한민국 편입
  • 1948년 8월 15일 건국한 '신생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상태였다.

    장기간 일본경제의 한 부분으로 운영돼온 한국경제는 해방 이후 파행일로를 걸었고, 38선 장벽 때문에 북한경제와도 관계가 끊어졌다.

    국민 1인당 연간생산은 35~60달러에 그쳤고,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동포들이 대거 귀국한 데다, 북한주민들까지 내려오면서 도시는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게다가 당시 국민의 지적 수준은 문맹률 80퍼센트로 매우 낮았다.

    공산 게릴라들이 제주도와 지리산 등 산간지대에서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었고, 좌익과 중도세력이 국회를 통해 번번이 정권의 발목을 잡으면서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해외에선 신생 대한민국이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의 국공합작에도 개입했던 미국의 좌파 지식인 오웬 래티모어(Owen Lattimore)는 대한민국도 중화민국처럼 곧 무너질 것으로 봤다.

    거대한 중국대륙이 공산화된 마당에, 여기에 붙어 있는 '작은 대한민국'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우세했던 것.

    극심한 내부분열과 빈곤에 허덕이던 신생 대한민국은 급기야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나라가 송두리째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건국대통령 이승만(1875-1960)의 '전시외교'가 빛을 발했다. 당시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미국의 참전뿐이라고 판단한 그는 미국 대사 무초와 도쿄의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같은 비극적 사태에 대한 책임은 미국의 무관심에 있다"는 이승만의 질책에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결정했고, 유엔은 북한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뒤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을 창설했다. 이후 이 전쟁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 공산주의 국가들이 충돌하는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됐다.

    수년 뒤 장기간의 전쟁에 지친 미·소 양국이 '휴전'을 모색하고 나서자,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국과 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

    '中 대륙문명권'서 '美 해양문명권'으로 대전환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다(도서출판 북앤피플 刊)'의 저자는 대한민국이 6·25전쟁 이후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중국대륙과의 관계를 끊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주장한다.

    이승만이 이끌어낸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집단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체제 밑에 놓이게 됐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밑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대한민국을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키고 지켜낸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양문명권에서만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체제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유지돼야만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당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대륙문명권'에선 꽃 피우기 어려운 체제였다.

    이때 이승민의 기지로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대한민국은 단박에 중국의 대륙문명권에서 벗어나 미국의 해양문명권으로 옮겨 가는 '문명의 전환'을 겪게 됐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은 어제의 '적국'인 일본과 같은 해양문명권에 속하는 특이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한국에서 이승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찬성'과 '반대'의 논쟁은, 대한민국을 해양문명권에 남게 하려는 세력과 대륙문명권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세력 사이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본질적으로는 '문화전쟁' 또는 '문명전쟁'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그것은 이 나라를 어떤 문명권에 두게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구한말의 갈등과 같은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이승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은 구한말 개화파의 문명개화 전통을 계승한 '현대판 개화파'와 그것에 맞서는 '현대판 위정척사파'의 대립이라고 강조한다.

    추상적 '명분론' 벗어나 냉혹한 현실정치 이해해야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다'는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인 이승만의 생애를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에 비추어 서술한 전기다. 필자는 그의 생애에서 우리 국민이 참조해야 할 귀중한 경험과 유산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조선왕조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는 드물게 90년의 긴 세월을 살면서 1890년대 말의 애국계몽운동,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해방 후의 건국운동, 6·25전쟁 수행, 1950년대의 국가경영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여러 역사적 인물들의 일생을 합친 것만큼 많아 보인다. 게다가 그의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냉전 등 세계현대사의 거대한 사건들과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승만은 조선왕국의 가난한 백성으로 태어나 청년기에 나라까지 잃었던 '불쌍한' 조선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적 없는 망명객 신분으로 나라를 찾는다며 낯설은 외국 땅을 헤매며 갖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얻은 교훈은 간단했다. 약소민족의 운명은 강대국들의 국제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따라서 군사력이 없는 한민족이 독립을 찾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독립운동은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외교독립론'으로 나타났고, 독립 후의 국가수호 전략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는 '한미동맹론'으로 구현됐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 같은 이승만의 교훈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의 상당수는 민족의 자주성과 통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민족주의'와 엘리트에 대항한 민중을 예찬하는 '민중주의'의 감정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들이 약소민족의 지도자 이승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명분론에서 벗어나 강대국들의 냉혹한 현실정치에 비추어 역사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약소국의 현실을 무시한 채 '지도자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다'는 당위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태도는 삶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추상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저자 소개


    이주영(李柱郢): 1942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학교 사학과 문학사, 문학석사. 하와이대학교 문학석사(역사학, Joo-Young LEE). 서강대학교 사학과(서양사전공) 문학박사. 한국미국사학회·역사학회·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프린스턴대학교·콜럼비아대학교 사학과 객원연구원.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주요 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이승만 평전' '서북청년회'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