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언론계 4월은 ‘신문의 달’

    23세때 한국최초의 일간신문 2개 창간한 이승만
    ‘불꽃 언론인’ 우남의 논설문집 1-2-3권 나왔다

    대학 졸업하던 25살 그해 2월에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고서야 필자는 4월7일이 ‘신문의 날’인줄 처음 알았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날이다. 갑신정변(1884)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은 의사가 되어 미국여인과 결혼한 뒤 생업에 전념하다가 고종의 개화정부와 계약을 맺고 귀국하여 한글신문 ‘독닙신문’을 발행(1896)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문도 세운다.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강연을 듣고 더욱 미국에 심취했던 이승만은 독립협회 청년 지도자가 되어 독립신문에 논설도 쓴다.
    ◆서재필이 조직한 학생청년회 ‘협성회’의 토론회를 이끈 이승만은 ‘협성회보’ 제작편집을 주도하며 “미국 같은 나라 만들기‘ 위한 계몽활동에 정열을 쏟아붓는다.
    1898년 23세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개최하는 시민 모임 ’만민공동회‘의 주요연사로 활약하면서 주간지 협성회 회보를 일간신문으로 전환한다. 이름하며 [매일신문], 4월9일 한국최초의 일간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서재필은 미국인, 한국국민으로서 처음인 이승만의 [매일신문] 창간일 4월9일로 ’신문의 날‘을 바꿔야하지 않을까.
    ”독립신문은 1주에 2-3회 밖에 안 나오니 성에 차지 않아 날마다 찍어내는 일간지를 만들었다“고 설명한 이승만의 말에서 보듯이 백성계몽에 ”신문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 깨달은 그는 8월이 되자 또 하나의 일간지 ’제국신문‘을 창간한다. 그러니까 23세때 1년에 3개 신문 발행을 주도한 이승만은 주필이자 기자, 사장까지 1인다역의 청년 언론인, 독립운동 계몽가요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고종과 러시아 및 프랑스가 비밀리에 맺은 ’영토양여 이권 계약‘을 폭로함으로써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국제 필화사건이 폭발, 이승만은 혼자서 정부와 싸우면서 연일 강대국의 야욕을 고발하는 기사와 논설을 게재, 만민공동회를 통한 규탄운동을 이어갔다. 이런 양면작전은 결국 이승만의 승리, 러시아와 프랑스는 항만조차와 광산개발 이권 등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개설한 한러은행도 한 달도 안돼 문을 닫아야 했다.
    아무도 못말리는 이승만의 왕정개혁운동은 갈수록 고종황제와 정면대결로 치달았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혁명하려는 과격분자“ 이승만의 과속질주에 제동을 거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 ◆이번에 비봉출판사 발행인 박기봉씨가 간행한 [우남 이승만 논설문집] 시리즈에는 바로 이들 3개 신문, 즉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 제국신문에 실었던 20대청년 이승만의 주요 논설들을 발췌 수록하였다. 
    특히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복역중(1899~1904)에 비밀리 집필하여 감옥 밖으로 보내 제국신문에 게재하였던 수백편의 논설들도 일부나마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들 논설중 주요 내용들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옥중에서 몰래 집필한 명저 [독립정신]에 수렴되어있다. 
    또한 1913년 하와이로 망명하여 발행한 [태평양 잡지]와 [태평양 주보]의 논설들도 모아놓았다.
    당시 세계최초의 반공논문으로 알려진 유명한 ’공산당의 당부당‘을 비롯,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문재를 보여주는 명문들이 탁월한 선지자 이승만의 자유민주 국가정신을 웅변하고 있다.
    신문논설들 이외에도 한국 최초의 신체시(新體詩)로 평가받는 ’고목가‘등 이승만의 문학적 천재성을 드러낸 작품도 실려있다. 따라서 이 논설문집들은 각분야의 역사적 문화적 연구에 주요한 자료가 된다. 청년 이승만이 보여준 언론투쟁정신, 국가이익과 국권을 지켜낸 그의 독립정신은 40여년후 대한민국 건국의 출발점이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