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開國공신을 모두 처형한 明태조 朱元璋

    북한 독재자 김일성-김정일에 비하면 양반!

    金泌材   
日本학자 야마구치 오사무(山口修)가 쓴《中国史を語る》에는 明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 洪武帝)이 얼마나 많은 人命을 처형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주원장은 부모가 疫病으로 사망해 일찍이 고아가 된 인물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을 딛고 일개 兵卒에서 將軍을 거쳐 皇帝의 자리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元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각지에서 일어난 群雄들을 차례로 무찌르며 지금의 南京 땅에 자리를 잡았다.

주원장이 천하를 평정했을 무렵인 1368년 정월, 南京에서 皇帝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大明, 연호를 洪武라했다. 

皇帝가 된 주원장이 정치적으로 가장 중시한 것은 자신의 전제권력 강화였다. 이를 위해서라면 공을 세운 將軍이나 學者들을 숙청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天下를 얻기 전에는 이들 공신들의 힘을 빌렸지만 일단 목적을 달성하자 남김없이 제거해 버렸다. 이 때문에 歷史學者들은 주원장에 대해 “그 잔인함은, 실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비할 데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호유용(胡惟庸)이라는 재상의 예를 들어보자.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출신의 호유용은 주원장의 신하 이선장(李善長)과 절친한 사이로 이선장의 추천을 받아 주원장과 함께 싸웠다.

호유용은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인물로 明나라 성립 후 중서성(中書省)의 관리를 거쳐 좌승상(左丞相)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주원장이 거병 했을 때 활약한 공신 유기(劉基)를 몰아내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일파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전횡을 했다.

이 때문에 주원장은 그와 사이가 멀어졌다. 또 유기가 病死하자, 호유용에 의한 毒殺이라는 의혹이 일어나 의심이 심한 주원장은 호유용을 더 멀리하며 내심 불신감을 쌓았다.

그러던 중 1380년 호유용은 北元(明의 건국이후 北方으로 돌아간 몽골), 그리고 日本과 내통해 모반을 일으키려고 한 죄로 주원장에 의해 처형당했다. 당시 連坐制에 걸려 호유용의 무리들이 모두 살해됐는데, 그 수가 무려 1만5000여명에 달했다.

호유용과 절친했던 이선장도 마찬가지였다. 주원장은 홍유용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명했다. 이 과정에서 이선장의 조카 이존의가 호유용과 몰래 내통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이선장은 자결을 하고 그와 관련된 인물 1만5000명을 또 처형했다.

주원장의 광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큰 공을 세운 장군 남옥(藍玉)을 모반죄로 처형했는데, 그와 연루된 사람들이 무려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건국을 위해 몸 바친 文武의 인재들은 이렇게 해서 주원장 말기 약 10여 년 사이에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 이처럼 철권을 휘두르던 주원장도 1398년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의 죄가 컸는지 하늘은 그의 첫 아들과 둘째아들, 그리고 셋째 아들을 모두 일찍 요절시켰다. 

    주원장의 뒤를 이은 것은 16세의 황태손(皇太孫)으로 이듬해 지어진 연호를 따라 건문제가 됐다.
    거의 모든 中國왕조는 建國 초 수 많은 인명을 처형했는데,
     대체적으로 중국 역사학자들은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신들의 과거사를 두둔한다. 

    주원장의 開國 초기 暴政을 보면서 세삼 대한민국을 建國한 李承晩 대통령과 5.16으로 정권을 잡아 産業化를 이룩한 朴正熙 대통령이 위대해 보인다. 

    이 두 거인은 建國과 産業化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적을 不法으로 숙청한 적이 없다.
    李承晩 대통령은 共産化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고, 朴正熙 대통령은 우리 民族을 역사상 최초로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주원장도 북한 독재자 김일성-김정일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