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만물상'에 이 신문 이선민 논설위원이 쓴 '문화혁명은 내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67년 8월 중국 권력의 본산 중난하이에서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공산당 총서기 덩샤오핑에 대한 인민재판이 열렸다. 앳된 홍위병들이 “당신들은 자본주의 추종자가 아닌가”고 물었다. 류는 “아니다”, 덩은 “그렇다”고 했다.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고 버틴 류사오치는 등이 부러지도록 맞아 들것에 실려 나왔고, 이태 뒤 세상을 떴다. 잘못을 인정한 덩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폭풍우는 멀리 옌볜에 살던 조선족 작가 김학철에게도 미쳤다. 마오쩌둥을 “천안문 위에 올라선 벌거벗은 황제”에 빗댄 소설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각되는 바람에 반(反)혁명 분자로 몰려 10년 넘게 징역을 살아야 했다. 그가 감옥에서 겪은 인간 이하 체험을 담은 작품 ‘밀고(密告) 제도’에서 죄수들은 “류사오치 시대엔 이렇게 배를 곯지 않았다”고 한탄한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 8월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16개조’를 발표하고, 천안문광장에서 100만 집회가 열리면서 시작됐다. 명목은 수정주의 비판이었지만 숨은 목적은 정적 제거였다. 마오가 권력을 다시 잡는 데 동원된 린뱌오와 그의 군부 측근들은 마오를 제거하려다 발각되는 바람에 몰락했다. 중국 전역을 광기와 혼란에 빠뜨렸던 문혁은 1976년 9월 마오가 죽고 이어 4인방이 숙청되면서 막을 내렸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문화대혁명은 당과 국가, 인민에게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10년의 내란이었다”고 비난했다. 공산당 신임 간부들에게 한 강연에서다. 덩샤오핑이나 그 후계자 장쩌민은 문혁을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후 주석을 비롯한 현 지도부는 문혁을 ‘일시적 이탈’로 보는 유연한 입장이었다. 이번 입장 변화는 일각에서 높아 가는 개혁개방 반대 목소리를 견제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극단적 계급투쟁과 평등주의, 반(反)지성주의를 드러낸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300만 명 넘게 숙청되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사부(師父)’ 격인 리영희씨는 그런 문혁을 “웅장한 인간개조의 실험, 인간 제일주의, 보다 깊은 민주주의”로 찬양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난 10년 ‘한국판 문화대혁명’을 겪은 뒤라 후진타오의 지적이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