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7대 대선은 사상 최대 표차를 기록했다. 이 결과는 지난 5년 이 나라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세력에 대한 국민 성적표다. 정권의 ‘386’ 코드 세력 성적이 가장 불량했다. 이들에겐 ‘호랑이 등 뒤에서 으스대던 여우(호가호위)’ 세력이라는 평가가 붙었다. 말도 안 되는 정권의 정책을 떠받들며 그 정당성을 앞장서 주장했던 관료 집단도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그들 중에서 심한 사람은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우기던(지록위마)’ 고사 속의 간신과도 비교됐다. 국민 심판을 받은 세력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집단이 시민단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시민단체라는 간판 아래 권력 편에 서서 권력 비판 세력을 몰아세우는 데만 열중했다. 지난 5년은 시민단체가 권력단체로 타락했던 기간이었다. 그들에겐 ‘양 머리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상인(양두구육)’ 집단이란 평가가 돌아갔다.

    노 정권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한 전문위원 이상 고위급 인사 55명 중 10명이 시민단체·노조 출신이었다. “참여연대 임원들이 노 정권에서 158개 정부 고위직이나 산하 위원회에 참여했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다. 정권이 위기로 몰릴 땐 그들은 권력의 의용 소방대원이나 구급 출동대 역할을 서슴지 않았다. 2004년 탄핵사태 때 500여개 단체가 연대기구를 만들어 탄핵반대 촛불집회, 서명운동을 벌였다. 시민단체들이 그해 총선 때 벌인 낙선운동 대상자는 한나라당 100명, 열린우리당 10명이었다.

    대학과 연구소들이 공동 진행하는 ‘한국종합사회조사’에서 시민단체 신뢰도는 2003년 1위에서 해마다 몇 단계씩 떨어져 작년엔 6위로 밀려났다. 시민단체가 제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 정치권력 밖에 서 있어야 한다. 여당에 이용당하지도, 야당에 흡수되지도 않으면서 독자의 목소리로 시민을 대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문 분야에서 정부나 기업이 보지 못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건전한 비판자와 감시자의 길을 갈 수 있다. 권력과의 적정 거리 확보가 시민단체의 생명선이라는 말이다.

    노동문제건, 교육문제건 무슨 현안만 생기면 각양각색의 수백개 단체가 이름을 모아 똑같은 목소리를 내온 게 한국 시민단체의 병폐다. 다음 번엔 우리 단체가 도움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번에 다른 단체에 사람 빌려주고, 이름 빌려주는 식으로 서로 영향력 키워주기를 해온 것이다. 국민들도 이젠 시민단체의 수법이 뭔지를 훤히 알게 됐다. 지난 5년은 시민단체가 권력을 얻고 신뢰를 잃어버린 시민단체 공백의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