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에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전 연세대 특임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0월에 북한의 서해갑문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방명록에 ‘인민은 위대하다’라 적었다. 구체적으로 무얼 염두에 두고 썼는지는 헤아릴 길이 없다. 대선 결과를 접하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이 문장이다. 대선 결과에 대한 논평으로서 이보다 적절한 말은 달리 없을 것이다. 10년 집권세력에 대해 국민이 보여 준 거부의 함성은 단호하고 준엄했다. 반칙 정치에 대한 가차 없는 거부요, 국민을 대중 조작(操作)의 만만한 대상으로 얕보는 방자한 오만에 대한 위대한 거부였다. 

    선거 결과에 대해 심도 있는 중층적 분석이 나와서 내가 일일이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집권세력의 패인을 국민의 경제적 열망 탓으로만 돌리는 태도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집권세력의 결정적 패인과 국민 지탄을 자초한 상징적 행태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엄청난 사실일지라도 누적적으로 반복되면 예사롭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고질적인 정치도의 불감증, 위기 불감증, 국민을 깔보는 냉소적 국민관이 생겨난다.

    ‘반칙정치’에 대한 준엄한 경고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진 작년에 노 대통령은 포용정책 재고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임자의 전화를 받고 곧 이 말을 번복했다. 북한의 핵실험이 얼마나 큰 사건인가? 이런 중대사에 대해 확고한 주견도 없이 오락가락하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가? 평소에 예측하고 숙고하고 작심했어야 하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포용정책에 대한 보완책이라도 제시하면 대뜸 전쟁하잔 말이냐고 윽박지른다. 지금은 노 대통령에게 오히려 뒷발질하는 집권세력의 상투적인 협박이다. “서울이 불바다가 돼야 알겠느냐”던 북측 대표의 협박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같은 곡조, 같은 가사, 같은 춤사위가 아닌가?

    BBK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가 발표되자 집권세력 요인 다수가 검찰청으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자 중에는 두 사람의 전직 총리와 전직 법무부 장관이 끼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 지휘 감독하던 예하 부서에 가서 전직 총리와 장관이 시위를 벌이는 일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는가? 육군본부 장성이 연대본부로 몰려가서 시위하는 격이 아닌가? 자가당착의 압권이요, 소 죽은 귀신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눈알을 굴릴 어릿광대짓이다.

    이들은 또 ‘정치검찰’이라며 성토했다. 야당이 그런다면 그나마 이해가 간다. 이들은 엄연한 집권세력이 아닌가? 결국 10년 집권기에 검찰을 정치검찰로 만들어 놓았다는 자백이 아닌가?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런 의문을 회피하면서 겸허히 반성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적인 정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집권세력은 일관되게 인신공격으로 선거운동을 대신했다. 야당 후보의 사진에 ‘위장만큼은 자신 있어요’란 글귀를 곁들인 신문광고도 부지런히 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을 해체하고 새 정당 만든답시고 몇 차례 수선을 떨다가 사실상 원상태로 돌아가 간판만 바꿔 달았다. 이것이야말로 국민을 우롱하는 파렴치한 위장 놀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민심 이반을 모두 대통령 탓으로 덮어씌우고 책임을 모면하려는 비겁한 대국민 위장극이 아닌가? 소도둑이 바늘도둑 욕하는 것과 무어가 다른가?

    집권세력 ‘경제열망’탓만 말라

    정치적 반칙 행위로 일관한 집권세력은 타자의 도덕성을 비난할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부과한 정치교육 덕택에 국민은 대중 조작의 만만한 대상이 아님을 결곡하게 보여 주었다. 남북을 오가는 갖가지 깜짝쇼에도, 집요한 흑색선전에도 전처럼 현혹되지 않았다. 정치 훈수도 소용이 없었다. 충고란 받는 쪽보다 주는 쪽에 득이 되게 마련임은 벌써 16세기의 몽테뉴가 간파하지 않았는가?

    선거 결과에 숙연한 반성을 도모하고 정치적 정도(正道)를 모색하지 않는 세력은 여든 야든 미구에 추풍낙엽 되어 역사의 쓰레기통이나 아궁이 속으로 쓸려 갈 것이다. 국민은 위대하다. 승자에게는 계고가 되고 패자에겐 희망이 되는 유쾌하고 엄숙한 명제요, 사실 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