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쟁이나 토론이 말꼬리잡기 식으로 가면 실효성있는 논쟁이나 토론이 되기는 힘들다. 내가 밑에서부터 쓸 칼럼내용은 사실 어떻게 보면 ‘말꼬리잡기’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번쯤 글을 쓰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내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데일리안 김영인 논설위원은 지난 21일 ‘조광조의 대외정책’이란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김씨는 조광조 선생의 개혁실패를 소개하면서 마치 조광조 선생이 지나치게 개혁만 강조하고 실무는 대단히 무능했던 것처럼 적고 있다. 김씨의 주장을 정리하면 조광조 선생의 이상은 높았으나 과도하게 개혁을 시도하고 실무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으며 현실은 도외시한 채 이론만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조광조 선생의 개혁이 실패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어 김씨는 이런 조광조 선생의 사례를 들며 참여정부의 북한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북한이 쌀을 안 준다고 이산가족 상봉중단을 말하고, 금강산 면회소 건설인력을 철수시키라고 했다는 점을 들어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이 흔들리고 있다고 적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대북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이다.

    조광조 선생은 과연 무능했나

    사소한 트집을 잡는 것일 수 있으나 사실관계를 명확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내 생각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조광조 선생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면 전국의 유생들이나 조광조 선생의 후손께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조광조 선생의 업적에 대한 내 견해와 자료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조광조 선생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서 조광조 선생을 비롯한 신진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실패한 원인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이런 식으로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 미숙한 정치력과 과도한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곧 후세 학자들이 그의 사상은 따랐지만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향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선조 대에 사림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조광조 선생의 재임 시 업적은 컸다. 조광조 선생의 업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① 향약의 실시
    ② 현량과의 도입
    ③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 혁파
    ④ 궁중여악 폐지
    ⑤ 내수사 고리대금업 중지
    ⑥ 주자 ‘가례’, ‘삼강행실도’ 보급 및 소학 교육 강화(유교교육 강화)
    ⑦ 도교기관 소격서 폐지

    중종 임금 시대 조선의 상황

    조광조 선생이 이런 업적을 남기고 있을 때 조선의 상황은 대략 이러했다. 남으로는 왜군의 위협을, 북으로는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경제분야다.

    당시 조선에서는 저화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다. 또한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 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신임 관리자들에 대한 환영 배례를 금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하지 만 이런 노력들은 정치적 혼란과 국방의 불안 탓으로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 외에 1530년부터 시작된 서양의 세면포 무역이 지배층의 의복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도 특이할 만 한 사실이다. 또한 농업 관련 기술도 발달해, 관천기목륜, 간의혼상을 새로 제작해 비치하고, 1534년에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 정청의 조작법과 훈금술을 배워 오도록 했다. 1536년에는 창덕궁 내에 보루각을 지어 누각에 관한 일을 맡게 했으며,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등에 관한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 이 분야의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각 방면의 진흥 정책들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곧 중종의 개혁 정치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렷한 정치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평가다.

    여기서 주의깊게 살펴 볼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조광조 선생은 1519년에 기묘사화 과정에서 사사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혼란은 계속 되었다. 조광조 선생 일파가 권력을 잡았던 것이 불과 4년의 시간이었고 조선의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단지 그 4년의 시간만을 보고 조광조 선생의 실무능력을 판단해 버리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시대는 지금처럼 정보통신수단이 발달해 있는 과학시대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김씨의 글은 조광조 선생의 과오만 부각시키며 마치 조광조 선생 때문에 더욱 조선이 혼란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광조 선생이 밀려 난 이후에도 조선은 계속 혼란했다. 이는 곧 당시 조선은 중종부터 시작해 그 주변 인사들이 대부분 능력이 부족했을 수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현실이었다면 조광조 선생이 더 오래 집권했더라도 조선의 산적한 문제들을 쉽게 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광조 선생이 밀려난 최대의 이유는 연산군을 제거하고 중종을 세우는데 기여해 국가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받고 있던 정국공신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조광조 선생 일파는 별로 연산군 제거에 기여도 하지 않았으면서 많은 이권을 누리고 있던 이들을 제거하여 국가경영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래서 76명의 정국공신들이 이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앙심을 품고 조광조 일파를 탄핵하여 제거해 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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