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무죄는,
[정치검찰]에 대한 단죄.
이명박 정권과 [정치검찰]이 합작해서 만든
[추악한 정치공작]에 대한 단죄라고 생각한다."- 2011년 10월 31일, 한명숙 전 총리.
불법정치자금 9억원 수수의혹 사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
이것은 [정치적 판결]이다.
이 재판을 기획한 MB정권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박근혜 정권에서 유죄로 뒤집혔다.
새로운 증거도 없는데 검찰 주장만 120% 받아줬다.- 2013년 9월 16일, 한명숙 전 총리.
불법정치자금 9억원 수수 의혹 사건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의 유죄판결을 받은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는,
퇴임 직후 두 건의 송사에 휘말렸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받은 판결 선고만 모두 다섯 번.
그녀는 앞선 네 번의 판결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5억원 뇌물수수 사건]은 1심부터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모두 무죄를 주장한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
기업인으로부터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또 다른 재판에서도
1심 법원은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판결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청렴]을 상징하는 백합을 손에 쥐고
기자들 앞에 섰다.
그러나 다섯 번째 판결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9억원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 항소심 판결이 있었던 2013년 9월 16일.
서울고법 형사6부(정형식 부장판사)는
피고석에 선 그녀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그녀에게 징역 2년에 추징금 8억8,302만원을 선고했다.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이날만은 백합도 빛을 잃었다.
그녀를 [정치적 어머니]로 따르던 원내 제1야당은 당혹스러워했고,
그녀를 지지하는 한 인터넷 언론은,
[충격과 공포]라는 단어를 쓰며
판결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제1야당은 항소심 판결을 [정치공작]으로,
그녀를 기소한 검찰을 [정치검찰]로 단정 지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한 당내 특별 기구까지 등장했다.
<정치공작분쇄 및 정치검찰 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라는 긴 이름을 단 대책 기구는
항소심 판결을
[검찰과 법원이 각본에 따라 짜 맞춘 정치적 판결]로 정의했다.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낸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은
트위터를 통해
마치 판결의 배후가 따로 있는 것처럼
묘한 여운을 남기는 댓글을 올렸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주 초,
대한민국의 시계는 적어도 삼사십년을 거꾸로 돌아간 듯 했다.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가 됐다]는 식의 주장이 민주당사 주변에서 터져 나왔다.
[정치공작 분쇄], [짜 맞추기 판결]과 같은,
박제(剝製)가 된 박물관 유물에나 쓰일 법한 문구들이 서울 여의도 주변을 맴돌았다.
심지어 [재판을 기획했다]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음모론]까지 나왔다.
이들은
한 나라의 사법부를
최고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통치자가 원하는 대로 판결을 선고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불과 2년 전,
같은 사건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향해
[경의]를 표했던 전직 총리와 제1야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위 내용은
지난 한 주 서울 여의도 정가와 서초동 법조타운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민주당이 보인 반응을 정리한 것이다.
[9억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항소심 판결에 대해
한명숙 전 총리와 민주당이 보인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는
“MB정권이 재판을 기획했다”는
한명숙 전 총리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전직 국무총리가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발언을
여과 없이 내뱉을 정도로 한명숙 전 총리와 민주당은 동요했다.
한명숙 전 총리와 민주당을 공황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16일 열린 서울고법 판결이었다.
서울고법 민사항소 6부는
이날 열린 [9억원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한명숙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을 깨고,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내용은 간단하다.
한명숙 전 총리가
2007년 3월부터 9월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에게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금품을 받은 시기가 총리에서 물러난 직후였고,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한명숙 전 총리가 기업인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한명숙 전 총리에게 실형을 선고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고인(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금품 수수 당시 지위와
수수의 명목-규모 등에 비춰
죄질이 무겁다.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받은 금원을
일부 개인적으로 사용했고,
비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등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아
엄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항소심 재판부는
한만호 전 대표의 검찰 진술에 대해
[신빙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한만호 전 대표의 진술에 일관성과 신빙성이 없다고 본
1심 재판부와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총리 재임 당시 피고인이 한만호 전 대표를 공관으로 초대해
함께 만찬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고,
돈이 오간 뒤 통화를 한 기록이 있는 점도 유죄의 근거로 제시했다.
한명숙 전 총리가 돈을 받은 이듬해
한씨에게 2억원을 돌려 준 점,
한만호 전 대표가 발행한 수표를
한명숙 전 총리의 동생이 전세자금으로 사용한 점도 [신빙성]있는 증거로 인정했다.
이어 재판부는 한만호 전 대표의 교도소 접견기록도 유죄판결의 근거로 봤다.
2억원을 전달한 직후
한만호 전 대표가 한 전 총리와 통화했다는 사실은
2억원을 반환한 주체가
한 전 총리라는 강력한 정황자료.교도소 접견 기록을 보면
한 전 대표가
한 전 총리의 비서를 통해
3억원의 반환을 추가로 요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1심 재판부가 무죄의 이유로 본
[돈을 전달한 장소]에 대해서도 항소심 재판부는 다른 판단을 내렸다.
대로변에서 돈을 전달했다고 해도
한명숙 전 총리가 차에서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한만호 전 대표가 돈 가방을 차 안으로 넣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결정적 근거인
한만호 전 대표의 진술 번복에 대해서도
항소심 재판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한 씨가 공판 과정에서 진술을 번복했더라도
검찰 진술의 [신빙성]을 담보할 자료가 적지 않아,
한 전 총리가 9억여 원을 받았다는 공소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가 유죄의 근거로 제시한 내용들은
모두 1심 재판 당시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했다.
1심 재판부는
한만호 전 대표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사실에 주목해,
한명숙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만호 전 대표의 진술에 일관성과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1심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증거의 [증명력]도 부정했다.
9억원의 환전내역이나 금융자료,
휴대전화 통화내역 등의 자료도
유죄 판단의 증거로 보기엔 부족하다.
두 사람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주고받을 만한 친분이 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2011년 10월 31일.
[9억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1심 판결 이유 중 일부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1심 법원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증거들에 대해 [증명력]을 인정했다.
결국 이 사건에서
1심과 항소심 재판부가 전혀 다른 판결을 한 근본적인 원인은
[증거의 증명력] 여부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 있다.
같은 증거나 진술에 대해
[증명력]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법관의 자유재량]에 속한다.
이것을 [자유심증주의]라 한다.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 - 형사소송법 308조
[자유심증주의] 아래서 증거를 사실이라고 믿을지 여부,
증거에 의해 범죄사실을 인정할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법관의 몫이다.
[실체적 진실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형사소송법의 이념에 비춰 볼 때,
법률이 [자유심증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런 논리의 귀결이다.
다만,
증거에 대한 법관의 판단은 경험칙과 논리법칙에 부합해야만 한다.
만약 증거 혹은 진술에 대한 법관(재판부)의 판단이
경험칙이나 논리법칙에 맞지 않는다면,
[사실을 오인]한 것이 돼 [항소이유]가 된다.
즉, 증거에 대한 법관의 판단에 이의가 있다면
상소로 다툴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이것이 [삼심제도]이다.
1심 재판부가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은 증거에 대해
[증명력]을 인정한 항소심 판결은 [자유심증주의]에 바탕을 둔 결과다.
증거의 [증명력]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을 인정할 수 없다면
대법원에 상고를 할 일이지,
[기획 재판], [정치적 판결] 등의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발언의 당사자가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
전직 국무총리를 지낸 현역 국회의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2년 전 한명숙 전 총리는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 결과에
“정치검찰에 대한 단죄”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부에 대해서는
[기획 재판], [정치적 판결]이란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아전인수]식 태도와 다를 것이 없다.
한 때
대통령을 대신해 행정부를 통솔했던 전직 국무총리가
대한민국 사법부를 욕보이는 것도 모자라,
근거도 없는 [음모론]을 앞세우는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안쓰럽다.
제1야당이란 민주당의 반응 역시 공당이 보일 태도는 아니다.
마치 항소심 판결에 석연치 않은 배후라도 있는 것처럼
의혹을 제기한 문재인 의원의 행태 또한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법치의 근간인 [자유심증주의]나 [삼심제도]를 모를 리 없다.
민주당과 문재인 의원이
등 돌린 민심을 다시 얻으려면
한명숙 총리에 대한 맹목적인 보호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공직자로서 물의를 끼친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과 관련해
국민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먼저다.
<정치공작 분쇄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앞서,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상처받은 법관들에게 사과를 표하는 것이 순리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로
온갖 [음모론]을 내세우는 행태는,
국민들이 [전직 국무총리]와 [대통령 후보], [제1야당]에 바라는 모습이 결코 아니다.
[사법부를 정치의 시녀로 만들려는 이들]은
[음모론] 속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란 사실을,
한명숙 전 총리와 민주당은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