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공연 사진.ⓒ쇼노트
어린 시절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동화 속 세계가 대학로 무대 위에 펼쳐진다. 유쾌한 상상력이 빛나는 아동용 이야기일 것이라는 선입견은 잠시 접어두는 것이 좋다.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 시대의 단면과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동화적 변주, 익숙함 속에 감춰진 낯설고도 매혹적인 창작 뮤지컬 두 편이 나란히 관객들을 찾았다.
'블랙메리포핀스'와 '매드해터: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이하 매드해터)'는 모두 친숙한 동화적 모티브를 차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알맹이는 가볍지 않다. '블랙메리포핀스'가 아픈 과거를 마주하고 치유해 나가는 인간의 회복력을 조명한다면, '매드해터'는 억압된 현실 속에서 잃지 말아야 할 자유와 정체성을 노래한다.
◇ 잔혹 동화의 서막, 심리 스릴러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모든 아이들의 다정한 보모 '메리 포핀스'의 이름을 빌려왔지만,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가 그려내는 세계는 완벽한 잔혹 동화에 가깝다. 작품은 P.트래버스의 동화 '메리 포핀스'(1934)를 완전히 뒤집는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했다. 서윤미 작·작곡·연출가는 "원작 작가가 유년 시절의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반대로 가장 행복한 동화를 쓴 것이 아닐까"하는 상상을 덧입혔다.
뮤지컬은 1926년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 그라첸 박사의 대저택 방화 살인사건을 가상의 배경으로 삼는다.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보모 메리 슈미트와 극적으로 살아남은 네 명의 아이들 한스·헤르만·안나·요나스가 12년 후, 사라진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며 마주하는 끔찍한 진실을 추적하는 심리 추리 스릴러다.
'블랙메리포핀스'는 대본을 작게 변주해 하나의 사건을 각 캐릭터의 시선으로 풀어낸 세 개의 버전과 완결판이 존재하는 공연이다. 한스 버전 '메리포핀스 살인사건을 위한 변호', 헤르만 버전 '모래사나이가 나오는 꿈', 요나스 버전 '숲의 기억', 완결판 '안나의 방'이 이어지며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세 가지 버전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완결판인 '안나의 방'은 "우리 마음속에는 이미 행복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메리의 목소리를 빌려 따뜻한 구원의 해답을 건넨다. 파편화돼 존재했던 네 개의 서사가 이번 시즌 '올라운드 버전'을 통해 하나의 정교한 흐름으로 연결된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채 뒤집힌 책상을 형상화한 무대 위에는 세 개의 기둥이 서 있다. 이 기둥들은 각각 한스·헤르만·요나스를 상징한다. 오프닝을 장식하는 마리오네트 그림자 극은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살아온 아이들의 운명을 암시하며, 회전하는 턴테이블 무대와 5개의 의자, 배우들의 신체 언어에 가까운 밀도 높은 안무는 시공간과 의식·무의식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무너뜨린다.
추리물로서의 논리적 뼈대와 강렬한 서사 속 개연성은 다소 성글다. 극의 핵심인 '봉인된 기억의 해제'가 극적인 정공법보다는 최면을 통해 다소 쉽게 풀려버려 추리 본연의 카타르시스가 반감된다. 나치의 만행이라는 거대한 설정을 끌어들였음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과 기꺼이 동행하겠다"는 안전한 결말을 택해 아쉬움을 남긴다.
변호사 '한스' 역에 박정원·문경초·유태율, 화가 '헤르만' 역 윤승우·원태민·박준형·김경록, 음악 교사 '안나' 역 이정화·이한별·이재림, 공황장애와 언어장애를 동시에 앓고 있는 '요나스' 역 진호·조성필·정지우, '메리 슈미트' 역은 류수화·안유진·홍륜희가 분한다. 9월 6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공연된다.
▲ 뮤지컬 '매드해터: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 공연 사진.ⓒ홍컴퍼니
◇ 이상한 나라를 뒤흔든 두 소년의 저항, 뮤지컬 '매드해터'
1865년 영국의 동화 작가 루이스 캐럴이 발표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기이하고 괴팍한 인물이 나온다. 3월 토끼, 겨울잠쥐와 함께 끝없는 다과회를 열며 답이 없는 수수께끼를 던지는 인물, 바로 '매드 해터(Mad Hatter·미친 모자장수)'다.
이 독특한 캐릭터가 산업혁명기 노동자들의 잔혹한 현실과 정체성을 찾는 두 소년의 여정을 담은 뮤지컬 '매드해터'로 재탄생했다. 동화 속 넌센스의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 비극을 스크린과 텍스트를 넘어 무대 예술로 입체화했다.
소설 속 모자장수는 팔아야 할 모자를 머리에 쓴 채 3월 토끼의 집에서 허구한 날 차를 마시며 노닥거린다. 삽화가 존 테니얼이 그린 그의 커다란 실크해트에는 'In this Style 10/6(10실링 6펜스, 당시 모자 가격)'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어 그가 쓰고 있는 모자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팔기 위한 상품임을 보여준다.
캐릭터의 유쾌하고 엉뚱한 묘사 뒤에는 빅토리아 시대 노동자들의 눈물이 숨겨져 있다.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영어 관용구 'As mad as a hatter(모자장수처럼 미친)'는 당시 펠트 모자를 제조할 때 사용되던 질산수은에서 기인했다. 
환기가 되지 않는 밀폐된 공장에서 온종일 수은을 흡입했던 노동자들은 손발을 떨고(Hatter's shake) 말을 더듬으며, 끝내 정신 착란을 일으켰다. 루이스 캐럴은 동화라는 틀을 빌려 당대 모자 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과 비극적인 삶을 풍자적으로 투영했던 것이다.
2025년 초연된 뮤지컬 '매드해터'는 이 역사적 사실과 동화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버무렸다. 작품은 1851년 산업혁명기 런던을 배경으로, 생존을 위해 '정해진 모자'를 만들어야 하는 가혹한 현실과 각자가 '쓰고 싶은 모자'를 꿈꾸는 열망을 대비시킨다.
공연은 입체적인 2중 구조의 서사 전략을 취한다. 굴뚝 청소부에서 탑햇 공장의 노동자가 된 14살의 소년 노아가 친구 조슬린과 함께 기성의 틀을 벗어난 그들만의 모자를 만들어 파는 모험을 그린다. 아울러 노아가 공장 내부의 수은에 서서히 중독돼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며 원작의 어두운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강남 작가는 '쓰고 싶은 모자'라는 상징적 오브제를 통해 현대인들에게도 통용되는 정체성과 자유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여기에 리카C 작곡가의 드라마틱한 음악과 오루피나 연출의 감각적인 무대 미학이 결합해 독창적인 무대를 완성시켰다. 극의 핵심 소품이자 이야기의 중심축인 '모자'는 의상디자이너 조문수가 제작했다.
생존을 위해 모자를 파는 소년 '노아' 역에 이봉준·이한솔·홍기범·조환지·곽민수, 쓰고 싶은 모자를 그리는 '조슬린' 역에는 박영수·조성윤·송유택·서동진이 출연한다. 오는 8월 30일까지 대학로 TOM 1관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