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16일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79주기 추모식’을 19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윤봉길 의사 묘전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김학준) 주관으로 연다고 밝혔다.
추모식은 박유철 광복회장,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장과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일반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업회장의 식사(式辭), 서울지방보훈청장과 광복회장의 추모사,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된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927년에는 구매조합을 조직해 농민들의 경제자립을 독려했고, 독서회(讀書會)를 통해서 문맹퇴치에 힘썼다.
윤 의사는 1928년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 설립,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해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윤 의사는 일제의 전방위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는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했다.
윤 의사는 1932년 봄에 상해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장사로 위장해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던 중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한인교포단장인 김 구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나 독립운동전략을 논의하게 됐다.
같은 해 윤 의사는 4월 29일 일왕의 생일(천장절. 天長節)을 맞아 일본군이 여는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이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을 사살하기로 결심한다.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 홍구 공원의 전승식장에 들어간 윤 의사는 김 구로부터 받은 물병 폭탄 1개와 도시락 폭탄 1개를 단상 위로 던졌다. 이 폭탄으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켰다.
윤 의사의 ‘의거’는 순식간에 중국은 물론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해졌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윤 의사의 용기에 감동받은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과의 항일연대를 더욱 강화했다.
한편 의거 직후 현장에서 잡힌 윤 의사는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됐다.
윤 의사는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일제에게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셨다. 당시 25살이었다.
이국땅에서 순국한 윤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1946년 봉환되어 1946년 7월 7일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했다.
정부는 윤 의사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