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연합뉴스.
"이번 호황은 착시가 아니다. 진짜 돈이 들어왔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20일 페이스북에 올린 장문의 글은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현 정부 핵심 참모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올해 한국 경제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현재 상황을 "역대급 호황"으로 규정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산업이 만들어낸 수출 호조와 기업 이익 증가, 경상수지 흑자 확대, 세수 증가 등이 그 근거다.
하지만 같은 시기 골목상권과 자영업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뭇 다르다. 폐업을 고민하는 자영업자가 늘고, 은행권에서는 이자조차 받지 못하는 무수익여신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소득 하위 계층은 주식 투자보다 복권 구매를 늘리고 있다. 정책실장이 말하는 "역대급 호황"과 국민이 체감하는 현실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하는 셈이다.
◆ 역대급 호황이라는데 … 이자 못내는 '깡통 대출' 7년만 최대
김 실장의 글은 단순한 경기 낙관론이 아니다. 핵심은 한국 경제가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형태의 호황이 시작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는 올해 1분기 실질 GDP 증가율이 3.8%였던 반면 실질 국내총소득(GDI) 증가율은 13.2%에 달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국이 생산한 물건의 양보다 그것을 팔아 얻은 구매력이 훨씬 더 빠르게 증가했다는 의미다.
김 실장은 이를 반도체 가격 급등과 교역조건 개선의 결과로 해석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산업이 막대한 이익을 거두면서 국가 전체의 소득과 구매력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호황은 착시가 아니다"라며 "반도체가 벌어온 국부가 앞으로 시차를 두고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현실 경제의 풍경은 김 실장의 낙관론과 다소 거리가 있다.
김 실장 역시 글에서 "동네 상가는 공실을 걱정하고 폐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고 인정했다. 실제 각종 금융지표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올해 3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무수익여신 규모는 5조6084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2019년 1분기(5조9047억원) 이후 7년 만에 가장 많은 규모다.
지난해 말과 비교해도 12% 증가한 수치로, 같은 기간 전체 여신 증가율이 1.5% 수준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부실 자산 증가 속도도 훨씬 빠르다.
무수익여신은 90일 이상 연체되거나 부도 등으로 사실상 이자를 받지 못하는 대출이다. 이른바 '깡통대출'로 불리는 자산이 늘고 있다는 의미다.
은행권에서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상환 부담이 누적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수출 호조가 국가 경제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내수 경기와 골목상권까지 온기가 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한 식당.ⓒ뉴데일리DB
◆ 코스피 9000 시대 … 여전히 복권이 희망인 사람들
자산시장과 서민경제의 괴리는 소비 패턴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코스피가 사상 최고 수준을 향해 달리며 투자 열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저소득층은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소득 하위 20% 가구의 월평균 복권 지출은 전년 동기 대비 60.8% 증가했다. 반면 중산층과 고소득층의 복권 구매는 감소했다.
같은 기간 하위 20% 가구의 실질소득 증가율은 0.6%에 그쳤다. 반면 소비지출은 5.1% 늘었고 월평균 적자 규모는 43만8174원으로 확대됐다. 식료품과 주거비,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생활은 더 팍팍해졌다.
투자 여력이 있는 계층은 코스피 상승의 과실을 누리고 있지만, 생활비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은 자산시장에 참여할 여력조차 부족하다. 같은 상승장을 두고도 누군가는 자산이 불어나고 누군가는 복권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
코스피 상승은 단순히 종목 간 수익률 격차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자산시장에 참여할 여력이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사이의 격차도 함께 벌린다. 주가가 30% 오르더라도 투자 자산이 수천만원, 수억원인 사람과 생활비 마련에 급급한 사람의 체감 효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 양극화, 호황의 결과일까 지금의 성장 방식일까
김용범 실장은 국가 전체의 구매력과 소득 증가를 기준으로 한국 경제를 호황 국면으로 규정했다. 반도체 산업이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이 결국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고, 성장의 과실이 부동산에 쏠리지 않도록 청년·취약계층·미래산업으로 연결하는 것이 향후 과제라고 강조했다.
반면 현장에서는 양극화가 단순히 '호황 이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현재의 성장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반도체와 일부 IT 대기업에 이익이 집중되는 동안 자영업자와 취약계층은 고금리와 내수 부진을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 대기업의 고액 성과급은 직접 수혜를 받지 못하는 계층에도 생활물가와 금리 부담이라는 형태로 전가될 수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일부 IT 대기업의 대규모 성과급 지급이 전반적인 임금 상승으로 확산될 경우 물가 상방 압력이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 1분기 IT 업종 성과급은 전년 동기 대비 60.6% 급증해 전체 명목임금 상승률을 끌어올린 반면, 나머지 임금 상승률은 2.1%에 그쳤다. 반도체 호황의 과실은 일부 업종에 집중됐지만, 그에 따른 물가와 금리 부담은 더 넓은 계층으로 번질 수 있다는 의미다.
자영업자와 취약계층 입장에서는 반도체 기업의 호실적이 자신의 매출 증가나 생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고액 성과급이 소비와 임금 눈높이를 끌어올리고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 압력을 키우면서 경제적 부담은 호황을 체감하지 못한 계층에 더 크게 돌아갈 수 있다.
결국 반도체 호황의 과실은 일부 업종과 자산 보유층에 집중되는 반면, 그에 따른 물가와 금리 부담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실장이 우려한 "호황의 과실은 위로 향하고 긴축의 고통은 아래로 향한다"는 현상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