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지방선거 투표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지난 5일 잠실7동 제2투표소 개표가 마무리 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재선거를 주장하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 ⓒ정상윤 기자
6·3 지방선거 당시 전국 50개 투표소에서 빚어진 투표지 부족 사태의 출발점이 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50% 인쇄 지침'이 별도 회의나 회의록 없이 결정된 것으로 드러났다. 전국 곳곳에서 투표 중단과 참정권 침해 논란을 불러온 핵심 정책 변경이 '내부 결재'만으로 처리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선관위의 의사 결정 구조와 선거 관리 시스템 전반에 대한 책임론이 커지고 있다.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6·3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전국 1만4288개 투표소 중 투표지 부족 사태가 일어난 곳은 67개소였으며 이 중 50개소에 추가 송부된 용지가 사용됐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 35곳(송파구 15곳), 부산·경남 8곳, 대구 7곳, 인천 6곳, 울산 3곳 등이었다. 투표지 부족으로 아예 투표가 중단됐다가 재개된 곳은 총 22개소다. 
투표지 부족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선관위의 본투표용 투표지 축소 인쇄 방침이 지목된다.
선관위는 지난해 말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종합관리지침과 공직선거절차사무편람을 개정하면서 투표지 최소 인쇄 기준을 유권자 수 대비 60%에서 50%로 낮췄다.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이 선관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해당 기준 변경은 공식 회의가 아닌 내부 결재를 통해 결정됐다. 이는 지난해 12월 24일 '공직 선거 절차사무편람' 개정을 통해 확정됐다. 
선관위는 각 부서와 일선 선관위 의견을 수렴한 뒤 내부 결재를 거쳐 지침을 확정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별도의 회의는 열리지 않아 관련 회의록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곳곳에서 투표지 부족 사태를 불러온 핵심 결정이 공식적인 회의 절차나 기록 없이 이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선관위의 의사 결정 과정 전반에 대한 책임론도 커지고 있다.
실제 선거 당일 서울 송파구를 비롯한 전국 22개 투표소에서는 투표지가 바닥나면서 투표가 중단됐다. 일부 유권자는 장시간 대기 끝에 투표를 포기했고, 잠실7동 제2투표소는 투표 마감 시간이 오후 10시까지 연장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 사태는 지역별 인쇄 기준이 제각각 적용되면서 혼란이 더욱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관위가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에 제출한 '투표용지 부족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방선거 본투표용 투표지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비율로 제작됐다.
인천 옹진군선관위는 유권자 수만큼인 100%를 준비한 반면 서울 송파구는 유권자 대비 51% 수준만 인쇄했다. 광주와 세종은 50%, 강원은 66%를 인쇄했고 같은 수도권인 서울과 경기도 각각 51%, 58%로 차이를 보였다.
전국 255개 구·시·군 선관위가 자체적으로 과거 투표율과 지역 여건 등을 고려해 인쇄 물량을 산정하면서 지역별 편차가 발생한 것이다.
문제는 일부 지역 선관위가 과거 선거 데이터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사실상 하한선 수준으로 물량을 맞췄다는 점이다.
▲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5일 경기 과천시 중앙선관위에서 열린 6.3 지방선거 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사퇴 입장을 밝히는 장면. ⓒ정상윤 기자
선관위 편람에는 예상 사전투표율 등을 고려해 지역별 여건에 맞게 투표지 인쇄량을 조정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중앙선관위 도 지난해 12월 구·시·군 선관위에 "(투표지) 축소 인쇄가 필요할 경우 선거인 수의 50%를 하한선으로 삼고 개별 위원회 의결을 거쳐 조정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이는 2022년 지방선거 때 적용했던 '유권자 수의 60% 이상 인쇄' 기준보다 완화된 조치다. 사전투표 참여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본투표에 필요한 물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판단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본투표용 투표지 인쇄 규모는 유권자 수의 50% 이상 범위에서 각 지역 선관위가 자체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송파구는 2014년과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본투표율이 50%를 웃돌았음에도 사실상 최소 기준에 가까운 물량만 준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투표지 부족으로 투표가 중단되거나 지연되면서 유권자들이 발길을 돌렸고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도 일부 지역에서 투표가 계속 진행되면서 선거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도 불거졌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후폭풍은 정치권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재선거나 필요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잇따르면서 투표지 부족 사태가 선거 관리 실패를 넘어 선거 정당성 논란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국 단위 재선거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장동혁 대표는 전날 국회 기자회견에서 "하루라도 빨리 전국 재선거를 실시하는 게 작금의 혼란을 해결하는 최선의 길"이라며 전면 재선거 필요성을 주장했다.
장 대표가 전국 재선거를 촉구한 데 이어 신동욱·김민수·김재원·조광한 최고위원도 재투표 또는 재선거 필요성을 잇달아 제기했다. 당 지도부가 선거 관리 실패를 넘어 선거 정당성 문제로 규정하며 공세 수위를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지역에 한해 다시 투표를 실시하는 이른바 '핀셋 재투표' 방안이 거론된다. 최민희 의원은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장 대표의 전면 재선거 주장은 비상식"이라며 "투표용지가 문제된 지역만 재선거를 하자"고 밝혔다.
박선원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투표지 문제로 논란이 된 지역은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재선거와 문제 지역 재투표를 놓고 여야가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선관위 책임 규명과 선거 정당성 회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다.
선관위는 예상보다 높은 투표율에 따른 현상이라는 입장이지만 전국 50개 투표소에서 발생한 혼란의 출발점이 된 정책 변경 과정조차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책임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정치권도 선관위를 향한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여야는 각각 선관위 투표지 부족 사태와 선거 관리 부실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했다.
국민의힘은 한발 더 나아가 전날 '선관위 특검법'을 당론으로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특검 후보 추천 과정에서 민주당을 배제하고 국민의힘이 추천한 후보 2명 가운데 대통령이 1명을 임명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법 당국도 진상 규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서울동부지법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송파구 일부 투표소를 촬영한 폐쇄회로(CCTV) 영상과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발견된 투표지 보관상자 등 4건에 대한 증거 보전을 명령했다.
검찰도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를 본부장으로 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과정에서는 투표지 인쇄 기준 변경 경위와 의사결정 절차, 지역 선관위의 물량 산정 과정 등이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전망이다.
한편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 허철훈 사무총장은 지난 5일 6·3 지방선거 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나란히 사의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