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서울 과천청사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정상윤 기자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이 지난 5일 오후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한 후 사퇴 의사를 밝혔다. 취임 후 공식 사과만 네 번째다.

노 위원장은 2022년 5월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으로 노정희 당시 중앙선관위원장이 사퇴하며 선관위원장직에 올랐다. 취임 이후 첫 국정감사에서 소쿠리 투표 논란에 "송구하다"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후 2023년 5월 고위직 간부 자녀 특혜 채용 의혹으로 노태악 위원장이 사과했지만, 이후 직무감찰 등으로 다수 특혜 채용 사례가 적발돼 지난해 3월 재차 사과했다.
2025년 치른 제21대 대선에서는 사전투표 용지 반출 등 선관위의 관리 부실 논란이 일며 대국민 사과문을 냈다. 그러나 불과 1년여 만인 이번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또다시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 관리 부실을 넘어 여전히 일각에서 제기되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재차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책임져야 할 선관위가 오히려 선거 제도의 불신을 키운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노정희 전 위원장이나 노태악 위원장 모두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좌편향' 인사라는 점이다. 노 전 위원장은 진보 성향의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소속이었으며 노 위원장은 김명수 전 대법원장과 '술친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4번째 대국민 사과…임기 끝났는데 사퇴로 책임진다니 분통

노 위원장은 지난 5일 오후 과천청사에서 대국민 사과를 통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중앙선관위원장 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는 "(선관위가) 지방자치에 대한 국민의 높은 관심과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손상시켰고 선거 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하여 선거 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위원장으로서 참담함과 함께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국회 국정조사 등 선관위의 책임을 확인하는 모든 절차에 성실하게 임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면 결코 회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노 위원장은 지난 3월 임기 만료로 현직 대법관 신분을 벗어난 지 3개월 가까이 선관위원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대법관을 퇴임하면 선관위원장직에서도 물러나는 것이 통상 관례지만 후임 인선 진행이 늦어지면서 위원장 직을 그대로 맡아온 것이다.

이미 임기를 넘긴 시점에서 '사의'로 이 사태의 책임을 지겠다고 한 셈이다. 한 보수 유권자는 "노 위원장이 자신 임기가 끝났다는 점을 밝히고 사퇴 이야기를 했어야 함에도 마치 모든 책임을 지는 것처럼 말했다"면서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기만한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 노정희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뉴데일리DB
◆최악의 선거 '20대 대선'…'소쿠리 투표' 노정희·김세환 사퇴

노 위원장의 사과는 이 뿐만이 아니다. 2022년 3월 9일 20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치러진 '20대 대선'은 역대 최악의 선거 관리로 꼽힌다. 사전투표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은 끝에 당시 노정희 선관위원장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직접 사과까지 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대선 전인 3월 5일 확진·격리자 사전투표 과정에서 전국 선거장 곳곳에서 투표 관리가 부실히 진행된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유권자가 표를 직접 투표함에 넣지 못하고 소쿠리나 종이박스, 쇼핑백 등에 표를 넣게 해 민주주의 선거의 기본인 비밀선거 원칙이 훼손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아직 투표를 하지 않은 유권자에게 이미 특정 후보가 기표된 투표용지가 배포되는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사전투표 당일 노 위원장이 출근하지 않은 사실도 드러나면서 사퇴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당시 노 위원장은 사전투표 부실관리 논란으로 직접 사과한 뒤 "보다 투명하고 정확하게 투·개표를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9일 대선 투표날 경기 오산시 중앙동 제2투표소에서 투표하러 온 유권자가 투표를 하지 않았음에도 선거인명부에 자신에게 투표용지가 이미 배부돼 투표한 것으로 기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투표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났다. 당시 선관위 측은 사실을 확인하고 "일단 투표용지를 내어주고 투표하게 하라"고 번복했지만 해당 유권자는 이미 투표소를 떠난 뒤여서 빈축을 샀다.

또 같은 날 강원도 춘천 소양동제3투표소에선 한 유권자가 자신이 사전투표자인데도 투표사무원이 투표용지를 다시 교부했다고 주장하는 일도 발생했다. 대구 동구 안심1동 제8투표소에서도 이미 사전투표를 한 유권자 2명이 투표용지를 받고 본투표를 한 사실이 뒤늦게 발견돼 부랴부랴 경위 조사에 나서는 촌극이 빚어졌다.

비단 투표 뿐 아니라 개표 과정에서도 구설은 끊이지 않았다. 투표를 마친 뒤 전남 여수시의 진남체육관 개표소에선 봉인지에 참관인 서명이 없는 투표함이 2개(화양면·돌산읍 사전투표함)나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 남동구(남동체육관)에선 개표 중 일부 투표함에서 흰색이 아니라 누런색 사전투표용지가 나와 개표참관인이 이를 부정선거로 의심해 잠시 개표가 중지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같은 논란이 계속되자 김세환 사무총장의 사직안을 의결하는 수준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가 노 위원장 자신마저 사퇴 의사를 밝히며 퇴임했다. '소쿠리 투표' 논란이 발생한지 44일 만의 일이다. 이후 노태악 위원장이 취임했고 첫 국정감사에서 소쿠리 투표 논란에 "송구하다"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세자' 아들 특혜채용…'현대판 음서제'에도 면죄부

급기야 2014년엔 선관위의 채용 비리가 터졌다. 당시 감사원에 따르면 선관위는 지난 10년(2013~2023년)간 실시한 경력채용 291회에서 총 878건의 규정·절차 위반이 확인됐다. 선관위 고위직·중간 간부들은 인사담당자에게 거리낌 없이 연락해 채용을 청탁했다.

이른바 '아빠 찬스'와 같은 특혜 채용이 반복됐지만 선관위는 '전통' 이란 명목 하에 묵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가족회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선관위에는 '현대판 음서제'가 형성돼 있다고 알려졌다.

실제 노정희 위원장 시절 사무총장을 지낸 김세환 전 사무총장은 아들 김모 씨에게 유리하게 선관위 채용 절차를 진행한 것이 밝혀져 검찰 수사를 받았다.

아들 김씨는 강화군청에서 일하다 2020년 1월 경력 채용을 통해 인천 선관위로 이직했고 반년 만에 7급으로 승진했다. 채용 면접에는 내부 위원 3명이 면접관으로 참여했는데 모두가 김 전 사무총장과 인천에서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였다.

이들 중 2명이 김씨에게 만점을 줬고 나머지 1명도 5개 평가 항목 중 4개 항목에 최고점인 '상'을 준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검찰은 선관위가 김씨를 위해 일부러 인천 선관위 선발 인원을 늘리고 '5년 동안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없다'는 채용 조건도 없앴다고 봤다.

김 전 사무총장은 채용 당시 중앙선관위 사무처 2인자인 선관위 사무차장(차관급)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선관위 직원들은 내부 메신저에서 아들 김씨를 '세자'로 부르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심지어 김 전 사무총장은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관위 명의의 '비선 휴대전화'로 정치인들과 소통했다. 그는 대선 당시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에 책임을 지고 그해 3월 사퇴했지만 퇴직 후에도 1년 8개월 동안 이 핸드폰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노 위원장이 직접 사과했지만, 이후 직무감찰 등으로 다수 특혜 채용 사례가 또다시 적발돼 지난해 3월 재차 사과했다.
▲ ⓒ뉴데일리DB
◆최근 5년간 부정선거 모두 기각·각하…선관위-사법부 카르텔 심각

이렇게 선관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 것은 판사가 각급 선관위원장이 되도록 하면서 사법부와 선관위가 한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선거무효 등 부정선거와 관련해 소송이 벌어지면 선관위는 사실상 피고 측이지만 판사가 위원장인 조직을 상대로 동료 판사의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선거소송은 재판부 구성에서부터 '편견 배제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특히 중앙선관위는 대통령 임명 3인, 국회 선출 3인, 대법원장 지명 3인의 위원으로 구성한다. 위원장은 위원 중에서 호선한다(헌법 제114조 제2항)고 명시돼 있지만 관례적으로 대법원장은 1인의 대법관과 2인의 법관을 중앙선관위원으로 지명하고 그중 대법관이 중앙선관위원장을 맡는다. 17개 시도 선관위 위원장들도 현직 판사가 맡고 있다.

헌법기관 구성원이 또 다른 헌법기관의 장이 되는 것은 독립기관의 자기모순이다. 중앙선관위원장은 국회의장·대법원장·헌재소장과 더불어 5부 요인으로 꼽히지만 본직은 대법원 소속 대법관이다. 선관위 직원이 대법원에 가서 결재를 받는 기이한 구조다.

실제 최근의 선거소송 사례를 살펴보면 선관위·사법부 카르텔의 위력이 잘 드러난다. 최근 5년간 21·22대 총선(2020·2024년)과 20대 대선(2022년)에서 제기된 부정선거 관련 소송은 총 182건으로 집계됐는데 이중 소송 진행 중인 32건을 제외한 150건은 모두 기각, 각하, 소취하 결정이 나며 피고인 선관위의 승소로 종결됐다. 

◆최근 선관위원장 모두 '좌편향 인사'…무소불위 권력기관으로 변질

노정희 전 위원장의 전임인 권순일 전 대법관은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7년 12월 선관위원장이 됐다. 노 전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이 대통령의 선거법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해 대선에 출마할 수 있도록 했다.

나아가 2021년 말 '대장동 의혹'이 불거지면서 김만배씨가 '이재명 사건 파기 환송'을 전후해 '권순일 대법관실'을 8차례 방문했다는 대법원 출입 기록이 나왔다. 또 권 전 위원장이 퇴임한 뒤 화천대유에 고문으로 취업해 1억5000만원을 받은 것도 드러났다. 권 전 위원장은 '재판 거래' 의혹의 수사 대상이 됐다.

권 전 위원장은 2020년 9월 대법관 임기가 끝났는데도 관례를 깨고 선관위원장에서 바로 물러나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김세환·박찬진 전 사무총장을 각각 신임 사무총장(장관급), 사무처장(차관급)에 임명하는 인사를 하고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자녀 채용 특혜에 관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정희 전 위원장도 문재인 정부 시절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선임했다. 노 전 위원장은 법원 내 좌파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 법원도서관장을 역임할 당시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명 제청해 대법관이 됐다. 1995년부터 5년간 변호사로 활동할 때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활동했다.

이후 노 위원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후 노태악 위원장이 2022년 5월 선관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김명수 대법원장과 '술친구'라 불릴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 대법원장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됐다.

법조계 한 인사는 "선관위가 시간을 거듭하며 무소불위 권력기관으로 진화했고 현행 법리상 특검과 탄핵 외에는 선관위의 적폐를 척결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소쿠리 투표 논란, 북한 선관위 해킹시도 은폐 의혹 등이 불거졌음에도 모든 선거재판에서 승소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