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 대통령은 강연활동을 통해 미국의 언어와 문화를 학습하며 대중연설 능력을 키웠다."
17일 오후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이승만학당 주최로 열린 '제106회 이승만 포럼'에서 한서영(사진) 씨는 "이 전 대통령의 강연활동 경험은 향후 40년간 그의 정치활동에 굉장한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포럼의 주제강연 ‘미국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에 강연자로 나선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경험한 수백 차례의 강연활동으로 국제적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며 "향후 그가 작성하는 외교문서에도 대중연설을 준비하며 키웠던 역량이 밑바탕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청원외교 위해 미국행… 강연으로 인맥 형성"
한씨는 또 "처음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 존 헤이 국무장관 등 비중 있는 인사들을 접했던 이 전 대통령은 강연활동을 통해 정계·학계·교육계의 주요 인사들이나 다양한 대중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이 전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인맥을 확대하는 기회가 된 셈"이라고 주장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이수 중인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한 1905년부터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미국 대중을 대상으로 전개한 강연활동을 분석했다. 이날 강연은 <국제정치논총>(59집-2호)에 게재된 그의 논문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으로 건너간 목적은 청원외교 때문"이라며 "고종 황제의 측근인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서를 딘스모어 하원의원에게 전달하고, 국무장관을 면담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외교적 단절이 가속화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전 대통령은 공식적 외교접촉이 불가능해지자 유학생으로 체류했다"며 "이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할 때까지 미국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고 덧붙였다.
이 전 대통령이 미국에 체류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강연 횟수는 총 200회 정도라고 한씨는 주장했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은 한 달에 적게는 1회, 많게는 13회까지 강연을 했다"며 "강연 횟수는 1907년과 1910년을 제외하면 해가 갈수록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1905년 1월8일 워싱턴D.C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스미스교회(Mr. Smith's Church)’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며 "초창기에는 워싱턴D.C를 중심으로 강연하다 점차 중·동부지역으로 확대했다"고 부연했다.
국제 교류장을 강연장으로 '독립' 호소… 공공외교적 의미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교회를 비롯해 국제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강연장으로 삼았다고 소개했다. YMCA, 러스트홀국립훈련학교 선교사대회, 국제선교대회 등이 대상이었다. 장로교·감리교·침례교·루터교 등 교파를 넘나들며 강연하기도 했다.
한씨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들은 이 전 대통령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며 "이 전 대통령은 세계적 기독교 행사에 한국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초국가적 대중을 상대로 한국을 알렸다"고 말했다. 1906년 7월 약 3000명의 각국 청년대표가 모였던 메사추세츠주 노스필드 ‘만국학도공회’와 1908년 3월 3500명의 각국 대표가 모인 ‘제1회 피츠버그 국제선교사대회’ 등을 대표적 사례로 제시했다.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의 강연이 일본의 ‘한국 침략’ 상황을 전하고, 한국의 대외적 ‘독립’을 호소하는 공공외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당시 한국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공식적 외교창구는 폐쇄된 상황이었다"며 "이승만의 강연활동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부정적 공공외교를 부각시키고, 미국사회에 형성된 일본 우호적 인식에 대항하는 공공외교적 의미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17일 오후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이승만학당 주최로 열린 '제106회 이승만 포럼'에서 한서영(사진) 씨는 "이 전 대통령의 강연활동 경험은 향후 40년간 그의 정치활동에 굉장한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포럼의 주제강연 ‘미국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에 강연자로 나선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경험한 수백 차례의 강연활동으로 국제적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며 "향후 그가 작성하는 외교문서에도 대중연설을 준비하며 키웠던 역량이 밑바탕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청원외교 위해 미국행… 강연으로 인맥 형성"
한씨는 또 "처음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 존 헤이 국무장관 등 비중 있는 인사들을 접했던 이 전 대통령은 강연활동을 통해 정계·학계·교육계의 주요 인사들이나 다양한 대중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이 전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인맥을 확대하는 기회가 된 셈"이라고 주장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이수 중인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한 1905년부터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미국 대중을 대상으로 전개한 강연활동을 분석했다. 이날 강연은 <국제정치논총>(59집-2호)에 게재된 그의 논문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으로 건너간 목적은 청원외교 때문"이라며 "고종 황제의 측근인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서를 딘스모어 하원의원에게 전달하고, 국무장관을 면담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외교적 단절이 가속화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전 대통령은 공식적 외교접촉이 불가능해지자 유학생으로 체류했다"며 "이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할 때까지 미국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고 덧붙였다.
이 전 대통령이 미국에 체류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강연 횟수는 총 200회 정도라고 한씨는 주장했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은 한 달에 적게는 1회, 많게는 13회까지 강연을 했다"며 "강연 횟수는 1907년과 1910년을 제외하면 해가 갈수록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1905년 1월8일 워싱턴D.C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스미스교회(Mr. Smith's Church)’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며 "초창기에는 워싱턴D.C를 중심으로 강연하다 점차 중·동부지역으로 확대했다"고 부연했다.
국제 교류장을 강연장으로 '독립' 호소… 공공외교적 의미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교회를 비롯해 국제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강연장으로 삼았다고 소개했다. YMCA, 러스트홀국립훈련학교 선교사대회, 국제선교대회 등이 대상이었다. 장로교·감리교·침례교·루터교 등 교파를 넘나들며 강연하기도 했다.
한씨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들은 이 전 대통령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며 "이 전 대통령은 세계적 기독교 행사에 한국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초국가적 대중을 상대로 한국을 알렸다"고 말했다. 1906년 7월 약 3000명의 각국 청년대표가 모였던 메사추세츠주 노스필드 ‘만국학도공회’와 1908년 3월 3500명의 각국 대표가 모인 ‘제1회 피츠버그 국제선교사대회’ 등을 대표적 사례로 제시했다.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의 강연이 일본의 ‘한국 침략’ 상황을 전하고, 한국의 대외적 ‘독립’을 호소하는 공공외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당시 한국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공식적 외교창구는 폐쇄된 상황이었다"며 "이승만의 강연활동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부정적 공공외교를 부각시키고, 미국사회에 형성된 일본 우호적 인식에 대항하는 공공외교적 의미가 있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