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日총독부 거금 받고 '대한민국' 국호 반대
[김필재 칼럼] 좌파정권, 친일파에 건국 훼방놓은 여운형에 건국훈장 대통령장 줬다
기사입력 2011-07-22 16:16:11 | 최종수정 2011-07-25 10:55:07 | 김필재 기자
민족문제연구소에 묻는다

민족문제연구소, 여운형(呂運亨)의 친일(親日)행적은 왜 뺐나? 
  
친일(親日)-친북(親北)으로 얼룩진 ‘여운형(呂運亨)의 생애’
金泌材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발간한 ‘親日(친일)인명사전’에는 건국(建國)을 방해한 공산주의자 여운형(呂運亨)이 빠져있다. 연구소의 조사부실과 이념적 편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주>

소련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우리말로 옮긴 여운형(呂運亨)과 그가 주도한 建準(건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정국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1945년 8월10일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 내의 일본인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게 될 것을 우려해 宋鎭禹(송진우)에게 국내 치안유지의 모든 권한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송진우(宋鎭禹)는 이를 거절했으며 金俊淵(김준연)도 동일한 교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러한 송진우(宋鎭禹)와 김준연(金俊淵)의 거절에 놀란 총독부는 제3의 인물로 1945년 8월15일 아침 8시 여운형을 정무총감 관저로 급히 초대해 조선이 해방을 맞아 정치적 공백기에 처했을 때의 치안유지의 협력을 요청했다.

여운형(呂運亨)은 이를 즉석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 김일성을 만나 울고 있는 여운형 후손들.

 ‘치안유지의 협력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여운형(呂運亨)은 그 날로 좌익계의 鄭栢(정백), 崔容達(최용달) 등과 함께 건준(建準)을 조직하고 동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건준(建準)의 깃발 아래 1945년 8월30일까지 145개의 건준(建準) 지방위원회가 결성됐다. 조직 기반이 취약한 여운형은 남로당의 당수 朴憲永(박헌영)과 제휴, 건준(建準)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여운형은 建準 결성 후 ‘건국치안대’를 조직 했는데, 이 치안대는 9월2일자로 建準에 통합됐다.

 그러나 건준(建準)이 좌경으로 변질되자 부위원장 안재길 및 민족진영 인사들은 建準을 사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建準은 1945년 9월3일 2차 개편대회를 열고 이강국을 비롯한 골수 공산주의자들을 간부로 등용한 뒤,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과 연합했다. 같은 해 9월4일 建準은 박헌영, 여운형, 정백 등 4명에 의한 인공설립준비위원회를 거친 뒤, 9월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人共)을 선포했다. 
건준(建準)은 인공(人共)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1945년 9월6일 해외에서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민족진영 인사들 가운데 이승만(李承晩)을 주석으로, 김구(金九)를 내무장관에 정해 놓는 등 일방적으로 내각 명단을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욱이 인공의 중앙인민위원회의 내각구성원을 살펴보면 전체 인원 52명 가운데 72%인 38명이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종오著, 《변질되어가는 한국사의 진상(上)》, 43페이지 인용)

이처럼 여운형(呂運亨)의 建國(건국) 구상과 행적은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전위역할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呂運亨은 또 일제치하에서 입건되어 서울지방법원 재판과정에서 일본을 위해 獻身(헌신)하겠다는 ‘충성서약’을 한 親日(친일) 세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대동신문> 1946년 2월 17, 18일자에 따르면 여운형(呂運亨)은 1943년 2월6일 일본 검사에게 제출한 진술서에서 “일본을 위해 對(대)중국 공작을 할 수 있으니 기회를 달라”며 漢詩(한시)까지 지어 충성을 맹세했다. 시(詩)의 내용은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砲煙彈雨又經筆·포연탄우우경필) 나라 위해 젊은 목숨 바치기를 청하네(爲國請纓捨一身, 위국청영사일신) 천억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千億結成共榮日, 천억결성공영일) 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太平洋水洗戰塵, 태평양수세전진)”이다. 여기서 ‘천억’은 일본이 중심이 된 동양(東洋)을 말한다.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년 9월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에서 여운형에 대해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2,000만 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1950년 11월 UN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도 그를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趙炳玉(조병옥) 박사는 《나의 회고록》(도서출판 해동, 1986, 163~164페이지)에서 여운형의 친일(親)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여운형, 안재홍 두 사람은 日政(일정) 말기에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전에는 항일파요, 민족적 지도자로 관록을 가진 여운형, 안재홍 씨 두 분은 영국령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필리핀의 마닐라가 일본에 의하여 점령당한 후 미-영 연합국이 패전하고 일본이 승리한다고 오산한 나머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끼(小磯國昭)에게 불려가서 소위 대동아전쟁에 협력할 것과 황국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만약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여기에 그 증거로서 매일신보에 실린 담화와 논문과 사진들이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보시오. 누구의 필적이며 누구의 사진인가를(이하 생략)”

이기하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 급조》와 한국일보사가 1987년 발행한 《한국의 정당》에는 呂運亨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韓人(한인) 제1호’라며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議政院(의정원) 대의원, 임정 외교부장관과 노동청년단장을 역임하는 한편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뒤, 이르쿠츠크 재건공산당 상해지부당원, 소련 공산당 한인(韓人) 제1호 입당, 조선공산당 해외부원, 중공당강소성(中共黨江蘇省黨)입당 활동 중 상해에서 일본 영사경찰에 체포, 본국에 압송되어 3년간 복역 후 중외일보(中外日報) 사장 등을 거치며 활동하다가 權泰錫(권태석)을 만나게 된다…….(중략) 그러나 얼마 후 日일본세화회(本世話會) 주선으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여운형의 약속으로 일본인 대표로부터 70만원의 거액을 받고 사태가 수습됨으로써 건준 활동은 재개했다.”

한민성의 《추적 여운형》(갑자문화사, 1982년, 100페이지)에는
呂運亨이 처음부터 ‘대한민국’이란 국호(國號)를 극력 반대하고 ‘조선공화국’을 주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 좌파정부 시절 국가보훈처는 제86주년 3ㆍ1절을 맞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여운형에게 수여했다.@(서울=연합뉴스)

“공산주의자로서의 여운형의 족적이라면 한 마디로 말해서 소련공산당의 세계적화 공작에 뛰어들어 그 주구(走狗)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적화 공작에 앞장서서 그 하수인으로서 죽는 날까지 놀아났다. 일급 하수인답게 그의 당적(黨籍)도 화려하다. 즉 상해파, 고려공산당원 이르크츠크파 공산당원, 소련공산당원, 조선공산당원, 중국공산당원, 중국국민당원(중국 적화 공작을 위해 침투), 장안파 공산당의 비밀당원 공산분자들이 일야(一夜)에 날조(捏造)한 소위 인민공화국의 부주석, 인민당 당수, 가짜 김일성파인 사회노동당위원장, 북로당계인 노동인민위원장 등으로 소련공산당 지령에 따라 조국과 민족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공산당원답게 공산당을 위해 광분하였다.”( 《추적 여운형》, 갑자문화사, 1982년, 187페이지)

<현대공론>(이현택, 1988년 9월호 432~433페이지)에 게재된 ‘여운형의 딸들은 왜 서울에 올 수가 없는가’에는 월북(越北)한 여운형 일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몽양의 유가족들이 생존의 보호막을 찾아 월북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가슴 속에서 통곡한 사람은 여운구 씨의 선친인 여운홍 씨였다. 1985년 가을 이산가족 방문단이 평양에 갔을 때 여연구 씨가 인민회의 부의장으로 환영회장에 나왔었다는 것이 공식적 확인이었다. 그 밖에는 단편적인 미확인자료이지만 큰 누님(장녀) 난구(鸞九)는 이미 연로했으니까 알 길이 없고, 둘째 연구는 무슨 단체의 사무총장, 그리고 4남 붕구(鵬九)는 수산업 관계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3남 영구의 소식은 전혀 모르겠다고 여운형 일가의 최근 상황까지 밝히고 있다.”

이처럼 呂運亨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정국을 올바른 길로 수습해야 할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월북(越北)해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그의 딸 여연구(1996년 사망)는 생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북한 정권에 충성을 바쳤다. 여연구는 문익환, 유원호 등의 방북(訪北)을 알선하기도 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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