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1946년 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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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라볼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과거에 대입하는 일이다. 우리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불과 2년 뒤 6·25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1946년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당시의 선택을 평가하려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결말을 잠시 내려놓고, 그들이 실제로 마주했던 상황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이 펴낸 '이승만 독트린 - 정읍선언 대한민국의 위대한 시작'. ⓒ기파랑
그런 점에서 1946년 6월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내놓은 이른바 '정읍발언'은 지금까지도 논쟁적인 장면이다. 오랫동안 학계와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출발점으로 평가했고, 더 나아가 이승만에게 분단의 책임을 묻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해 왔다. 실제로 정읍발언 이후 이승만이 남한에서라도 정부를 먼저 구성해야 한다는 노선을 본격화했다는 해석은 지금도 존재한다.
최근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님의 『이승만 독트린 - 정읍선언 대한민국의 위대한 시작(도서출판 기파랑 刊)』을 읽으며 이 오래된 논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특히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대목에서 인 회장님이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은 정읍에서 나온 한마디만이 아니다. 스탈린의 한반도 구상에서 시작해 이승만의 귀국과 반공 노선, 미소공동위원회의 교착, 정읍선언과 이후의 국제외교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뉴데일리에 연재된 『이승만 독트린』에서도 인 회장님은 정읍선언을 '남한만의 국가를 만들자는 선언'이 아니라 미·소에만 한반도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자주통일을 모색한 국가전략으로 해석한다.
인 회장님의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정읍선언이 한반도의 분단을 만들어낸 것인가, 아니면 이미 빠르게 굳어지고 있던 분단 현실에 대한 이승만의 대응이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정읍에서의 한마디만 떼어놓고 볼 것이 아니라,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나 역시 『이승만 독트린』을 읽으며 정읍선언을 바라보는 출발점을 1946년 6월 3일보다 조금 더 앞으로 돌려놓게 됐다.
1. 해방과 동시에 시작된 또 다른 현실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35년의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났다. 거리에는 태극기가 나부꼈고 사람들은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과 별개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군의 항복을 처리하기 위해 한반도에는 북쪽의 소련군과 남쪽의 미군이 각각 진주했고, 38선은 양군의 군사적 경계가 됐다. 처음부터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영구적인 분단선으로 예정돼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영향 아래 정치·행정체제가 빠르게 재편됐고,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됐다. 하나의 나라였던 한반도에서 서로 다른 두 점령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독트린』 5장에서 인 회장님은 이 시기의 스탈린과 소련의 움직임을 집중적으로 추적한다. 책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이승만의 정읍선언을 분단의 출발점이라고 규정하려면 적어도 그 선언이 나오기 전 북한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33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것은 1945년 10월 16일이었다. 그가 국내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서로 다른 정치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한 뒤였다. 따라서 해방 이후의 분단 과정을 이승만 개인의 구상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그 이전부터 움직이고 있던 국제정치의 힘이 너무 컸다.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일부 연구자들은 스탈린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이 정읍발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해석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정읍발언 항목 역시 이러한 학계의 견해가 존재한다는 점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읍선언을 둘러싼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누가 먼저 분단을 말했는가'라는 정치적 공방을 넘어 1945년과 1946년 당시 남북에서 실제로 어떤 정치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2. 처음부터 '남한만의 정부'를 원했던 것인가
이승만을 처음부터 남한만의 정부를 세우려 했던 정치인으로 규정하는 것도 당시 상황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승만 독트린』 6장에서 인 회장님은 귀국 직후 이승만의 발언과 행보를 추적하며 그의 초기 목표가 38선의 고착이 아니라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북한 강토를 회복해 통일독립을 이루는 데 있었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인 회장님은 당시의 이승만을 '돌아온 우리 대통령'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면서 귀국 직후부터 소련과 38선 문제를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인식했다고 서술한다.
이승만은 귀국 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며 좌우 정치세력을 아우르는 정치적 통합도 시도했다. 이후 정치적 갈등과 반공 노선의 강화 속에서 좌익세력과의 결별이 이루어진다.
특히 1945년 12월 17일 이승만은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 한국의 현실에서 공산당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도 공산주의라는 사상 자체와 자신이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라고 부른 정치적 행동을 구분했다. 폴란드와 중국 등의 사례를 들면서 외국의 힘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 정치세력이 독립국가 건설을 위협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이는 당시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오늘의 시각에서는 이승만의 강경한 반공 노선에 대해 여러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의 눈에 해방 직후의 한반도는 단순히 좌와 우가 경쟁하는 정치 공간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고, 동유럽에서는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는 한반도 역시 이러한 국제정치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이승만 독트린』을 읽으며 이 대목에 특히 눈길이 갔다.
이승만의 선택에 동의하느냐와 별개로, 적어도 그의 정치적 판단을 이해하려면 그가 무엇을 목표로 했는지만큼이나 무엇을 가장 큰 위험으로 인식했는가를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3. 미소공동위원회, 통일정부라는 희망과 현실의 충돌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국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졌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 정치세력이 격렬하게 충돌했고,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계열과 이승만 등은 반탁의 입장에 섰다.
이후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회의는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앞으로 만들어질 임시정부와 협의할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충돌했다. 결국 양측은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5월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정읍선언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간적 순서가 나타난다.
정읍선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이승만이 먼저 남한 단독정부를 주장한 사건이 아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협상이 실제로 진행됐고 그것이 교착된 뒤에 나온 선택이었다.
물론 당시 다른 길도 있었다. 여운형과 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움직이고 통일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살리려 했다. 미군정도 한동안 이들의 좌우합작을 지원했다.
반면 이승만은 미·소의 합의를 계속 기다리는 방식만으로는 한국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승만 독트린』에서 인 회장님은 정읍선언 이전부터 이승만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책에 소개된 돈암장 발언도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읽힌다. 미·소 협상이 실패할 경우 우리 스스로 정치적 기반을 만들고 북한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구상이 정읍선언 이전부터 형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어느 길이 현실적이었는지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느 쪽도 결과가 보장돼 있지 않았다.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지,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정상화될지, 소련이 북한에서 어디까지 별도의 체제를 구축할지 누구도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불확실성 한가운데에서 이승만은 다른 길을 제시했다.
4.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나온 선택
1946년 6월 3일 지방을 순회하던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훗날 한국 현대사의 가장 논쟁적인 발언 가운데 하나가 되는 말을 남겼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통일정부 수립도 여의치 않다면, 남쪽에서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와 같은 정치조직을 만들고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수하도록 세계 여론에 호소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오늘날 이 발언을 읽으면 '남방만이라도'라는 대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정읍선언은 흔히 남한 단독정부론의 출발로 기억된다. 실제로 이 발언 이후 이승만이 남한 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것도 역사적 평가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러나 인 회장님은 바로 이 대목에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왜 '남방만이라도'만 읽고 그 뒤에 이어지는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한다'는 부분은 함께 읽지 않느냐는 것이다. 인 회장님의 『이승만 독트린』에서 정읍발언을 단순한 '발언'이 아니라 하나의 '선언'으로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뉴데일리 연재에서 인 회장님은 이를 미·소에 맡기지 않고 우리 힘으로 자주통일을 추진하자는 구상으로 해석한다.
물론 이것은 인 회장님의 분명한 역사해석이다. 정읍선언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본격적인 출발로 평가하는 견해 역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한 문장만 선택해 읽는 것이 아니라 발언 전체와 그 전후 상황을 함께 살펴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읍에서 이승만이 제시한 구상에는 남한의 정치조직 수립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소련군의 철수와 세계 공론에 대한 호소도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정읍선언의 성격은 조금 복잡해진다.
이를 영구분단을 선언한 한마디라고 읽을 것인지, 아니면 통일정부 수립이 교착된 상황에서 남쪽에 우선 정치적 기반을 만든 뒤 북한 문제를 국제사회로 가져가려 했던 단계적 구상으로 읽을 것인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나는 후자의 해석에 좀 더 주목하게 됐다.
그 이유는 이승만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읍선언이 나오기 전과 후의 행적을 하나의 흐름으로 놓고 보면 그의 최종적인 관심이 단순히 '38선 이남의 국가'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들이 있기 때문이다.
통일정부가 최선이라는 데에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946년의 이승만이 마주한 문제는 결국 그것이었다.
5. 정읍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유엔으로
『이승만 독트린』 7장에서 인 회장님의 시선은 국내 정치에서 국제정치로 옮겨간다.
이 부분에서 책이 강조하는 이승만의 특징은 분명하다. 한국 문제를 국내 정치세력끼리의 경쟁이나 미·소 양국의 협상에만 맡겨두지 않고 국제사회가 다루는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정읍선언에서도 이미 '세계 공론에 호소'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후 이승만은 1946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문제를 국제적으로 제기하기 위한 외교활동에 나섰다.
당시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이 처음부터 이승만의 구상과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상당 기간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해결과 좌우합작을 모색했다. 이 점을 빼놓고 이승만의 외교를 설명하면 당시 상황이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그러나 국제정세 자체는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1947년 3월 미국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됐다. 한반도에서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렸지만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1947년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이승만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한마디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국제정치는 한 사람의 구상만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미·소 협상만으로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국제사회에 한국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 회장님이 『이승만 독트린』에서 이 대목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읍선언을 1946년 6월 3일의 한 번의 연설로 끝내지 않고, 이후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와 한국 문제의 국제화, 그리고 유엔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실제로 인 회장님은 자신의 연재에서 이를 '이승만의 유엔 외교'라는 흐름으로 연결해 설명한다.
그 해석에 대한 평가는 독자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정읍선언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남방만이라도'에서 문장을 멈출 것이 아니라, 그 뒤 이승만이 어디로 움직였는지까지 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6. 『이승만 독트린』이 다시 던진 질문
『이승만 독트린』을 덮고 난 뒤 내게 남은 것은 이승만에 대한 단순한 찬반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정치지도자의 선택을 평가할 때 우리는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읽기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승만은 한국 현대사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집권 과정과 통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할 역사적 문제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 평가를 해방 직후의 모든 선택에 그대로 소급해 적용하는 것 역시 역사적 인물을 이해하는 충분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특히 정읍선언은 이승만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해방 직후 한반도가 마주했던 선택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통일정부를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았을까.
아니면 북한에서 별도의 정치체제가 굳어지고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교착된 상황에서 남한에서라도 먼저 정부를 세워 국가의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을까.
우리는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1946년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역사는 결과만으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시 존재했던 선택지를 살펴보고 각각의 선택이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지도자가 무엇을 근거로 판단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정읍선언 역시 마찬가지다.
이승만이 남한에서라도 정부를 먼저 조직하자는 주장을 했다는 사실을 지울 필요도 없고, 그것을 억지로 다른 의미로 바꿀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왜 1946년 6월의 이승만이 그 지점까지 갔는가이다.
그보다 앞서 한반도에는 이미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해 있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영향 아래 새로운 정치질서가 형성되고 있었고,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 대상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멈춰 섰다.
그 상황에서 이승만은 더 기다리는 것보다 남한에서라도 정치적 기반을 먼저 확보하는 길을 택했다.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 분단을 심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한반도 분단의 시작이었으며 이승만 한 사람의 의지가 분단을 만들어냈다는 설명 역시 당시의 국제정세와 1945년부터 진행되고 있던 남북의 정치적 변화를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정읍발언 이전부터 북한에서 별도의 정치체제 구축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연구와 해석이 존재한다는 점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 회장님이 『이승만 독트린』을 통해 던지는 문제의식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
역사는 때때로 한 문장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한 문장으로 기억되는 역사일수록 그 문장의 앞과 뒤를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남방만이라도'라는 다섯 글자만으로 정읍선언을 기억한다면 이승만은 분단을 주장한 정치인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앞에 있었던 소련의 북한 정책과 미소공동위원회의 교착을 보고, 그 뒤에 이어진 '세계 공론에 호소하겠다'는 구상과 국제외교까지 함께 놓고 보면 조금 다른 질문이 가능해진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분단이었는가, 아니면 통일이라는 최선을 당장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생각한 최악을 먼저 막으려 했던 것인가.
나는 『이승만 독트린』 5·6·7장을 읽으며 후자의 가능성을 이전보다 무겁게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고 이승만의 모든 선택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공과를 함께 놓고 이루어져야 한다. 오히려 그래야 그의 선택 가운데 무엇이 성공했고 무엇이 실패했는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다만 1946년 정읍에서의 선택만큼은 '통일 대 분단'이라는 간단한 구도로 재단하기에는 당시의 현실이 너무 복잡했다.
최선의 선택지가 사라져갈 때 지도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상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최악을 막기 위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80년 전 정읍에서 끝난 질문도 아니다.
오늘의 대한민국 역시 강대국 간 경쟁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엄중한 국제환경 속에 있다. 물론 오늘의 국제질서를 1946년에 그대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 시대도 다르고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국가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외교와 안보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최선과 최악이 선명하게 나뉘어 있을 때가 아니다. 어느 선택에도 비용이 있고 어느 길에도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할 때다.
인보길 회장님의 『이승만 독트린』은 바로 그 지점에서 1946년의 이승만을 다시 불러낸다.
분단을 원했는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말고, 통일정부 수립의 길이 막혀가고 북한에서 별도의 체제가 형성되는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지, 그리고 당시 현실적으로 어떤 선택지가 남아 있었는지를 함께 보자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정읍선언을 그렇게 다시 바라보게 됐다.
분단을 선택한 선언이라기보다 통일이라는 최선을 당장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최악을 피하기 위해 국가의 기반부터 지키려 했던 현실주의의 선택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