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앞 눈물 참고, 돌아와 아내 영정에 입교 알려朴 "가슴 뭉클하여 간신히 참고 태연한 체 하였으나""어머니가 있었더라면" … 아들 떠난 뒤 "온 집안이 텅 빈 듯"가족과 찾던 저도에서도 "그대만은 오지를 못하였으니"
  •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일을 맞아 육영수 여사와 자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일을 맞아 육영수 여사와 자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영화 '암살자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내 피격 관여를 암시해 역사왜곡 비판을 받는 가운데, 생전 일기에는 아내를 잃은 슬픔과 가족을 향한 애정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다. 일기에서 박 전 대통령은 아들을 육군사관학교에 보내며 눈물을 참았고, 돌아와 아내의 영정 앞에서 아들을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다.

    1일 뉴데일리가 살펴본 박 전 대통령의 일기에 따르면, 그는 1977년 1월 30일 아들 박지만씨(현 EG 회장)를 서울 태릉 육사에 데려다준 뒤 가족이 생활하던 청와대로 돌아와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찾았다. 육 여사와 사별한 지 약 2년 5개월이 지난 때였다.

    일기에는 "집에 돌아와서 영수 영정 앞에 가서 '지만이가 오늘 육사에 들어갔소. 내가 지금 데려다주고 돌아왔소. 당신께서 앞으로 늘 지만이를 보살펴 주시오' 하고 고하다"라고 적혔다.

    아들의 입교를 아내에게 알린 뒤에는 집에 남은 가족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육 여사의 부재 속 함께 지내던 막내를 떠나보낸 두 딸도 눈물을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은 아들의 빈방을 정돈하며 허전함을 적었다.

    그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란 왜 이다지도 약할까. 집에 돌아오니 근혜, 근영이도 어머니도 안 계신 어린 동생 하나 같이 있다가 잠시나마 떠나보내는 것이 몹시 서운한 듯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오전 중에 지만이 방을 정돈하였다. 온 집안이 텅 빈 듯하다. 군에 자식을 보내는 모든 부모의 심정은 다 마찬가지리라"라고 썼다.

    일기 속 '근혜'는 박근혜 전 대통령, '근영'은 훗날 개명한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이다.

    박 전 대통령의 일기 중 '지만이 육사 가(假)입교'로 소개된 이날 기록은 영하 14~15도의 추위 속에서 아들과 아침을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가입교는 정식 입학에 앞서 학교에 들어가는 절차다. 박 전 대통령은 오전 7시 아들을 깨운 뒤 8시 반 함께 식사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아들이 눈시울을 붉히자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타일렀지만, 자신도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그는 "'육사와 같은 훌륭한 학교에 가는데 사나이 대장부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찌하느냐' 하고 타이르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여 간신히 참고 태연한 체하였으나, 이 자리에 저의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나도 몹시 마음이 언짢었었다. 저것이 저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저러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참을 길이 없었다"고 적었다.

    여기서 '저의 어머니'는 지만씨의 어머니인 육 여사를 가리킨다. 아들의 눈물을 보며 박 전 대통령 역시 아내의 부재를 떠올린 것이다.

    육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아들 걱정은 이어졌다. 자신의 육사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격려하면서도, 혹한 속에서 아들이 훈련을 견딜 수 있을지 염려했다.

    그는 "9시 20분 청와대를 출발하다.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청와대 많은 직원들이 현관에 나와서 전송해 주었다. 지만이와 한 차에 타고 태릉 육사로 가면서 차 안에서 지만이와 여러 가지 환담을 하면서 격려를 하였다. 창밖에 날씨가 매섭게 차기만 하다. 이 추운 날씨에 지만이가 훈련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러다가도 육사 생도 복장에 늠름한 모습으로 외출 나온 지만이 모습이 또 눈에 떠오른다. 육사까지 가면서 내가 육사 2기 시절의 이야기도 해주었다"고 썼다.

    이어 "육사 본관 현관에서 지만이를 내려 주고 '몸 건강히 열심히 잘해, 지만이' 하고 신입생 접수장으로 보내고 육사 교장실에 들어가서 교장 정승화 장군과 잠시 환담하다가 귀저하다"라고 적었다. 귀저는 거처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육 여사는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가, 박 전 대통령을 저격하려던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그날 숨졌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만 22세, 박근령 전 이사장은 만 20세였고, 막내 지만씨는 만 15세였다.
  •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들 지만씨의 육군사관학교 가입교를 하루 앞둔 1977년 1월 29일 작성한 친필 일기.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들 지만씨의 육군사관학교 가입교를 하루 앞둔 1977년 1월 29일 작성한 친필 일기.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아내의 빈자리는 입교 전날인 1977년 1월 29일 부자의 대화에도 나타났다. 박 전 대통령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들을 격려한 뒤, 밤에도 잠들지 않은 듯한 아들의 방을 찾았다. 방을 정리하던 지만씨는 낮에 어머니의 묘소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말은 하지 않지만 지만이도 내일 집을 떠나는 것이 무엇인가 섭섭한 듯 밤에도 자기 침실에서 오래 취침하지 않고 있는 듯하여, 지만이 방에 찾아가 보니 방 정리하느라고 꾸물거리고 있었다. 낮에는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왔다고 하기에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 없더냐'고 농담을 하였더니 '육사 입교하거든 남에게 지지 않게 열심히 잘하라고 어머니가 타이르시더라'고 대답하였다. 자식을 길러 봐야 부모의 심정을 비로소 안다던 옛말이 새삼 실감 있게 느껴진다"고 썼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날이 다가오자,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을 배웅하던 어머니도 떠올렸다. 1940년 3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고향 구미역에서 북행 열차를 타던 때의 기억이었다.

    그는 "내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하여 1940년 3월 하순 어느 날 쌀쌀한 봄바람이 옷자락을 스며드는 고향 구미역 북행선 플랫폼에서 멀리 이국 땅 북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하여 북행 열차 타고 떠나는 나를 전송하기 위해 칠순 노구의 어머니께서 나오셔서 나의 옷자락을 붙잡으시며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고 하느냐' 하시며 노안에 눈물을 흘리시던 그 모습이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고, 어머님의 흰 옷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들어 흔드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완연하다"고 적었다.

    이어 "그날 어머님의 심정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하셨을까. 어머님, 너무나 불효막심하였습니다. 이제 용서를 빌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고 썼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남긴 일기에는 함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기다리던 마음이 담겨 있다. 대통령 취임 전인 1954년 6월 14일, 박 전 대통령은 서울에 있는 아내와 딸을 다시 만날 모습을 떠올렸다. 그해 6월 30일 태어난 박근령 전 이사장의 출생을 16일 앞둔 때였다.

    그는 "일전에 타코마에서 보낸 편지가 영수의 손에 들어갔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번잡한 서울 한 모퉁이에서 내가 돌아올 날만을 고대하고 있을 영수! 인천 부두에서 기다릴 영수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근혜를 안고 '근혜 아빠 오셨네' 하고 웃으면서 나를 반겨 맞아 줄 영수의 모습!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라고 적었다.

    넉넉하지 않은 셋방살이였지만,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집을 자신의 유일한 낙원으로 표현했다.

    그는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도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맑은 마음의 우물에 샘솟는 나의 집이거늘 없는 것이 무엇이랴, 영원한 마음의 양식이 우리 가정을 지켜 줄 것이다"라고 썼다.

    태어날 아이를 두고는 아들이든 딸이든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름 후보를 하나씩 적은 뒤에는 아내와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는 "불원(不遠) 우리 가정에는 새로운 희보(喜報)가 기다리고 있다. 남아일까 여아일까. 무엇이든 관계할 것이 없다. 다만 영수와 내가 부모로서 최선을 다할 뿐. 이것만이 우리들이 할 일.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라고 적었다.

    이어 "남아일 때는 태평양 상에서 본 구름과 같은 기운을 상징시켜 운(雲)자를 넣을까. 시운(時運), 수운(秀雲), 일운(一雲), 일운(逸雲), 일훈(一薰), 여아일 때는 근숙(槿淑), 운숙(運淑), 근정(根貞), 근랑(根浪), 운희(雲嬉). 영수와 상의하여 결정하기로, 결정권은 영수에게 일임하자"라고 썼다.
  •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4년 7월 27일 딸 근영씨(현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의 독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기 19일 전 작품이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4년 7월 27일 딸 근영씨(현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의 독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기 19일 전 작품이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가족과 함께 누렸던 행복과 아내를 잃은 뒤의 상실감은 시에도 남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저도의 추억'에서 여름마다 가족과 찾던 섬을 돌아보며, 아내만 돌아오지 못한 빈자리를 적었다.

    그는 "해마다 여름이면 그대와 함께 이 섬을 찾았노니 모든 시름 모든 피로 다 잊어버리고 우리 가족 오붓하게 마음껏 즐기던 행복의 보금자리 추억의 섬, 저도"라고 썼다.

    이어 "올해도 또 찾아왔건만 아, 어이된 일일까 그대만은 오지를 못하였으니"라며 "그대와 같이 맨발로 거닐던 저 백사장 시원한 저 백 년 넘은 팽나무 그늘 낚시질 하던 저 방파제 바위 위에 그대의 그림자만은 보이지 않으니"라고 적었다.

    함께 걷던 백사장과 낚시하던 방파제뿐 아니라 아내가 쓰던 물건도 그대로였다. 박 전 대통령은 그 흔적들 앞에서 생전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그대의 손때 묻은 가구 집기 작년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미소 띤 그 얼굴 다정한 그 목소리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건만 그대의 모습은 찾을 길 없으니 보이지 않으니 어디서 찾을까"라고 썼다.

    이어 "해와 달은 어제도 오늘도 뜨고 지고 파도 소리는 어제도 오늘도 변치 않고 들려오는데 임은 가고 찾을 길 없으니"라고 적었다.

    시는 아내가 먼 하늘의 별이 되어 가족의 추억이 남은 섬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는 "저 창천에 높이 뜬 흰 구름 따라 저 지평선 너머 머나먼 나라에서 구만 리 장천 은하 강변에 푸른 별이 되어 멀리 이 섬을 굽어보며 반짝이고 있겠지"라며 "저-기, 저 별일까 저 별일 거야"라고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