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국(제작) 허진호(감독)의 선동선을 넘었다, 그것도 한참!사법적 책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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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 영화《암살자(들)》에 표현-예술의 자유를 허(許)핳 수 있을까? 고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를 암살토록 했다는《암시》가《영화적 상상력》인가? 복잡한 법률이론을 들이대지 않고 그저 평범한 상식에서 보더라도 이건《예술》이 아니다. 고인을 악마화해서 돈벌려는 못된 심뽀에 불과하다. ⓒ 삽화 = 챗GPT
영화《암살자(들)》에 대한 비판이 뜨겁다.표현의 자유를 악용,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패륜 범죄자로 암시했다는 것이다.예술을 사칭한 사악한 돈벌이 에 불과하다는 격앙된 직격탄도 쏟어진다.국민대 법대의 이호선 교수(변호사)는《동물 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의 명언을 인용, 이 영화에 대해《흥행을 노린 프로파간다》 라고 단정했다.그는 또 제작진은 법적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며, 변호사로서 몇가지 법률적 질문을 던졌다.다음은 이호선 교수의 페북 게시글 전문이다.메인 제목 등과 페북 글 내 하이라이팅은 뉴데일리의 편집이다. -
- ▲ 이호선 국민대 법대교수(변호사)의 페북. ⓒ 화면 갈무리
■ "모든 프로파간다가 예술이진 않다"《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은 찰스 디킨스를 논하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예술이 어떤 가치도 담지 않은 채 진공 속에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작가는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는 버린다.누구를 바라볼 것인지, 누구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인지도 선택한다.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이미 하나의 주장이다.그러나 오웰은 곧바로 한 문장을 덧붙였다."그러나 모든 프로파간다가 예술인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이 찰스 디킨스를 높이 평가한 이유오웰이 디킨스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그가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충실하게 선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오히려 반대였다.디킨스에게는 이상하리만큼 일관된 본능이 있었다.힘센 사람보다는 힘없는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본능이었다.그는 급진적이었지만, 혁명가는 아니었다.구빈원과 채무자 감옥,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함을 고발했지만, 체계적인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가톨릭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톨릭이 박해받는 위치에 놓이면 그들의 편에 설 수 있었다.귀족을 조롱하면서도, 귀족이 군중의 희생양이 되는 순간에는 다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그에게 중요한 것은《누가 우리 편인가》가 아니라《지금 누가 힘을 가지고 있고, 누가 그 힘에 눌려 있는가》였다.그래서 디킨스의 인물들은 복잡한 정치이론을 말하지 않는다.희극적이고 때로는 과장되고 단순하다.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기억된다.오웰이 본 디킨스의 힘도 거기에 있었다.오웰은 디킨스가 보통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보통 사람의 타고난 품위와 정의감을 표현할 줄 알았다고 보았다.그래서 그는 노동자에게도 읽혔고, 중산층에게도 읽혔으며,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였으면서도 영국 사회 전체의 작가가 되었다.모두의 작가가 된 셈이다.아닌 게 아니라 그는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예술을 사칭한 프로파간다(선전-선동)영화《암살자(들)》논란을 보면서 이 디킨스를 떠올리게 된다.예술이 프로파간다인 것은 죄가 아니다.문제는 그 프로파간다가 누구를 향하는가이다.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예술의 오래된 역할이다.다수가 환호할 때 홀로 의심하고, 모두가 한 사람을 공격할 때 잠시 멈추어 그 사람에게도 할 말이 없는지를 묻는 것이 예술가의 특권이다.그런데 이번 영화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이미 죽어 반론할 수도 없는 사람에게 새로운 죄를 하나 더 얹는다.그리고 그것을《예술적 상상》이라고 부른다.내가 보기엔 그냥《딴따라 본능》이다.사실을 비틀고 왜곡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다.줄거리만 놓고 보면 북한 선전영화의 문법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어진다.북한에 저작권료라도 줘야 할 판이다.제작진은 결론을 단정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가정의 형식으로《물음표》를 남겼을 뿐이라고.그러나 물음표에도 방향이 있다.관객 대부분이 한 방향으로 걸어 나오도록 설계된 물음표라면, 그것은《질문》이 아니라《사악한 암시》이다.■ 예술의 자유 빙자, 없는 죄를 고인에게 뒤집어 씌우다역사적 사실의 빈 곳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것은 예술의 자유다.그러나 상상력을 동원하여 죽은 사람에게 새로운 죄를 만들어 주는 것 은 전혀 다른 문제다.하물며 그 죄가 자기 아내를 죽였다는 것이라면.더구나 이것은 한 가족의 개인사를 넘어 한 국가의 역사와도 맞물리는 장면이다.K-문화를 말하면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영화인 하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서글픈 일이다.그래서 오웰의 디킨스 평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오웰이 디킨스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었다.누가 강자인지 살피고, 누가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지 살피고, 그 편에 서려는 평범한 인간의 품격이었다.오웰은 그 평론의 마지막에서 디킨스의 얼굴을 이렇게 그렸다.늘 무언가와 싸우지만 공개적으로, 두려움 없이 싸우는 사람.관대하게 분노하는 사람.그리고 그런 자유로운 지성은 우리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다투는《냄새나는 작은 정통 교리들》모두에게서 똑같이 미움받는 유형이라고 했다.그래서 역설적으로 디킨스의 급진성은 그를 어느 한 진영의 작가로 만들지 않았다.그것이 그를 오래 남게 했다.오늘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이런 사람이 없는가.디킨스가 웨스트민스터에 묻힌 것은 그가 권력자의 편이어서도 아니고, 당대의 유행에 충실해서도 아니었다.시대의 편보다 인간의 편에 서려고 했기 때문이다.공개된 기록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로 사자를 불러내 돌을 던지고, 평가는 관객의 몫이라며 슬그머니 책임을 비켜 가면서 흥행 수익은 챙기는 충무로《딴따라》들 은 훗날 어디에 묻힐까.묘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다.이 영화 하나로 그들은 관객의 절반을(그것도 아주 보수적으로 잡아서) 스스로 등지는 배우, 절반의 감독으로 쪼그라드는 길을 택했다.예술이 자기 시대의 편견에 가장 충실했던 순간은 훗날 예술이 가장 먼저 부끄러워했던 순간이기도 했다.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일 수 있다.그러나 모든 프로파간다가 예술인 것은 아니다.그리고 이번 프로파간다는 선을 넘었다.■ 법적 책임 관련 질문(서비스 차원)그나저나 법률가로서 영화《암살자(들)》의 제작자들에게 묻고 싶다.유족이 법적 책임을 물을 때를 대비해 답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한때는 괜찮게 보았던 사람들도 있어서, 서비스 차원에서 알려 준다.○ 이 영화를 위해 제작진은 어떤 문헌을 조사했는가.○ 어떤 역사학자와 사건 관계자를 인터뷰했는가.○ 박정희 배후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1차 자료가 있었는가.○ 그 자료의 신빙성을 어떻게 검증했는가.○ 반대되는 자료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배제했는가.○ 각본 초안에서 사실과 허구를 어떻게 구별했는가.○ 유족에게 사실을 확인하거나 반론의 기회를 주었는가.○ 관객이 허구를 사실로 오인하지 않도록 영화 안에서 어떤 고지를 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