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논란 휩싸인 영화 '암살자(들)'허구와 사실의 경계 무너뜨리는 문화의 힘넘쳐나는 창작 자유만큼 책임도 무거워야
-
영화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역사책보다 훨씬 뚜렷하게 역사를 기억하게 만든다. 한 장면, 한 인물의 표정, 몇 마디 대사만으로 관객의 머릿속에 수십 년의 역사를 압축해 넣을 수 있다. 역사적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 땐, 영화가 만들어 낸 '허구'가 대중에게 '실제 역사'로 각인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다큐멘터리가 아님에도 역사를 극화한 수많은 작품들이 '고증'에 힘을 써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 영화 '암살자(들)' 스틸 컷. ⓒ하이브미디어코프
최근 개봉한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이 영화는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서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미스터리의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당시 문세광을 범인으로 확정한 공식 수사 결과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고,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와 경찰의 수사 과정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는 듯한 장면을 배치했다.
제작진은 남아 있는 기록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표현의 자유'와 '역사적 책임'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한다. '암살자(들)'은 수사와 재판을 거쳐 마무리된 사건을 수십년 만에 끄집어 내 이미 사형당한 범인이 진범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사건의 배후로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핵심 세력을 거론하고 나섰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의심 가득한 등장 인물들의 눈길은 당시 정권의 수뇌부를 향하고 있다. 영화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 그 의문이 어떤 이미지와 서사로 관객에게 전달되고, 결국 무엇을 '사실'처럼 기억하게 만드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암살자(들)'은 영부인이 총에 맞아 쓰러진 이 초유의 사건을 두고 총탄과 탄도, 수사 과정 등을 차례로 짚어가며 의문을 제기한다.
중부서 경비계장 철구(유해진 분)는 현장에선 총성이 여섯 번 울렸는데 발견된 탄환은 네 개뿐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대통령 연단이 급히 방탄으로 바뀐 사실이 드러나고 진상을 캐려는 경찰과 기자를 중앙정보부가 제지하는 일까지 일어나면서 이 사건에 국가권력급 배후가 있다는 의혹이 대두된다. 철구를 비롯한 주인공들은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이 자작극을 벌였을 가능성을 의심하지만 끝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실패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제작진이 끄집어 낸 의혹의 뿌리는 육 여사 피살 사건 당시 수사본부에 참가했던 이OO 서울시경 감식계장의 인터뷰에 기인한다.
◆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미지가 '역사'로 각인
이씨는 1989년 8월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현장 검증에서 네 발의 탄흔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탄두는 한 개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과 △문세광과 경호실의 권총이 같은 종류의 리볼버라는 점 △문세광이 타고 온 검은색 포드 승용차의 차량번호가 등록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문세광의 '공범'이 국내에 있다고 추정했다.
이 외에도 이씨는 문세광이 소지한 리볼버 권총은 다섯 발의 실탄밖에 장전할 수 없다는 점과 육 여사가 총알을 맞은 관통상 위치 등을 들어, 문세광은 육 여사를 쏜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또 이씨는 육 여사뿐 아니라 합창단에 포함됐다가 참변을 당한 장봉화 양까지 문세광이 살해한 것으로 작성된 기소장을 거론하며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 내 암투의 산물로 해석했다.
'암살자(들)'에서 유해진이 연기한 경비계장과 박지환이 연기한 감식계장은 이씨의 주장을 토대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도 과거 이씨가 했던 주장들을 반복하는 모습이 나온다.
중요한 점은 엄혹했던 시절 수사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을 수는 있으나 암살범이 문세광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72년 9월 3일, 문세광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민단과 조총련의 친선 모임에 '한청'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것은 사실. 그 자리에서 조총련 간부 김호룡을 만났고, 김호룡에게 포섭된 문세광이 8·15 저격 사건을 실행했다는 사실은 당시 수사 및 재판 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문세광이 김호룡에게 공작금 50만 엔을 받은 사실도 밝혀졌고, 1974년 10월 북한 김일성이 북한 주재 소련 대사 글레브 크리울린에게 "문세광은 민단의 좌익 인사"라며 "남조선은 박정희에 대한 암살 시도를 조선(북한)과 연계하려 하고 있으나, 이들은 남조선 정치인 김대중을 추종하는 자들"이라고 밝힌 사실이 기밀 해제된 구 동독 외교 문서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문세광이 범인이 아니었다면 김일성이 문세광과의 관계성을 부인하는 말을 할 까닭이 없다.
북한이 '배후'였음을 암시하는 발언도 이미 나온 상태다. 2002년 5월 13일 북한 김정일은 당시 방북한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에게 육 여사 피격 사건을 거론하며 "하급자들이 관련된 것으로,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사건의 유족이 버젓이 생존한 상태. 이후 외교 문서 등을 통해 진범이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난 사건을 두고 반세기 만에 '진범'과 '배후'를 의심하는 영화가 개봉됐다. 영화 어디에도 북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발언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의심은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씨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이씨의 주장을 답습한 배우들의 매소드 연기를 지켜본 관객 중 일부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극장 밖을 나올지도 모른다.
◆ 기록이 말하는 것과 영화가 말하지 않은 것
진실과 허구를 그럴듯하게 섞어 놓으면 그 경계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역사를 다룬 영화의 무서운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일수록 영화의 장면은 실제 기록보다 더 강렬할 수 있다. 누군가 알려진 역사를 정반대로 뒤집어 보는 영화를 기획했다면, 창작의 자유를 논하기에 앞서 관객들에게 미칠 파장을 고민해 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적 가치와 문화적 표현이 결합하면 영화가 사회의 '상식'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에 따르면 영화는 매우 강력한 '진지'가 될 수 있다. 영화관에 들어간 관객에게 정치 구호를 외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조명을 비추고, 부패한 권력자에게는 어두운 얼굴을 입히면 된다. 어떤 인물에게는 인간적인 사연을 부여하고 다른 인물에게는 탐욕과 비열함을 집중시킬 수도 있다. 관객은 그것을 정치학 강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인물, 하나의 감정으로 받아들인다. 영화관을 나선 뒤 남는 것은 때때로 논리가 아니라 이미지다.
암살자(들)을 만든 제작사는 그동안 '남산의 부장들' '하얼빈' '서울의 봄' 등 굵직한 근현대사를 극화한 작품을 꾸준히 시장에 내놨다. 제작사 측은 관객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와 이야기의 힘을 강조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역사가 소재로 된 것이라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역사가 돈이 되고, 역사가 흥행이 되고, 역사가 거대한 영화적 세계관이 되는 순간 그 영화를 단순한 오락물로 치부하긴 힘들어진다.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넘어섰다는 사실은 영화가 한 시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얼마나 빠르게 확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 편의 영화가 수백만, 천만 명의 관객을 만나는 순간 역사학자가 수년 동안 책으로 설명해야 할 사건이 두 시간 남짓한 서사로 압축된다. 그리고 그 서사에는 반드시 선택이 들어간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할 것인가. 누구의 시선을 따라갈 것인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생략할 것인가. 어떤 의문을 강조하고 어떤 사실을 배경으로 밀어낼 것인가. 이 선택에는 제작자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향력에 걸맞은 책임도 따른다.
그람시의 진지전을 오늘날 대한민국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무리다. 시대도 다르고 영화산업의 구조도 다르며 대중의 미디어 소비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나 그람시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는 선거일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기억도 역사책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화관에서도 만들어진다. 어떤 인물을 영웅으로 기억할 것인지, 어떤 권력을 악으로 기억할 것인지, 어떤 사건을 비극으로 기억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의문을 끝내 풀리지 않은 진실처럼 기억할 것인지가 모두 문화의 영역에서 결정된다.
그렇다고 영화에 '족쇄'를 채우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영화는 더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자유로울수록 더 정교해야 한다. 특히 실제 인물과 실제 희생자가 존재하고, 아직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
- ▲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된 직후의 장면.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