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주기행'서 맏딸 '장주' 역 맡아 열연"어릴 때 9년간 '동화' 들으며 자라""좋은 감독들 일찍 만난 건 행운""저보다 영화 전체가 잘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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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공효진에게 영화 '경주기행'은 단순히 새로운 작품 하나를 더한 경험으로 남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이야기에 끌리고, 어떤 방식으로 연기를 해 왔으며, 좋은 작품을 위해 배우가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를 다시 확인한 시간에 가깝다.
'경주기행'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딸 경주를 위해, 8년의 기다림 끝에 ‘죽이는’ 여행을 떠난 네 모녀의 가족 복수극이다. '제24회 피렌체 한국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며 해외 관객에게 먼저 작품의 힘을 인정받기도 했다.
공효진이 연기한 장주는 가족의 맏딸이자 엄마 옥실(이정은 분)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다. 하지만 단순히 엄마를 따르는 딸은 아니다. 자신의 남편과 딸을 둔 장주는 복수를 향해 달려가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그 선택이 또 다른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바라본다.
공효진은 장주를 두고 "자매들의 사이드가 아니라 엄마의 사이드에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엄마가 하고 싶은 것을 풀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죠.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장주는 '나도 엄마고, 내 딸도 있는데 내가 문제가 생기면 얘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딸이었다가 엄마가 되는 지점에서 장주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장주의 선택은 영화 안에서도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공효진 역시 그 답을 하나로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주가 어쩌면 복수가 실패하기를 바랐을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엄마의 손에 피가 묻는 순간, 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가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주가 속으로는 복수가 실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엄마가 직접 피를 묻히게 되면 그것도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될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마음까지 제가 정답처럼 만들어버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관객들이 각자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
◆ "자연스러운 딕션, 그게 제가 가진 설득력 아닐까요"
장주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공효진 자신의 연기론으로 이어졌다.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설득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공효진은 한참 생각하다 '자연스러움'을 꼽았다. 화려한 수식어를 배제한 담백한 답이었다.
"제가 왜 사랑을 받는지, 제가 뭘 선택해서 사람들이 설득되는 건지 저도 가끔 생각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는 대사를 자연스럽게 하는 걸 잘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딕션이 제 장점이 아닌가 싶어요."
공효진은 자신의 말투와 표현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됐을지 떠올리다가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를 꺼냈다. 배우가 되기 전부터 동화책을 읽고 테이프를 듣는 일이 일상처럼 이어졌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화 테이프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눈을 뜨면 동화 테이프를 듣고, 책을 같이 보면서 들었거든요. 부모님이 거의 9년 정도 그렇게 해주셨어요. 그때는 제가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신 건 아니었겠죠."
그는 당시의 경험이 지금의 연기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동화'를 듣고 자란 시간이 자신의 언어 감각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줬을 수 있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체득한 감각이 배우 생활 초기에 만난 감독들과의 작업을 통해 더욱 편안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게 공효진의 설명이다. 김태용·민규동 감독 등과 작업하며 카메라 앞에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보다 자신의 방식으로 장면에 존재하는 법을 익혔다.
공효진은 "처음부터 너무 엄격한 감독님들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싶다"며 오히려 자신을 편안하게 끌어내 준 감독들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자연스러움'을 추구해 온 공효진의 연기에는 타고난 감각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방식부터 배우가 된 뒤 자신을 자유롭게 꺼내도록 도와준 감독들과의 경험까지, 공효진은 자신만의 언어와 리듬을 조금씩 만들어왔다.
'미쓰 홍당무',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미씽: 사라진 여자', '싱글라이더', '가장 보통의 연애'처럼 규모나 장르보다 이야기와 인물의 결을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들을 택하면서 꾸준히 '공효진다운' 연기를 펼쳐왔다. -
◆ "감독님이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공효진이 '경주기행'에 마음을 쏟은 이유는 잘 짜인 대본 때문만이 아니었다. 김미조 감독이 만들어낼 영화에 대한 믿음도 컸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구렁이 꿈이나 청테이프가 붙은 봉고차의 고장 난 라이트 같은 디테일에서 감독의 색깔을 느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영화 곳곳에는 슬픔과 웃음이 예상 밖의 타이밍에 교차하는 독특한 리듬이 흐른다.
"처음부터 감독님의 색깔이 확실했어요. 그래서 그 색깔을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하고 싶은 걸 시간에 쫓겨서 못 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해드리고 싶었죠."
이는 단순히 감독을 배려한 말로만 들리지 않는다. 공효진은 "이제는 제 캐릭터만 잘 해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배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제가 맡은 캐릭터가 잘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영화 전체가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캐릭터만 잘하는 것보다 이 장면에서 다른 배우가 어떻게 보이는지, 영화 전체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지는지가 더 중요해졌어요."
그래서 그는 촬영 현장에서도 장주만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연기한 이정은, 박소담, 이연과 장면을 맞추고, 서로의 연기를 보며 균형을 고민했다.
특히 네 배우가 경주라는 공간에 오랫동안 머문 시간은 작품 밖에서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촬영이 없는 시간에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비가 오면 함께 불국사를 찾기도 했다. 술을 많이 마시는 모임은 아니었지만, 먹고 이야기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가까워졌다.
"저희가 계속 붙어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졌어요.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라 그냥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고, 뭐 먹을지 고민하고 그랬죠.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정말 가족처럼 된 것 같아요." -
◆ "경주는 영화 속 장소이면서, 배우들에게도 하나의 기억이 됐죠"
공효진에게 경주는 낯선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수학여행으로 한 번 찾았던 것이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촬영을 위해 도시 곳곳을 오가면서 경주의 풍경을 새롭게 발견했다. 특히 도시 곳곳에 자리한 고분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큰 무덤들이 도시 안에 자연스럽게 있는 곳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영화 속 막내딸의 이름이 '경주'인 것도 흥미로운 장치다. 사람의 이름과 도시의 이름이 겹치면서, 가족이 떠나는 여행의 의미가 단순한 장소 이동을 넘어 상실한 가족을 향한 기억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공효진은 이 설정이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도 좋은 장치라고 봤다.
무엇보다 그가 기억하는 '경주기행'은 복수극이라는 장르보다 사람들 사이의 '시간'에 가깝다. 슬픔과 웃음이 교차하고, 엄마와 딸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끌어안고, 네 배우가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며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낸 시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효진은 장주를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이 어떤 배우인지 확인했다.
"저는 좋은 이야기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잘 살리고 싶어요. 제가 돋보이는 것보다 영화가 잘 만들어지는 게 더 중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공효진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이 말은 의외로 자연스럽다. 자신만의 색을 갖고 있으면서도 작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줬고, 때로는 크지 않은 영화에서 더 깊은 인물의 결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제는 한 장면, 한 캐릭터를 넘어 영화 전체를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이 넓어졌다.
'경주기행'에서 장주는 엄마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엄마가 된다. 공효진 역시 배우로서 자신의 자리만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씩 넓혀왔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K-장녀' 장주의 연기가 아니다. 한 작품을 함께 만든 사람들이 서로의 몫을 살려주고, 감독이 가진 색을 지켜내며, 이야기 전체를 완성해가는 과정에 기꺼이 자신의 경험을 내어주는 배우의 태도다.
공효진에게 '경주기행'은 그렇게 또 하나의 필모그래피가 됐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왜 오래도록 배우의 길을 걸어왔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한 작품으로 남았다. -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