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도, 쿠테타도 아니었다민주시민 요구를 5공지도부가 수용한 것선진산업화 성공이 민주화 토대됐다권위주의-민주화 세력간 힘의 균형 덕분
  • ▲ 87년 6월.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두 세력간의 힘의 균형은 팽팽했다. 유혈사태 일보 직전 상황이었다. 류근일 본사 논설고문은 그것을《뜨거운 열정과 냉정한 절제가 동시에 양립했기에 한국판 무혈 명예혁명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 삽화 = 챗GTP
    ▲ 87년 6월.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두 세력간의 힘의 균형은 팽팽했다. 유혈사태 일보 직전 상황이었다. 류근일 본사 논설고문은 그것을《뜨거운 열정과 냉정한 절제가 동시에 양립했기에 한국판 무혈 명예혁명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 삽화 = 챗GTP
    [편집자 주]
    류근일 본지 논설고문의 자전적 에세이《와서 배우고 갑니다》를 간추려 전합니다. 
    류 고문은 2025년 6월 3일 결행한 은퇴 후에 자서전을 집필했습니다. 
    [개인적 이야기] 아닌 [보편적 관심사] 부분만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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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빙(解氷) 새 아침, [87 민주화] 어떻게 왔나? 

     
    1987년의 한국 민주화는 혁명에 의해서도 쿠데타에 의해서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6.10 민주시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5공 지도부가 6.29 선언으로 전폭 수용함으로써 가능했던 평화적-합의적 변화였습니다.  
     
    이 과정엔 물론 긴박하고 역동적인 두 번의 리듬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리듬,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진 사태. 

    당국은 이것을 쉬쉬했습니다. 

    “책상을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더라.” 
                                            - 치안본부장

    이 턱도 없는 조작이 내부자 고발로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5공은 그걸로 끝났습니다. 
     
    그때의 상황을《류근일 칼럼》은 이렇게 전했습니다(조선일보 1987/02/08). 
    일부를 발췌합니다.  
     

  • ▲ 1987년 2월 8일 조선일보 3면.ⓒ 조선일보 DB
    ▲ 1987년 2월 8일 조선일보 3면.ⓒ 조선일보 DB
    《한 알의 밀알처럼 떨어져 간 박종철 열사》
     
    고통은 우리 삶의 불가분한 일부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삶의 귀중한 의미를 캐낼 수 있어야만 한다. 박종철 군의 희생을 진실로 애도하는 길은,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고통의 의미를 정확하게 판독하는 데 있다.  
     
    벗들이여, 우리 기꺼이 고통스러워하자. 철저히 아파하고 끝까지 앓아보자. 고통의 심연(深淵)으로 내려앉아 거기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똑똑이 확인하기로 하자. 그런 다음 우리 다시 솟아오르자. 철저하게 절망하고 철저하게 신음해 본 자만이 진솔한 희망을 발원(發願)할 수 있다. 박종철 군의 참혹한 죽음은 두 개의 극적인 대목을 함축한다. 
     
    첫째 대목. 죄 없는 어린 양의 희생이다. 그는 왜 아무 죄도 없이 희생당했나? 우리 모두의 죄를 몽땅 걸머지고 속죄양이 된 것이다. 우리 죄는 무엇인가? 권력을 우상화한 죄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하늘 같은 인간을 학대한 죄다. ‘국가 발전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너무나 하찮게 안 죄다. 
     
    그가 간 십자가의 길은 ‘한 알의 밀알’ 같은 순교였다. 
    그의 희생은 많은 새싹이 나게 하고, 많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이것이 그의 헌신이 던지는 두 번째 메시지, 부활의 메시지다.  이제 박종철 군은 그리고 우리는, 절망의 밑바닥까지 와 닿았다. 그의 처참한 죽음은 우리에게 고통과 절망의 밑바닥을 응시하고 확인하게 한 값진 대리 체험이었다. 밑바닥을 보았으면 다시 솟아 올라갈 차례다. 박종철 군의 부활이 시작된 시간이다. 희망으로의 U턴이 시작될 시각이다.  
     
    부활과 승리는 그렇다면 어디에 터 잡을 것인가? 그것은 일찍이 아우슈비츠의 고통을 체험했던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랑클이 말한 ‘고도의 도덕적 선택’으로 비롯된다고 필자는 믿는다. 
     
    프랑클은 다시 말한다. “집단 수용소에 살았던 우리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마지막 빵조각까지도 건네주며 유유히 걸어 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발명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가스실에 들어가면서도 고즈넉이 주기도문을 읊조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고문도 없고 인간다움이 보장되는 사회, 권력 절대주의에 대신해서 시민민주주의가 꽃피는 사회를 지향한 우리의 승리의 순간은, 바로 이와 같은 ‘고도의 도덕적 선택’을 용감히 결행하려 할 때 비로소 우리 앞에 동터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비관적 민주화론에만 [의도적으로 머물 수만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넘어서, 어떻게 하면 박종철 군의 [평화적-합의적 민주화] 충정을 제도권에서 가능한 한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이게 한국 민주화 과정에 있었던 두 번째 리듬입니다.
    1987년 6월 한 달 사이에, 마침내 우리 청춘 30년의 긴 꿈《민주화의 그날》이 그렇게 왔습니다. 
     
    어떻게 이런《무혈 명예혁명(Bloodless, Glorious Revolution)》이 가능했을까요? 
    더군다나 한국 같은 극단적인 흑백 양분의 땅에서! 
     
    ①
    1970년대~1980년대에 이르는 한국의 선진 산업화가 성공한 덕택입니다. 
    민주화의 경제적 토대가 이룩됐다는 뜻입니다. 

    ② 
    1987년 당시,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었던 덕택입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한국의 평화적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것을《권위주의체제의 평화적 민주화》에 관한 정리된 이론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환 린즈(Juan Linz) 예일대 교수였습니다.  
     
    1987년 7월 초 서울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그가 참석했습니다. 
    나는 그를 그의 숙소 하얏트 호텔에서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1987년 7월 4일 자 조선일보 3면에 난 인터뷰 일부를 소개합니다.  
     

  • ▲ 1987년 7월 4일자 조선일보 3면. ⓒ 조선일보 DB
    ▲ 1987년 7월 4일자 조선일보 3면. ⓒ 조선일보 DB
    《환 린즈 인터뷰》
     
    환 린즈 예일대학 정치학 교수가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는 프랑코 총통 사후(死後) 스페인의 민주화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스페인,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권위주의체제에서 민주화로 전환한 과정을 연구한 학자다. 그를 본사 류근일 논설위원이 1987년 7월 3일 하얏트 호텔에서 만났다(편집자). 

    류근일 위원 : 최근 권위주의체제였던 여러 나라들이 민주화하고 있다. 그 배경은 무엇인가? 

    린즈 교수 : 민주화하고 있는 나라들엔 공통점이 있다. 
    권력의 정당성 여부가 걸려있다는 점이다. 자유 국가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가름하는 준거는 단순하다.  
     
    *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정권이 출범했느냐? *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어 있느냐, 지식인-종교인 등 각계 지도층이 통치의 민주성을 인정하느냐, 등.  
     
    류 : 민주화의 모습은 나라마다 다르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평화적으로 민주화를 이룩했다. 이에 전 세계가 경탄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나? 

    린즈 : 첫째는 프랑코 총통의 사망이다. 그로 인해 젊은 카를로스 왕의 재량권이 커졌다. 프랑코 총통이 사망한 후, 카를로스 왕과 원로 정치인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가 과도기를 이끌었다. 이들은 확고한 민주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구체제 옹호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은,  
     
    * 모든 정당 합법화 * 노조 합법화 * 관선 의회 해산 * 언론 자유화 * 정치활동 자유를 과감히 실시했다. 야당 곤살레스 사회노동당 당수 또한 신중한 노선을 취함으로써 과격화를 막을 수 있었다. 여-야 타협에 의한 합의적 민주화가 가능했던 이유다.  
     
    류 : 한국의 경우는 집권 세력과 야권(野圈)엔 타협을 수용하지 않는 강경파가 있다. 이런 곳에서 과연 평화적 민주화가 이뤄질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스페인 같은 평화적-타협적 민주화가 가능할까?  

    린즈 : (웃으면서) 한국 사정은 아직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 지표나, 중산층의 존재를 볼 때 스페인과 유사점이 많다. 스페인에도 민주화를 반대한 극단 세력들이 있었다. 군부 내 프랑코 총통 추종자들, 바스크 분리주의 테러리스트는 합의적 민주화에 완강히 반대했다.  
     
    스페인에선 관용의 원칙이 모든 세력에 의해 합의될 수 있었다. 보복적 살육이 자행되었던 1930년대 내전(內戰)의 끔찍한 악몽을 경험한 스페인 국민이었다. 정치 보복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스페인 국민은 그 교훈을 뼈저리게 터득하고 있었다.  

    류 :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경제발전을 이룩했지만, 그것에 맞는 정치발전은 이루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성장이 정치발전을 ‘반드시’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린즈 : 그렇다. 경제발전은 정치발전을 도모하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치 민주화는 오직 경제발전만의 결과물은 아니다.

    위의 두 글, 《한 알의 밀알처럼》과《후안 린즈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겪은《민주화 이행기의 두 가지 요건》을 동시에 갖추려고 내 나름대로 고심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뜨거운 열정(熱情)과 냉정한 절제(節制), 이 둘을 동시에 양립시킬 수 있어야만《평화적-합의적 민주화》가 가능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