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뉴데일리DB
"정책이 단순해야 일반 국민도 이해하기 쉬운데 조건이 덕지덕지 붙었다."
정부의 실거주 유예 확대 발표 직후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에 올라온 반응이다. 지난 17일부터 커뮤니티에는 기존 매매계약도 적용되는지, 계약갱신청구권을 이미 사용한 세입자는 어떻게 되는지, 1주택자가 기존 집을 처분하는 조건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 등을 묻는 질문이 이어졌다.
한 이용자는 "기존 세입자가 최초 계약이 끝나기 전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려 해도 매수자가 있으면 퇴거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다른 이용자도 지난 4월 계약하고 7월 잔금을 치른 세입자 낀 주택에 이번 조치가 적용되는지 질문했다. 정책 내용을 정리한 게시글 작성자조차 일부 질문에 "내용 파악이 어렵다"고 답했다.
정부가 세입자 보호와 거래 활성화를 위해 내놓은 제도지만 시장에서는 적용 대상과 시점을 놓고 혼란부터 빚어졌다. "극소수에게만 해당해 현 시장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 같다", "실거주 유예를 계속할 것이라면 토허제를 해제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반응도 나왔다.
국토교통부는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서 세입자가 거주 중인 주택을 매입한 무주택자의 실거주 유예 신청기한을 올해 말에서 2027년 12월31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기존 임대차계약의 남은 기간뿐만 아니라 갱신계약 1회, 최대 2년까지 입주를 미룰 수 있도록 했다. 오는 10월1일 시행되면 경우에 따라 입주 시점을 최장 3년3개월 늦출 수 있다.
지난 5월 내놓은 실거주 유예 조치를 4개월 만에 다시 손본 것이다. 당시에는 기존 임대차계약 종료일까지만 입주 유예를 인정했다.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하면 매수자의 실거주 의무와 충돌한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갱신계약까지 유예 대상에 포함했다.
정책 발표 이후 시장 안팎에서는 자금 조달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세입자가 거주 중인 주택은 대출 한도가 제한될 수 있어 충분한 현금을 가진 무주택자에게만 실효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유예기간이 끝나면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자체 자금으로 반환해야 할 수 있어 거래 활성화 효과도 제한적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입자가 거주 중인 주택의 매입자금 대출이 일률적으로 1억원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예기간이 끝난 뒤 직접 입주하기 위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때 이용하는 전세퇴거자금대출은 수도권·규제지역에서 원칙적으로 1억원 한도가 적용된다. 계약·등기 시점 등에 따라 예외가 있지만 보증금이 수억원에 달하는 서울 아파트에서는 매수자가 나머지를 자체 자금으로 마련해야 할 수 있다.
자금 마련은 매수자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임대차계약과도 얽힌다. 전월세로 거주하는 무주택 매수자가 자기 전세보증금으로 새로 산 집의 세입자 보증금을 돌려줘야 한다면 두 계약의 만기와 자금 마련 시점을 모두 맞춰야 한다. 제도상 매수는 가능해졌지만 실제 계약 과정에서는 매수자와 세입자의 자금 사정이 맞물려 분쟁이 커질 수 있다.
현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집주인은 세입자가 거주 중인 전용면적 59㎡ 주택을 팔기 위해 수천만원의 이사비까지 제시했지만 결국 매물을 거둬들였다. 세입자가 당장 옮겨갈 집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거주 유예로 거래 문턱을 낮추더라도 전셋집 자체가 부족하면 집주인과 세입자의 충돌은 피하기 어렵다.
세입자들이 마주한 전세시장도 녹록지 않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9월 첫째 주 기준 노원구 아파트 전셋값은 올해 들어 11.76% 올랐다. 노원·도봉·강북구 등이 포함된 서울 동북권 전셋값도 같은 기간 10.11% 상승했다. 동북권 전셋값 상승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은 2015년 이후 11년 만이다.
반면 전세 매물은 빠르게 줄었다. 부동산 빅데이터업체 아실 집계를 보면 지난해 10·15 대책 이후 동북권 아파트 전세 매물은 4385건에서 2430건으로 44.6% 감소했다. 같은 기간 서울 전체 감소율 15.9%의 약 3배다. 노원구는 827건에서 415건으로 49.8%, 도봉구는 355건에서 181건으로 49.0% 줄었다.
전세 매물이 부족해지자 세입자들은 다른 집으로 옮기기보다 보증금을 올려주고 기존 주택에 머무르는 쪽을 택하고 있다. 남혁우 우리은행 부동산연구원은 "전세 매물 부족과 가격 상승으로 신규 계약 대신 기존 주택을 갱신하는 수요가 늘었다"고 진단했다. 전세 수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갱신 만료 때까지 시장 밖으로 밀려난 셈이다.
이번 조치가 오히려 전월세 매물을 더 줄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거주 유예로 세입자가 있는 집의 매매는 가능해졌지만 다주택자와 비거주 1주택자가 집을 팔면 해당 주택은 유예 종료 후 실거주 주택으로 바뀐다. 매매 매물은 늘어도 임대 매물은 줄어드는 상황이다.
표면적으로 세입자는 최대 2년 더 거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갱신계약이 끝나면 매수자가 직접 입주해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매수자 역시 유예기간이 끝난 뒤 입주해 2년 동안 거주해야 한다. 정부가 바꾼 것은 실거주 의무가 아니라 입주 시점이다.
정책 시행 때마다 문제가 불거지고 예외를 덧붙이는 방식도 반복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다주택자 매도 주택에 실거주 예외를 허용했고 5월에는 비거주 1주택자 보유 주택까지 대상을 넓혔다. 이번에는 신청기한과 임대차 인정 범위를 다시 확대했다. 수개월 사이 세 번째 보완이다.
세입자가 처한 문제는 '언제 나가느냐'만이 아니라 '나가서 어디로 가느냐'다. 실거주 의무는 그대로 둔 채 퇴거 시점만 늦춘 정책으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정부가 세입자에게 벌어준 것은 안정된 주거가 아니라 길어야 2년의 시간뿐이다. 아침의 퇴거를 저녁으로 미룬 조삼모사와 무엇이 다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