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산 피난수도 임시경무대로 사용한 경남 도지사 관사. 기념물로 지정 개방했으나 전시와 관리가 부실하다는 비난을 받고있다.
    ▲ 부산 피난수도 임시경무대로 사용한 경남 도지사 관사. 기념물로 지정 개방했으나 전시와 관리가 부실하다는 비난을 받고있다.
    부산 피난수도 임시관저에 다시 내려온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통일전쟁의 유일한 동지 맥아더 사령관을 트루먼 대통령이 전격 해임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다시 수복(3월)한 맥아더는 중국본토 원자탄 공격을 계속 주장하였고, 확전 공포증의 트루먼은 영국 처칠(Winston Churchill,1874~1965)의 휴전 강압과 ‘훈수’에 따라 ‘38선 휴전’으로 원상복귀하고 말았던 것이다.
    해임이유는 ‘하극상’이었으나 맥아더가 트루먼의 유화정책을 비판하며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There’s no substitute for victory)고 의회에 보낸 편지가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미육사 엘리트 상승장군의 위세 앞에 쌓여왔던 ‘고교출신 대통령의 열등감’이 작용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본인에게 예고도 없이 4월11일 한밤중에 맥아더의 4개사령관직(유엔군사령관, 미극동군사령관, 일본점령군사령관, 태평양 미육군사령관)을 단칼에 날려버린 것이 그러하다.  “자기 집 청소부라도 이런 식으로 해고하진 않을 것” 분노한 맥아더의 코멘트가 남아있다. 트루먼의 국경폭격금지령에 “자신의 군사력 사용금지 명령은 전쟁사상 초유”라 한탄한 맥아더는 피투성이 파일럿이 “워싱턴은 도대체 누구편입니까?” 절규할 때 사표를 썼다가 찢었던 일을 자서전에 회고한다.
    미의회 연설에서 “지금 세계 모든 나라 가운데 사력을 다하여 공산주의와 싸우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며 “노예냐, 죽음이냐, 혈투를 벌이는 한국민들의 고귀한 자유의지를 절대로 버려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한 맥아더! “노병은 죽지않고 사라질뿐”이라며 퇴장한다. 

    이승만 통일전쟁의 글든타임을 트루먼이 박살내버렸다. 
    그리고는 6월23일 소련이 유엔에서 휴전을 제의하자 기다렸다는 듯 덥썩 응하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6.25즉시 유엔군 출병으로 대한민국 구원에 나섰던 ‘고마운 우방’ 미국은 어이없게도 한민족의 적 중공과 타협하겠다는 새로운 ‘통일의 적’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트루먼의 ‘명예로운 휴전’을 위한 ‘협상전쟁’ 뿐이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 ▲ 1951년 7월10일 처음 휴전회담이 열린 개성의 내봉장(왼쪽)과 허허벌판의 판문점으로 이동한 천막촌.
    ▲ 1951년 7월10일 처음 휴전회담이 열린 개성의 내봉장(왼쪽)과 허허벌판의 판문점으로 이동한 천막촌.
    ■새출발 ‘홀로서기’=제2의 건국전쟁■

    맥아더를 상실한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대한민국의 원점(原点)에 섰다. 
    ‘원점’이라 함은 건국의 출발점, 해방후 3년간 미국이 소련의 꼼수에 좌우합작을 추진, 이승만의 자유세력을 제거하려했던 벼랑끝 상황! 지금 그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번에는 소련+중공과 미국의 ‘흥정 테이블’에 올라앉은 한 마리의 생선 신세로 환원되었다. 
    얄타회담 미-소의 밀약과, 해방후 미-소 공위의 흥정에 이어 세 번째, 휴전회담이란 이름의 약육강식! 이번에도 이승만 홀로 이 포위망을 돌파히지 않으면 안된다. 
    ‘정읍선언’ 카드로 미국을 설득하여 유엔결의안을 끌어내 나라를 세웠듯이, 이승만은 급변한 국제냉전의 국내외적 판도를 전면 리셋(reset), ‘제2의 건국(Nation-Building)’ 설계도를 그린다. 큰 그림은 ⚫휴전 반대, 통일 달성 ⚫이를 위해 대통령직선제 개헌 ⚫한반도의 지정학적 비극을 종결책 한미동맹의 쟁취였다. 
    신생 약소국 대한민국이 동서 이념전쟁의 한복판에서 제2의 강대국 흥정국면을 ‘단독 드리블’로 돌파해야하는 국제정치전쟁, 공산군과 싸우면서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주는 미국과 싸워야 하는 “전쟁중 외교전쟁‘이다.
    그것은 온전히 이승만 1인 전쟁! 팔을 걷어붙인 77세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말한다. “내가 또 미치광이가 돼야겠소”

    1. 휴전 결사반대...‘전제조건’ 제시
    “중공군 철수-북한군 무장해제” 통일회담 요구

    소련이 유엔에서 휴전을 제의한 직후 6월25일 침략1주년 행사에서 이승만은 말한다.
    “우리는 공산주의 밑에서 생명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여 싸우고 있다.
    유화정책이나 양보를 거부하고 총궐기하여 명예로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태극기를 만주 국경선까지 휘날리기를 전국민이 필사적으로 원한다”고 부르짖었다.
    이튿날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휴전 결사반대‘를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성명을 발표한다.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 국토양단의 소련 제안은 남북한 국민이 결사반대한다.“
    이승만은 6월25일 침략의 날을 ’국민총궐기의 날‘로 정하고 국민대회를 열어 결의하였다. 
    한국시간 6월30일 새벽 리지웨이 사령관의 ‘휴전회담 수락’ 깜짝 발표에 접한 이승만은 7월1일 날이 밝자 비상령을 발동, 긴급각의와 긴급국회가 열린다. 이런 경우를 예상 대비해온 이승만은 이미 마련한 문서를 각의 의결로써 다음과 같은 ‘5개원칙’을 발표하였다.
    1. 중공군은 한국으로부터 만주로 완전히 철퇴할 것. 북한 주민의 생명과 새산에 손상을 가해서는 아니된다.
    2. 북한괴뢰군은 무장을 완전히 해제해야 한다.
    3. 국제연합(유엔)은 제3국이 북한공산당에게 군사적 재정적 기타 형식으로 원조치 못하도록 방지할 것을 동의해야한다.
    4. 대한민국의 정식대표가 한국문제의 전부 혹은 일부를 토의하거나 고려하는 어떠한 국제적     회의 혹은 회합에도 반드시 참가해야한다.
    5. 한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침범하는 어떠한 방안이나 행동은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줄로 인정치 않을 것이다.
    여기에 곧 ”북한에서 유엔이 자유총선을 실시하라“는 요구가 추가되어 ‘6개 원칙’이 된다. 
    오해 마시라, 이것은 ‘휴전동의 조건’이 아니요. 통일을 위한 대전제조건이며 이 조건들을 충족시킨 연후에 통일회담을 개최해야한다는 불퇴전의 배수신이다.
    국제법박사다운 통일대통령의 면밀한 ‘통일협상’ 요구, 이 원칙들은 비상국회가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국토통일국민총궐기대회’를 열어 국민투쟁 캠페인으로 확산시켰다. 
    청년시절부터 ‘민민공동회’로 이름 떨친 국민동원투쟁의 달인, 이때부터 시작된 휴전반대 거리투쟁은 전국민이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Unite or Death) 외치며 한미동맹이 체결될 때까지 무려 3년간 멈출 줄을 몰랐던 것이다. 

    ★”휴전회담장 폭파하라“ 이승만, 특공대 불러 극비지령
    7월10일 개성(開城)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개성 반대’를 외친다.
    ”개성은 38선 이남이다. 개성을 장악하려는 공산측의 음모를 물리쳐라“ 
    이승만의 뜻을 알지 모사는 유엔측이 회담을 강행하자 이승만은 극비로 특공대를 경무대로 불렀다. ”회담장을 파괴하라“ 물리적인 회담차단 테러작적을 지시하였다.
    개성 희의장에 수류탄 공격이 가해지자 공산측은 이를 기화로 개성보다 더 아래 판문점으로 이동한다. 개성과 판문점 회담장 무장공격은 1951년 초 창설된 육군 4863부대(육군첩보부대 HID)가 주도했으며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몇차례 진행했다.
    이승만의 ‘휴전회담 저지작전’은 유엔군이 알면 절대로 안 되는 극비중의 극비, 단 하나의 메모도 남기지 못하게 진행하였던지라 사건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극비작전을 수행한 육군첩보부대장 이극성(李極星)중령과 김진수(金晋洙)소위가 2015년 [월간조선]에 털어놓은 증언을 들어보자. 
    “1951년 7월 12일쯤 이극성 첩보부대장이 저를 불러서 ‘내일 경무대에 들어가자’는 겁니다. 그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이튿날 새벽 대구에서 출발, 경무대에 오전 11시쯤 도착했어요. 요즘 같은 고속도로도 없었고 포장구간도 적었지만 무척 긴장하며 서둘러 지프를 몰았어요.”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둔 비밀을 죽기 전에 털어놓고 싶었다는 80대 노병은 생생한 기억을 하나씩 꺼낸다.
    경무대 대통령 집무실엔 4명이 둘러앉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비서실장, 김진수와 이극성이다. 
    76세 노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휴전회담을 어떻게든 깨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휴전이 성립되면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되지만, 휴전이 깨지면 북진할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이대로 분단이 되면 민족통일이 어렵다. 어떻게 해서든 휴전을 못 하게 막아서 북진통일을 이뤄야 한다. 한번 휴전이 되면 통일을 못 할지 모른다.”
    김진수는 너무나 놀라웠지만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고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회담장소를 야간에 침투해 파괴하라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문제없습니다. 그대로 하겠습니다’ 대답했죠. 그랬더니 ‘그럼 부탁하네. 가까운 시일 내에 휴전회담을 못 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경무대 한 인사가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말고 대통령과 우리 세 사람만 아는 비밀로 하자’고 다짐했다”고 회고했다. ([월간조선] 2015년 8월호). 
    ◉7월16일 새벽=민간인 복장의 대원 10명을 이끌고 철조망을 절단기로 끊고 회담장으로 진입. 회담장은 텅텅 비었고 초소엔 아무도 없다. 주차된 공산군 지프를 미제 칼빈 총으로 쏴 전소시키다. 회담장 주변엔 4~5개의 천막이 있었는데 총을 난사해 회담장 천막을 모두 쓰러뜨리고 탁자니 의자니 기물도 부쉈다. 당시 김진수 소위와 함께 파괴공작에 참여한 대원들은 HID 문산파견대(제2파견대) 장단분견대 소속으로  이들은 현역 군인 신분이 아니라 판문점 근처 장단군(長湍郡)과 대성동(大城洞) 마을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8월의 공격사례=8월 4일 중공군 1개 중대가 휴전회담 지역을 침범, 유엔군 측이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8월 13일에는 공산군 측이 “판문점 교량 부근에서 40명의 유엔군 부대가 교량을 봉쇄하고 비무장 공산군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다. 유엔군 측은 조사에 착수했으나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그때 그곳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8월19일 중립 지역인 송곡리(판문점 서쪽 1km 지점)에서 순찰중이던 중공군 헌병소대가 습격을 받아 소대장이 죽고 소대원 1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방부 [6·25 전쟁사] 9권)
    ◉9월 중공군 장병 8명 납치=김진수 소위와 HID 장단분견대는 또 다시 회담장에 접근했다. 이번에는 외곽 경비를 맡고 있던 공산군 장교와 병사 8명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우세한 HID 부대원들은 즉각 이들을 덮쳐 모두 생포했다.
     “제 기억으로 성이 위(偉)가인 중공군 소위가 기억납니다. 모두 납치해 아군(육군 1사단)에 넘기고 우리도 이들을 심문했지요. 이들은 나중 포로수용소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진수는 덧붙였다. “모두 우리가 한 일입니다. 국군이나 유엔군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실천한 것이고 구체적 날짜는 이제 희미합니다.” 
    김진수 소위는 그 후 다시 경무대를 찾아갔다. 한 인사가 설명을 듣고 격려했다고 한다.   
    “이젠 더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 대통령께서 ‘그 정도 했는데도 휴전회담이 계속되니 할 수 없다’고 하셨답니다. 저도 안타까웠지만 그게 민족의 운명이라 생각했어요.”
    오랜 세월이 흐른 이제 와서야 진상을 공개하는 이유를 묻자 김진수는 단숨에 토로한다.
    “내가 죽기 전에 휴전회담 당시 이 대통령께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밝히고 싶었죠. 그분은 휴전으로 분단이 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예감했던 겁니다. 절박했던 대통령의 고뇌를 이제라도 국민들이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 ▲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지명한 장면(오른족)과 무초 미국대사.
    ▲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지명한 장면(오른족)과 무초 미국대사.
    2.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선언
        “미국의 일방통행 저지” 이승만 리더십 강화

    건국 3주년 1951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시부터 굳게 결심해 온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단행하겠다고 선언한다. 국면전환을 위한 그 연설은 역사적이다.

    “우리는 유엔이 공산침략자와의 협상에서 정당한 결말을 짓고 모든 자유국가들을 위한 집단적 안보정책이 수립될 것을 희구하여 마지않는다. 우리 민국정부의 탄생과 존립은 대부분 미국과 유엔에 의존하고 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공산진영과 민주진영 간에 전개된 거대한 세계적 쟁패에 휩쓸려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이 두 사상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그 2자 중 하나만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세대가 봉착한 위대하고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는 합심하여 민주주의를 보호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공산주의에 희생물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정부의 진실한 기초로서 국민이 가자의 그 정당한 지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헌법의 2개 조항 수정을 국회에 요구하였다. 
    하나는 대통령 선거를 직접선거제로 할 것이며, 또 하나는 국회를 양원제로 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 국가를 민주주의적으로 건전하고 안전하게 하기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국민들에게 각자가 선출한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이 2개 수정안을 지지하도록 요구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조선일보] 1951년8월16일자. 밑줄 필자)
    이날 이승만은 새롭게 “참신한 정당”을 만들겠다는 방침을 공표하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회내 정치적 기반확충과 함께 직선제 개헌의 성공 및 강대국과 대결할 체제강화책이다.  

    ◀이승만이 개헌부터 서두른 이유▶
    1. 공산진영과 자유민주진영의 패권 쟁탈전에서 ‘반공승리’를 위하여.
    2. 전쟁중에도 ‘내각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회의 권력싸움을 진압하기 위하여.
    3.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음모를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이 세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헌국회가 만든 ‘불완전 헙법’부터 재정비해야한다. 제헌국회의 건국헌법은 대통령 선거를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로 시행하였다. 
    당초 한민당이 만든 헌법초안은 내각책임제였다. 이를 보자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를 주장, 즉석에서 ‘땜질’식으로 수정한 것이다. 이처럼 불완전한 헌법조항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경제조항들이 사회주의-공산주의식 국유화 통제경제체제였음이 대표적이다. 
    이때 이승만은 헌법 손질보다 ‘국가출범’을 서둘렀다. 9월 열리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국가승인을 먼저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뒤로 밀렸던 헌법개정은 북한의 6.25침략으로 포기 상태가 되었는데, 미국이 일방적 휴전을 강요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대미투쟁을 위한 체제강화책으로 ‘직선제 개헌’을 먼저 요구했던 것이다. 
    상기 3개항 가운데 2-3항을 좀더 살펴보자.

    ★김성수, 건국순간부터 개헌시도...전란 중에도 ‘내각제’ 요구★
    대한민국의 개헌 시도는 이승만이 처음 시작한게 아니다. 
    최초의 개헌시도는 김성수의 한민당(한국민주당)이 놀랍게도 건국정부가 출범하기 일주일전부터 꺼낸 것이었다. 그 까닭을 간단히 요약해본다.
    ⚫건국내각 구성에 한민당 제외=김성수가 이승만에게 건걱내각중 총리 포함 7명을 한민당에 줄 것을 요구, 이승만이 거부. 김도연 한명만 재무장관에 기용한다. 이승만의 거부 이유는 남북통일을 위한 ‘거국내각’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에 김성수가 반발, ‘반이승만’ 노선을 공표한다. 한민당은 즉시 ‘내각제로 돌아가자’고 결의, 국회에서 개헌작업을 벌인다. 
    ⚫1차시도에 실패한 한민당은 2차 시도, 6.25발발로 부산에 피난와서도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 건국즉시 권력을 장악하려다 이승만 때문에 실패한 김성수의 한은 뿌리깊었다.

    ★미국, 휴전 반대 이승만을 제거하려 김성수당과 음모★
    이승만의 휴전반대 캠페인이 본격화하자 미국은 완고한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 말 잘듣는 대통령”으로 바꾸기로 결정한다. 1952년은 제2대 대통령 선거의 해,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를 이용하여 이승만을 탈락시키고 “부드럽고 상냥한 인물”로 당선시키기로 김성수 측과 비밀리에 공모한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그때까지도 소속정당이 없는 단신이기에 그의 교체는 수월하다. 미국이 염두에 둔 그 인물은 조병옥(趙炳玉) 또는 장면(張勉)이었다. 바로 미국이 중국을 대신한 신대주의 상국(上國)이 된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런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더욱 직선제 개헌이 급하다.

    ◆이승만 “제헌시 합의한 직선제로 개헌하자”
    제헌국회때부터 이승만은 김성수 측의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간접선거제를 통렬히 비판해왔다.
    “신생국에 내각제란 현실을 모르는 권력추구일 뿐, 걷잡을수 없는 정치불안을 야기하여 국가 존망을 부르는 망국의 초대장이다.” 더구나 전쟁중에 철통같은 단결로도 부족한 상황에서 간선제 또한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르는 자들”의 우물안 개구리 타령이나 같다고 했다.
    즉, 국회 간선제는 강대국(미국)의 국회파벌 포섭에 따른 ‘강대국 꼭두각시’ 선출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혹여 공산당 후보의 위장출마와 당선 위험성도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개헌안을 제출한다. 국회는 그러나 이를 심의는커녕 쳐다보지도 않다가 절대다수로 부결시킨다. 이승만은 성명을 발표한다.

    “4년 전에 헌법기초위원회가 헌법을 제정할 적에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국회에 상하의원을 두기로 협의되었으나, 그때 시기가 촉박해서 그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임시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거하고 추후 다시 교정하자는데 양해되었던 것이다.
    그 후 본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에게 누누이 권고하다가 이번에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통과하도록 한 것인데, 국회의원들이 이때까지 (직선제개헌을) 미루고 미룬 이유는 민중이 직접 선거하게 되면 자기들 권리를 잃게 될까봐 이 안건을 찬성하지 아니하여 오다가, 지금 와서는 자유당이 성립되어서 각 지방의 민의로 작정이 된다는 공론이 생긴 이후로, 국회 내에서 몇몇 정객들 주동으로 하루 바삐 투표해서 대통령직접선거와 양원제 개헌을 거부코자 하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회는 민의를 대표한 기관으로 하사(何事)를 불고하고 자기들의 사권리(私權利)만을 도모하고 있어서 그 중임을 부담키 어려운 줄로 인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상 두 가지에 대한 전국(국민)의 동일한 사상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임으로, 국회에서 이를 거부하는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전민중이 이를 지지하지 아니할 것이다.” ([조선일보] 1952년 1월19일자 2면)
    요컨대, 제헌헌법 시행시 간접선거제를 차후에 직선제로 개헌하기로 합의안 것이니 정부의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야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승만은 즉시 그 기반조성을 위한 정치작업에 들어갔다.

    ★이승만, 집권당 ‘자유당’ 창당★
    대한민국 출범시 ‘초당적 건국 지도자’를 자임한 이승만은 정당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휴전협상 돌파와 국내정국안정을 위한 체제강화책은 ‘집권당’의 힘을 절감하게 되었다. 
    처음 이승만이 추진한 정당 이름은 ‘노동농민당’이었으나 반론이 많아 ‘자유당’(自由黨)으로 낙착, 1951년 12월 사상최초의 집권당 자유당이 출범한다.
    ★전쟁중 ‘지방자치제’ 선거 단행★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의 해가 밝았다. 김성수의 야당이 다시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한 4월, 이승만대통령은 6.25로 미루었던 지방자치제 선거를 전면 단행한다. 
    전쟁중의 선거답지 않게 그것은 시-읍-면-동-리(里)까지 각각 의회대표를 뽑는 선거였고 잇따라 도(道)의원 선거도 실시했다. 결과는 ‘자유당의 대승’이었다. 야당은 모조리 참패하였다.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 즉 전국 국민에게 직접선거 실습을 시켜 ‘자유민주주의 체험과 교육’ 효과를 획득, 자유민의 정체성 향상과 동시에, 반공 전쟁과 직선제 추진을 위한 국민 조직화를 달성한 것이었다. 곧 5천년사 최초로 국민통합을 이룬 역사적 선거혁명이라 평가할만 하다. 이승만 필생의 꿈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의식을 가진 ‘똑똑한 국민국가’ 건설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자체 선거로써 국민의 지지기반이 갖추어졌다. 
  • ▲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해주기를 기다리던 공범 야당은 미국이 약속을 철회하자 그대로 굴복, 이승만의 직선제 헌법개정에 찬성하였다. 사진은 피난국회에서 기립투표하는 의원들 모습.ⓒ조선DB
    ▲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해주기를 기다리던 공범 야당은 미국이 약속을 철회하자 그대로 굴복, 이승만의 직선제 헌법개정에 찬성하였다. 사진은 피난국회에서 기립투표하는 의원들 모습.ⓒ조선DB
    ◆40일간의 ‘무혈혁명’--부산정치파동◆

    부산정치파동 1952.5.25.~7.4 대통령의 무혈혁명 40일 대장정!
    사건의 개요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의원 10여명을 연행, 국회를 40일간 설득하면서 대통령직선제 헌법개정을 관철시킨 ‘발췌개헌 파동’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지도자론 처음으로 김성수가 ‘이승만 독재자’란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에 따른 것인지 이 사건은 지금까지 이승만의 큰 정치적 과오의 하나로만 낙인찍혀왔다. 왜곡이다. 
    필자는 오래전 조용중의 팩트분석 연구서 [대통령의 무혈혁명]이란 명칭을 따르고 있다. 이승만의 정치개혁 행보가 그런 결론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주요대목만 보자.

    A. 계엄령은 왜 선포했는가? 이것이 독재자 수법 아닌가?
       아니다. 한마디로 미국과 야당의 ‘국회쿠데타’를 저지하려고 계엄을 꺼내들었다. 계엄령을 선포한 5월25일 그때 미국과 야당 공모자들이 비밀리 국회를 열어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쳐놓고, 휴전에 동의하는 야당 후보를 선출하려는 음모를 알았기에 이를 일단 저지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계엄령은 헌법이 보장한 상식이다. 더구나 전쟁중임에랴. 포고문에 ‘영호남 일대 공산게릴라 공세 위협확산’이란 이유도 사실이었다. 제주4.3사건 이래 공산 게릴라군은 영호남일대에서 국군 및 경찰의 후방을 교란하는 준동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B. 미국의 내정 간섭 및 정치권의 대미 신(新)사대주의 극성
    “조선5백년간 중국에 사대하고 망국후 일본을 그토록 섬기고서도 부족하단 말인가”
    이승만의 한탄이 무색할 정도로 해방후 한국인들의 미국 사대주의는 고질병의 극성이었다. 
    미군정에 종사하는 정치권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 인사들은 ‘미국 대사관’에 줄 잡기  경쟁을 벌이면서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하고 있었다. 소위 ‘미국빽’이다. 1950년 6.25직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때도 김성수는 미국 대사관에 들락날락, 공개적으로 선거지원을 요청할 정도였다. 
       부산에 피난중인 정치인과 기업인 등 재력자들은 일본에 밀항할 선박을 준비하였고, 아들     의 병역기피에 열중하였으며, 심지어 총리 장면도 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려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건국후 불과 3년여에 얽힌 친미 네트워크를 이용한 미국 대사는 각료임명에도 불평하기      일쑤였는데 급기야 ‘고집장이 노인네’ 이승만을 쫓아내고 순종적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택    할 정도로 방약무인 상태로까지 발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동이 시작된 후엔 날마다 임시경부대를 찾아 이승만에게 “비민주적인 계엄령 해제”를 다구치는 미국 대리대사는 본국에 ‘이승만 제거’를 독촉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은 내정간섭을 중단하라. 한국 민주주의는 내가 더 걱정한다”며 친미파 국회의원들에게 제공된 거액의 달러화를 압수, 미국대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즉, 무산정치파동의 목적은 직선제 개헌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내정간섭을 원천봉쇄하고 친미정치권의 신생 사대주의 뿌리를 뽑아내는 무혈의 정치혁명이다. 

    C. 시위단체 ‘백골단’ ‘땃벌떼’ 등은 관제동원 아닌가?
       부산정치파동을 “이승만 자기가 대통령 하려고 직선제 개헌했다‘고 몰아붙이는 정치권에서     흔히 거론하는 것이 국회앞에서 매일 직선제개헌을 요구하던 시위단체들의 명칭이다. ’백     골단‘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백골까지 바쳐 조국통일을 완수“하겠다는 참전용사들이었다.     직선제를 기피하는 국회의원들은 ”자기특권만 알고 민의를 배신한 자들”이므로 ”당장 국회     를 떠나라“고 주장했다. 이들 말고 날마다 국회앞에서 시위하는 군중 대부분은 얼마          전 자자제 선거에서 당선된 지방의회 의원들이었다. 즉 이승만이 조직한 국민대표들이다.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민의에 충성하는 국회로 다시 만들자“고 탄원서까지 줄줄이 냈다.

    D. 김성수 ”이승만은 헌법 유린 독재자“ 결의문
       미국대사 무초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야당대표 김성수와 대통령으로 점찍은 장면     이 계엄령울 피해 미군 병원에 은신, 꼼짝도 않기 때문이다. 부산앞바다 해군병원선에 달려간 무초는 김성수에게 말한다. ”당신들이 무슨 행동을 해줘야 우리가 지지할 수 있지 않      겠소?“ 그제서야 김성수는 ’계엄령 규탄‘ 비밀집회를 열었는데, ”이승만은 헌법을 파괴한 독     재자’란 결의문을 준비했으나 읽지도 못한다. 김성수도 장면도 집회현장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반독재 투쟁한다는 지도자들로서 과잉 보신도 문제지만 헌법에 대한 인식능력도 문제였다. 헌법의 간선제를 직선제로 개정하는 일이 헌정(憲政)유린인가. 그 집회는 직선제지지 청년들이 급습 파괴하자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E. 이승만은 왜 사태를 40일간이나 끌었나?
       바로 이것이 부산정치파동의 정치적 역사적성격을 말해준다. 전쟁중인 국가 대통령이라면 직권으로 ‘직선제 헌법’을 만들어 선포하거나, 저항하는 국회를 해산할 수도 있거늘 이승만은 끝가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청년단체의 국회해산 요구에 대하여 ”현행 헌법에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다“고 만류한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의 시간을 다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헌법의 틀과 법치주의 안에서 합의한 새 헌법을 만들어야 국내외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독재자’ 인가. 방법이 거칠었지만 그것은 ”내정간섭 미국을 혼내주는“ 전술일     뿐이다. 더불어 권력만 알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을 모르는 국회의원들에게 ”국민 무서운     줄 알라“는 시위를 통하여 수구적 정치권에 민주주의 훈련을 시키자는 것이었으며, 전쟁중의 국민들을 ”주권재민의 직선제로 통합”시키는 것, 즉 이승만은 갓태어난 대한민국 ‘민주학교’ 의 정치교육을 스스로 자임한 교장이었던 것이다.  

    F. 미국, ”야당지지 철회“...이승만 제거 포기
       마침내 미국이 한국 야당 지지를 철회하였다. 이유는 ”이승만을 대체할 지도자는 없다“였다. 한국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을 연금 또는 추방하고 유엔군이 군정을 실시한다는 미정부의 시나리오는 실무자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기피하였고, 야당엔 믿을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쿠데타를 자원했던 일단의 한국군도 제풀에 주저앉았다.
    미국독립기념일 7월4일 저녁, 피난국회는 이승만의 직선제 헌법을 거수투표로 통과시킨다. 그것이 이승만의 타협에 의한 ‘발췌개헌’으로서 야당을 배려한 몇가지 항목이 반영되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각 직선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것이 뒷날 3.15부정선거를 유발하는 문제의 ‘부통령 직선’이다. 이로써 파란만장한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 
  • ▲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대통령직선제 헌법을 채택,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직선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건국4주년 광복절 8월15일에 서울로 올라와 제2대 대툥령 취임식을 개최하였다. 이날 기념사에서 중공과 휴전회담을 시작한 미국을 향하여 '남북통일 약속을 반드시 지키라
    ▲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대통령직선제 헌법을 채택,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직선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건국4주년 광복절 8월15일에 서울로 올라와 제2대 대툥령 취임식을 개최하였다. 이날 기념사에서 중공과 휴전회담을 시작한 미국을 향하여 '남북통일 약속을 반드시 지키라"고 촉구, "기필코 북진통일을 달성하겠다"는 1인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조선DB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탄생 ”진실은 언제나 이긴다“  

    1952년 8월5일 사상최초의 국민직선제 선거를 통하여 이승만이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의 당선 성명은 독립운동이래 좌우파벌 공세에 시달렸던 착잡한 심경을 토로한다. 
    ”내가 젊었을 적에 혁명가로 나서 자유를 위하여 싸워온 이래 50년간 내 평생은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이제는 싸우기가 귀찮아졌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할 때에는 남들과 매양 싸우지 않고는 안 되는 형편이었으므로 이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나와 경쟁한 이 분들의 목적은 오직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괴상한 말로 세계에 전파하기를 내가 국회를 무력을 써서 해산시키고 딕테이터(독재자)가 되려한다는 둥 이런 헛된 말들을 듣고 민중은 대단히 분개하였고 민중의 힘으로 어렵게 개헌이 되었습니다. 나는 진리와 대의는 언제든지 승리하고 만다는 것을 믿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평민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생각을 양보해서 민족의 사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선소감 [조선일보]1952년 8월11일자)

    ◆단독전투태세 이승만 ”한국의 통일이 세계의 승리“

    8월15일 제2대 대통령 취임식은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부산정치파동으로 직선제개헌을 통하여 정치안정과 리더십 강화, 국민통합을 성공시킨 이승만은 목숨을 건 휴전반대와 국토통일의 불변 의지를 미국과 참전국들에게 정면으로 토로한다. 이것이 사실상 대한민국의 단독통일전쟁 선언이다. 
    ⚫건국후 4년만에 한국은 민주공화국을 완성. (제2의 건국).
    ⚫미국은 약속을 지켜 한국을 통일독립국가로 완전 회복할 것.
    ⚫한국의 자유 승리가 세계의 자유 승리, 반공국들은 단결하라.

    ★취임사 요지★“....국제연합 제국과 우리의 가장 친한 우방인 미국이 여러 번 선언하기를 ‘자기들의 목적은 우리와 같다’고 한 것이니 즉 우리 대한이 통일 독립 민주국가로 완전히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이 통일의 목적을 완수해야 되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맺힌 결심과 목적이 얼마나 공고한 가에 달린 것입니다. 한 가지 단언하는 것은 우리 한국은 분단이 되거나 점령을 당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세계도 공산제국주의를 허락해서 승리하게 길러주고는 자유를 지탱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공산제국주의는 전 세계의 자유 민족주의를 타도시킬 목적으로 할 것이니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한국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모든 나라들의 승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서 실패한다면 세계 모든 자유국민에게 비극적인 실패가 될 것입니다. 자유세계의 단결은 어느 누가 깨트리지 못합니다. 우리를 치는 힘이 클수룩 모든 반공국들의 공동안전을 위하는 단결심이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나의 개인 메세지로서 우리 국민과 또 친구들인 우리 연합국들에게 한마디 하려합니다.
    내 평생은 우리나라의 운명과 같아서 낙관적 투쟁과 인내력으로 진행해온 것인데 어떤 때는 앞에 장해가 너무 커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1882년 한미조약 이후로 우리가 밖으로는 각국의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쇠락하여 가는 군주정치의 학정을 대항할 적에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싸워왔던 것입니다.
    지금 와서는 이 싸움 시작하던 사람들이 다 없어지기 전에 민주정부를 세워 민의에 굳건한 토대 위에 세워놓고 세계 모든 친구들이 우리를 호위하고 있는 이때에....(중략).....이제야 겨우  공화민주국가로 되어 지나간 4년 만에 (건국이후) 처음으로 민국정부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내가 60년 동안 분투노력한 이 나라를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안전과 자유와 통일이 민주국가라는 틀 안에서 굳건히 성립되는 것을 보자고 해왔던 것입니다. 소위 정치파동은 손바닥안의 미풍 같은 것으로서...(중략)...다행히 우리 국민이 나를 전적으로 지지한 힘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이제는 대통령선거권을 국회에 맡겨두지 않고 민중의 직접 투표로 행하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민주정체와 민주주의가 강력하게 굳건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통일과 우리의 민주정체를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나의 생명과 헌신을 다할 것을 다시금 선서하는 바입니다...(후략)...“ (제2대대통령 취임사 [조선일보] 1952년 8월16일자)
    부산정치파동이 권력을 위한 정쟁이 아니라 ‘제2의 건국’ 작업임을 밝힌 연설이다. 또한 ”대한민국이 분단상태로는 한시도 살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세계를 위한 싸음이오, 한국의 남북통일이 자유세계의 승리”란 이념전쟁의 자유철학이 이승만의 글로벌 리더십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부터 그의 ‘단독 드리블’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가.

    ◆‘통일저지의 최대 강적’ 아이젠하워 등장

    역사의 새로운 국면 전개, 이로부터 불과 3개월후 11월4일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된다. 그의 대선공약은 ”한국전쟁은 내가 끝낸다“였다. 바로 남북통일을 위해 단독전쟁체제를 갖춘 이승만 앞에 통일을 막아선 최대의 강적이 나타난 것이었다. ”미국은 여러번 한국의 자유통일목적에 동의한다고 선언했다“고 상기시킨 이승만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대미투쟁을 개시, 사면초가의 ‘1인전쟁’에 돌입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