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작가대회 축사서 "작가적 양심 지켜야""군중의 박수보다 양심을, 진영보다 인간을""권력이 아닌 인간 편에 선 '단독자' 돼 달라"
  • ▲ 이석연 전 국민통합위원장. ⓒ국민통합위원회
    ▲ 이석연 전 국민통합위원장. ⓒ국민통합위원회
    지난 9일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석연 전 위원장이 퇴임 후 첫 공개석상에서 국내외 문학인들을 향해 "어느 권력에도, 어느 진영에도 자신의 정신을 맡기지 않는 자유로운 작가가 돼 줄 것"을 당부했다.

    이 전 위원장은 15일 오후 서울 광진구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에서 열린 '제12회 세계한글작가대회' 개막식에 참석해 '문학과 권력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제목의 축사를 했다. 세계한글작가대회를 주최하는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이자 이번 대회 집행위원을 맡고 있는 이 전 위원장은 이날 행사에서 "어느 편의 작가가 아니라 인간의 편에 선 작가,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자유로운 '단독자'로 남아 달라"며 진영 논리를 넘어선 문학의 역할을 강조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지 엿새 만에 다시 시민의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 전 위원장은 "며칠 전까지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장을 맡고 있었다"며 "이제 그 직을 내려놓고 다시 한 사람의 시민으로 돌아와 오늘 여러분 앞에 섰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미국의 국민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추도식에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남긴 말을 소개하며 권력과 문학의 상관관계에 대한 화두를 꺼냈다.

    "권력이 인간을 오만으로 몰고 갈 때, 시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 줍니다."

    이 전 위원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마음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는 말을 함께 인용하며,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기록하고 질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률가로서 평생 헌법을 공부하고 권력의 바깥과 안쪽을 모두 경험한 자신의 이력도 언급했다. 때로는 권력과 맞서고 때로는 공직을 통해 권력의 중심부를 경험했으며, 문학의 주변을 오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날 작가들에게 던진 결론은 간명했다.

    "권력은 지나가지만 문학은 남는다."

    이 전 위원장은 황제의 시대가 사라진 뒤에도 사마천의 '사기'가 남았고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두보와 이백의 시가 살아 있는 점을 사례로 들었다. 그러면서 "권력은 오늘을 지배할 수 있지만 내일의 기억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며 "그 기억을 만들고 기록하는 사람이 바로 작가"라고 역설했다.

    때문에 권력과 문학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권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원한다면 문학은 다양한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권력이 자신의 판단을 옳다고 주장할 때 문학은 그 판단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특히 "과연 그런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문학의 중요한 역할이자 사명으로 꼽았다. 이 질문이 살아 있어야 우리 사회 역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와 언어의 관계를 경고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도 언급했다. 권력이 언어를 장악하고 나아가 인간의 생각까지 통제하려 할 때 문학의 자유가 위협받는다는 취지다.

    이 전 위원장은 작가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거짓을 거짓이라 하고, 불의를 불의라 하며,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합니다."

    특히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세력의 잘못에는 목소리를 내면서, 지지하는 세력의 부조리에는 침묵하는 이중적 태도를 강하게 나무랐다. 

    그는 "내가 반대하는 권력의 잘못에는 분노하면서 내가 지지하는 권력의 잘못에는 침묵한다면 진정한 문학인, 지식인의 자세라 하기 어렵다"고 일갈했다.

    이는 이 전 위원장이 국민통합위원장 재임 당시 강조했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지난 9일 이임식에서 "국민통합위원회는 국민의 아픔과 분노, 그리고 말없는 다수의 목소리를 권력에 전달하는 쓴소리의 창구가 돼야 한다"며 "권력에 듣기 좋은 이야기만, 권력에 아부하는 보여주기식 활동을 하는 조직이라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정치권을 향해 "진영의 논리보다 국민 전체를 바라보고, 승리보다 공존을 생각해야 한다"면서 "상대방을 적으로 여기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한다면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고 조언했다.

    이 전 위원장은 동일한 문제의식을 '문학의 언어'로 풀어냈다. 

    그는 지난 1년간 현장에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지켜본 소감을 전하며 "우리 사회의 위기는 생각이 다르다는 데 있지 않다. 민주사회에서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 전 위원장이 문제로 지목한 것은 '다름' 자체가 아니라 다름을 '적대의 이유'로 삼는 현상이었다.

    "진짜 문제는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 편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상대편의 잘못에는 분노한다"며 "진영이 인간보다 앞서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전 위원장은 여기서 문학의 역할을 국민통합과 연결했다. 정치가 사람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구분할 때 문학은 그 경계를 넘어 한 사람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이해하고,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처럼 느끼는 과정에서 통합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게 이 전 위원장의 논리다.

    "통합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그는 관용과 진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그 능력의 토대로 꼽았다. 그러면서 문학이야말로 국민통합을 가능케 하는 가장 오래되고 깊은 창조적 활동이라고 말했다.

    이 전 위원장이 이날 작가들에게 가장 강하게 주문한 것은 '진영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그는 젊은 법조인들에게 평소 "헌법을 심장에 품은 단독자가 돼라"고 말해 왔다면서 문학인들에게는 새로운 주문을 내놓았다.

    "시대의 단독자가 돼 주십시오."

    이어 "군중의 박수보다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어느 권력에도 어느 진영에도 자신의 정신을 맡기지 않는 자유로운 작가, 시인이 돼 달라"고 호소했다.

    시인 김수영이 평생 천착했던 '자유'도 이 대목에서 소환됐다. 바람이 불면 눕지만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문학은 권력보다 약해 보일지라도 결국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전 위원장은 한글 역시 이 같은 자유의 정신을 담아내는 중요한 그릇이라고 평가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제1대 사건"이라고 표현한 그는 "한글은 권력자만을 위한 문자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문자"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한글에는 탄생 순간부터 인간 존중과 자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 전 위원장은 공직을 떠난 자신의 현재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자리를 내려놓았다고 해서 마땅히 말하고 행동해야 할 책임까지 내려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권력은 지나간다. 정권도 지나간다. 시대의 유행도 지나간다"면서도 "좋은 문장은 남고, 좋은 시는 남는다"고 단언했다.

    역사의 마지막 승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그 시대의 진실을 끝까지 기록한 작가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켜낸 문학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