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 거장' 표재순, 구순 앞두고 자전에세이 출간연극·방송·올림픽 넘나든 60여 년 연출史 담아내"평생을 소처럼 살아 … 이제는 기록으로 남길 때"
  •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저는 표씨 성을 가졌지만 평생 표시가 안 나게 살려고 했습니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산증인 표재순 연출가가 아흔을 앞두고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책을 펴냈다. 연극과 방송, 뮤지컬, 대형 국가행사를 종횡무진하며 살아온 그의 60여 년 예술 인생을 담은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를 출간한 것.

    표 연출가는 지난 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10년 전부터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권했지만 나는 원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고 싶었다"며 "결국 이번에 표시가 나는 책을 내게 됐다"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설명하는 데는 끝까지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삶을 '소'에 빗댔다.

    "소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동물이 아닙니다. 주인이 데려다 놓은 밭을 묵묵히 갈 뿐이지요. 물은 하늘과 사람이 주고 씨도 다른 사람이 뿌립니다. 꽃을 보고 열매를 거두는 것도 소의 몫이 아닙니다. 저는 평생 그렇게 소처럼 살아왔습니다."

    어느덧 90세를 목전에 둔 그는 "세상이 내 마음을 다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평생 갈아 온 땅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장민호의 한마디가 책 제목으로 … "갸, 직업이 뭐이가?"

    독특한 책 제목에는 평생의 선배였던 고(故) 장민호 배우의 한마디가 담겼다.

    연극인으로 출발해 TV 드라마와 뮤지컬, 오페라, 국가 행사까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 표 연출가를 두고 장민호가 어느 자리에서 "갸, 직업이 뭐이가?"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표 연출가는 "연극만 한 것이 아니라 방송도 하고, 뮤지컬도 하고, 여러 국가 행사도 하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며 "한 길만 가지 않고 여기저기 바쁘게 살아온 나를 향한 질책이면서도 질문이었다. 감사하면서도 늘 반성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담아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직업은 무엇일까.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저는 그냥 연출가입니다. 굳이 영어로 말하면 크리에이터(Creator), 디렉터(Director) 정도겠지요. 거장이라는 말은 너무 과분합니다. 저는 그저 만드는 사람입니다."
  •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찾고, 비비고, 만들고, 나누자" … 표재순의 '비빔밥 철학'

    이날 간담회에서 표 연출가는 자신의 작업 세계를 네 개의 동사로 압축했다.

    "찾고, 비비고, 만들고, 나누자."

    그는 "우리 전통에서 소재를 찾고, 당시의 첨단 기술과 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며 "요즘 말로 하면 융복합인데, 나는 그걸 비빔밥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것을 재료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관객과 나누고, 그 안에서 재미와 행복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 작업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표 연출가는 "결국 무대를 만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며 "제가 추구한 연출의 가장 단순한 철학도 재미"라고 강조했다.

    그의 작업은 일찍부터 '대중화'를 지향했다. 대학 졸업 후 극단 '산하'를 창단할 때부터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후 '현대극장'을 이끌면서는 대중화와 과학화, 전문화를 주요 방향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연극의 대중화라는 말을 꺼냈다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고 봅니다."
  •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조선왕조 500년' 등 … 드라마史 획 그은 작품들

    표 연출가의 회고는 자연스럽게 한국 방송사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는 역사 드라마에 남다른 애착을 드러냈다. 특히 MBC의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을 기획한 경험을 떠올리며 "야사보다는 정사를 지향하려 했다"고 말했다.

    허준의 이야기를 다룬 '집념' 역시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았다. 당시 자료가 많지 않았지만 선조실록의 짧은 기록과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이후 '허준'과 '대장금'으로 이어지는 역사 드라마 계보의 한 출발점이 됐다는 설명이다.

    초창기 MBC 시절 제작한 '개구리 남편'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당시에는 불륜 드라마라고 큰 논란이 됐습니다. 키스 장면도 없었어요. 그런데 방송윤리위원회까지 문제가 됐습니다."

    그는 웃으며 당시를 떠올렸다.

    '개구리 남편'은 일일연속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00회를 넘긴 작품이기도 했다. 이후 '갈대', '대원군' 등 굵직한 드라마를 만들며 표재순은 한국 TV 드라마의 성장기 한가운데를 지나왔다.
  •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모래시계'는 세 남녀의 사랑 이야기"

    그의 방송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은 SBS 드라마 '모래시계'다. 표 연출가는 당시 SBS 프로덕션 사장으로 제작·기획을 맡아 이미 상당 부분 진행돼 있던 '모래시계'의 마무리를 맡았다고 회고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정치 드라마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모래시계'를 표 연출가는 본래 '세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기획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박상원이 연기한 검사와 최민수의 조직폭력배 캐릭터, 그리고 고현정이 연기한 카지노 대부 딸을 중심으로 한 러브스토리가 기본 줄기였다"며 "하지만 5·18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작품 속에 들어가면서 결과적으로 정치 드라마처럼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고초도 겪었다"면서 "어디까지나 세 사람이 격동의 시대를 지나며 살아가는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 당시 기획의 출발점이었다"고 강조했다.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정면으로 끌어안으며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 '모래시계'. 표 연출가에게 이 드라마는 단순한 흥행작을 넘어, 평범하게 출발했던 작품에 시대적 해석이 더해지면서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만들어 낸 특별한 경험으로 남아 있었다.
  •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작품은 88서울올림픽"

    수많은 작품 가운데 표 연출가가 가장 큰 작업으로 꼽은 것은 단연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개·폐회식 제작단장 겸 총연출을 맡았던 그는 당시 행사의 핵심 메시지를 "벽을 넘는 것"이라고 기억했다.

    "인종의 벽을 넘고, 이념의 벽을 넘고, 빈부의 벽을 넘자는 것이었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밝은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자신의 업적으로만 평가받는 것에는 선을 그었다.

    "서울올림픽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함께 만든 것입니다. 드라마도 연극도 마찬가지예요. 배우와 작가, 스태프, 기획자, 후원하는 분들이 함께했기 때문에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소의 비유를 꺼냈다.

    "저는 그저 끌어다 놓으면 열심히 밭을 간 사람입니다."
  •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K-컬처의 오늘은 이름 없이 땀 흘린 사람들의 결실"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K-컬처(K-Culture)에 대해서도 표 연출가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는 "오늘날의 한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며 "무대와 현장, 영화와 음악 분야에서 이름 없이 피땀 흘리며 일한 선배와 동료들의 오랜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 문화의 미래를 굉장히 밝게 본다"며 "대한민국의 희망은 결국 현장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60년 넘게 무대와 방송 현장을 누빈 백전노장에게도 마음 한편에 남은 후회가 있었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평생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고,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한 것이 가장 미안합니다."

    표 연출가는 "남은 여생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아흔을 앞둔 원로 연출가의 첫 자전 에세이는 그렇게 화려한 성공담보다 스스로를 낮추는 이야기로 시작됐다.

    연극과 방송, 뮤지컬과 국가 행사를 넘나들며 한국 문화예술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만들어 온 표재순. 하지만 그는 이날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 앞에서 가장 짧고 단순한 답을 내놓았다.

    "저는 그냥 연출하는 사람입니다."
  •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 연출 거목 표재순 공연연출가가 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열린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표 연출가는 '조선왕조 오백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았다. ⓒ정상윤 기자
    취재 = 조광형 기자
    사진 = 정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