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공군이 야음을 틈타 대거 침투한 압록강 철교(1930년대 모습).
    ▲ 중공군이 야음을 틈타 대거 침투한 압록강 철교(1930년대 모습).
    6.25전쟁에서 중공군의 참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역사적 행운’의 전기(轉機)였다.
    왜 행운인가? 막강한 유엔군(미군)과 함께 ‘5천년 굴욕’을 씻어낼 결정적 찬스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러므로 “중공군 포로를 잡았다“는 첫 보고를 받자 무릎을 쳤던 것이다.
    중공군 참전이 역사적 복수가 되는 이유를 정리해보자.
    ◉첫째, 압록강까지 통일이 가까운 마당에 침략한 중공군을 격파함으로써 통일대한민국의 배후를 청소, 공산당 대륙을 자유화-민주화 시킨다면 후환을 영구히 제거하게 된다. 
    ◉둘째, 따라서 20대청년시절 시작했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이 드디어 완성된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넘겨준 조선의 독립이 비로소 한국의 힘으로 확보되는 것이다. 
    ◉세째, 미국이 얄타-포즈담 회담에서 소련에 양보했던 한반도 분단 38선의 비극을 종식시킨다. 이것은 동시에 중국공산당과의 좌우합작에 속아 대륙을 상실한 미국으로서도 역사적 실수를 만회하는 길이다. 
    이와같은 역사적 국제정치적 인식에서 이승만은 침략자 중공을 단숨에 굴복시킬 전략을 동지 맥아더 사령관과 논의, 놀랄만한 시나리오를 6.25 초반에 결정해 놓았던 것이다. 무엇인가?

  • ◆ ‘하나님의 불벼락’

    이승만 대통령은 남다른 기독교 신자이다. 25세때 한성감옥에서 ‘성령’(Holy Spirit)을 받은 이래 그의 독립운동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 옥중저서 [독립정신]에 ”예수의 뒤를 따라 목숨을 버리기까지“ 조국을 위해 ‘무한봉사’하겠다고 맹서한 ‘순교자 신앙’의 소유자이다. 망명생활과 국가 경영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과 희생’이며 ‘하나님이 세운 나라’를 기독교정신의 자유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 ‘순례자의 고행‘이라는 신앙고백을 수없이 남겨놓았다.
    따라서 그의 말과 글은 기독교적 통찰력의 산물로써 차원이 다른 영성(Spiritual Power)을 발하는 것이었다. 남보다 먼저 보고 남보다 넓게 깊게 보기 때문에 ‘선지적’(先知的)이라 했다. 이 점을 이해 못 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독선’ ‘독재’로 비친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대(對) 전체주의 대결은 아마겟돈의 결전이 되리라”

    이것은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가 1941년 펴낸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에서 미국지도층에게 던진 또 하나의 ‘예언’이다. 당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예언했대서 책은 베스트셀러게 되고 이승만은 ‘예언가’로 불렸는데 예언이 이것뿐이 아니었다. 
    ‘아마겟돈의 결전’이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선악의 총력대결, 즉 하나님이 아마겟돈에 침략해온 사탄과 악의 무리들을 일거에 응징하는 최후의 승리를 가리킨다. 
    이승만은 악의 무리로 맨먼저 소련을 거명한다. 즉, 소련-나치-일본, 이 독재집단를 물리칠 파워는 미국 밖에 없는데, 기독교국가 미국은 우상독재 일본의 평화선전에 속고 속아 마취되어있다. 어서 일어나 ‘산불’처럼 미국에 달려드는 악마 일본을 격파하라는 독촉장이었다. 
    세기적 통찰력의 경고, 격동하는 세계를 두고 자유민주진영과 전체주의진영의 전쟁이 결과할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읽어내는 이승만의 전략적 사고와 혜안의 인식능력은 당시 동서지도층에 없던 독보적 자유혁명 국제정치학이다. 결국 일본의 기습공격에 미국의 오랜 잠은 깨어났다.
    1941년 12월 7일 미-일전쟁 개시 다음해 이승만은 또 다시 결정적 ‘예언’을 터트린다. 
    바로 VOA연설, 무장투쟁을 미루던 외교독립론자 이승만이 무장투쟁을 부르짖는다.
    “이것은 독립의 소리이니 생명의 소리요, 얼마 아니해서 왜적 위에 불벼락이 쏟아지리니, 싸우라! 분투하라, 동포여!” 조선내 왜적을 산산이 깨부수라는 폭력투쟁을 명령한 것이다.
    그 ‘불벼락’이 하나님의 천벌이라는 예언 폭탄, 그때 이승만도 몰랐던 불벼락이 놀립게도 원자탄 세례가 될 줄이야! 혹시 이승만도 당시 미국의 원폭 개발정보를 알고 있었던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 ⚫동서 이념전쟁 ⚫원자탄 예고, 이승만의 ‘예언 3종세트’였다.  
  • ▲ 1900년 한성감옥에서 25세 종신죄수 이승만(오른쪽)이 시작한 저술작업중 첫 작품 [정일전기] 표지. 철일전쟁의 각종 자료를 선별 번역, 제시하고 자신의 해설을 붙였다. 침략자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역사관 국가관이 잘 나타나있다.
    ▲ 1900년 한성감옥에서 25세 종신죄수 이승만(오른쪽)이 시작한 저술작업중 첫 작품 [정일전기] 표지. 철일전쟁의 각종 자료를 선별 번역, 제시하고 자신의 해설을 붙였다. 침략자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역사관 국가관이 잘 나타나있다.
    ◆“통일의 적 오랑캐 중공에 아마겟돈의 천벌을!”

    그로부터 10년후 1950년 6월25일 새벽 38선을 전면남침한 공산군이야말로 인류 최악의 전체주의 사탄의 무리였다. 일찍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시절, 레닌-스탈린의 공산화 공세에 시달리던 이승만 대통령은 1923년 세계 최초의 반공논문 ‘공산당의 당부당’을 발표, 그것이 인간 자유의 적, 악의 암덩어리임을 설파한 이후 반공은 독립의 제1조가 되었다. 
    1948년 건국2년째, 성경 귀절처럼 악의 제왕 3명(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믕챠 쳐내려온 6.25전쟁의 종말 역시 아마겟돈의 승리여야 할 것이다.
    ★21세 배재학당 학생 이승만이 처음 시작한 독립운동이 바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청일전쟁서 청국이 패배한뒤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미국명 Philip Jaisohn, 1861~1951) 주도로 1896년 만든 독립협회에서 이승만은 청년 지도자로 반중(反中)운동에 앞장선다. 명청(明淸) 사신을 맞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고, 중주국 황제사절의 접대소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전용할 때 이승만의 활약은 눈부시다. 
    “주2회 내는 독립신문으론 성에 안차서” 최초의 민간 일간지 [매일신문]과 잇따라 [제국신문]을 창간한 23세 언론인, 독립협회의 거리정치 ‘만민공동회’의 인기스타가 되어 이승만은 고종을 상대로 왕정개혁에 본격 돌입한다.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철회시키고 일본의 횡포를 고발하며 미국 민주주의자 청년 이승만은 반외세(反外勢)투쟁 독립운동가로 우뚝 섰다.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다가 투옥된 25세 이승만이 옥중에서 펼친 독립운동은 곧 국민계몽을 위한 논설 집필과 저술활동, 그 첫 작품이 [청일전기(淸日戰記)] 편역이었다. 
    수많은 침략 중에 임진왜란이 가장 크지만 “갑오전쟁(청일전쟁)이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이라며 지정학적 비극의 사슬 ‘중국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해법을 탐구한다. 
    ”...만약 한인들이 오늘의 오키나와 왕국이나 대만의 처지(일본 편입)을 달갑게 여긴다면 이 전쟁의 자취를 알아도 소용없고 차라리 모르는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들과 같이 되기를 원치않는다. 태평양이 마르고 히말라야가 평지가 될지라도 우리 대조선(大朝鮮) 독립은 한인(韓人)의 손으로 되찾고야 말 것이다...“ 
    조선500년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사대주의를 채택, 대국 손에 국가를 맡긴채 허솔세월 하다보니 ”조선은 독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소위 상국(上國)을 배반하면 안되는 의리를 지킨다 하여 중국의 종노릇을 의무로 여겼다. 중국이 어리석어 개명하지 못하니 덩달아 조선도 야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이승만은 억울한 자책과 분노에 치를 떤다. 그의 새로운 독립국가 전국 설계도는 석방직전 29세때 쓴 [독립정신]에 집약되어있다. 
    ★그 중국이 조선에서 물러간 지 반세기만에 공산대국이 되어 다시 침략한 것이다. 그것도 숙원의 통일 눈앞에서 ‘통일의 적’으로 나타났으니 민족의 ‘철천지 원수’ 악마 아니랴. 
    ”이제부터 한중전쟁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래된 역사적 집념이 아마겟돈의 불벼락 원자탄을 선택하였다. 원자탄 천벌은 중공을 일본처럼 자유민주국가로 만들리라.
  • ▲ 6.25때 중공군사령관 팽더화이(얼굴)의 자술서 표지.
    ▲ 6.25때 중공군사령관 팽더화이(얼굴)의 자술서 표지.
    ◆중공 마오 ”항미원조“ 참전 결정
     ”청일전쟁의 굴욕을 두 번 다시 당할 수는 없다“
    중국공산당 독재자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1893~1976)의 말이다. 1950년 소련 스탈린이 김일성을 시켜 일으킨 6.25남침전쟁에 참전을 결정할 때 그 이유를 이렇게 내세운 것이다. 
    즉, 청일전쟁때 일본에 패함으로써 오래된 식민지 조선을 잃었으며 그후 만주사변-중일전쟁까지 허용하게 된 치욕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그 설욕을 다짐한 마오였다.
    그는 일부 반대의견을 잠재우고 동향의 후배 팽더화이(彭德懷)를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팽은 [팽더화이 자술(自述)]에서 당시 중공지도부는 ”미군이 압록강에 닿기 전에 반드시 격멸“해야한다고 결의했으며, 공식기록은 없지만 ‘실지회복(失地灰復)의 역사적 사명감’에 궐기했음을 전하고 있다. 마오의 말대로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바람막이 북한이 없어지면 중공이 춥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발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은 결국 스탈린이 죽자 북한을 중공 스타일 위성국으로 장악 관리하기에 이른다. 
    이로부터 67년뒤 중국공산당 독재자 시진핑(習近平)이 토한 발언이 눈길을 끈다.
    ”코리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
    여기서 ‘코리아’는 북한을 제외한 남한을 가리킨다. 2017년 플로리다 마랄라고에서 열린 미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한미동맹의 당사자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게 중국이 가진 ‘남한의 연고권’ 또는 ‘기득권’을 거침없이 주장하고 있다. 그 속내가 6.25때 마오쩌둥의 그것과 판박이로 드러난다. 중공의 ‘코리아 지배욕’은 세기가 바뀌어도 북한만으론 만족할수 없다는 말이다.  90년대말 중공군부가 발표한 ‘초한전(超限戰:Unrestricted Warfare)’이 그 가공할 입체적 국제공작망의 진상을 말해준다. 
    ★마오는 맥아더의 인천상률작전이 성공하자 참전을 더 미룰 수 없다.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할 무렵, 중국공산당 중앙위는 마오의 지시대로 출전 D-Day를 10월 15일로 정한다. 그리고 백선엽의 1사단이 평양에 입성할 즈음 10월19일 밤 중공 대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 ▲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팔을 낀 모습. 건국직후 이승만은 도쿄로 맥아더를 방문. 한국의 피침시 방위대책을 논의하였다.
    ▲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팔을 낀 모습. 건국직후 이승만은 도쿄로 맥아더를 방문. 한국의 피침시 방위대책을 논의하였다.
    이승만의 한중전쟁(韓中戰爭)■

    6.25전쟁 초반, 대만의 장제스(蔣介石)가 병력지원을 제안해 왔을 때 이승만은 즉각 거절했다.
    ”내 손으로 중공군을 불러들이면 안되지“--이 말이 손자병법을 뺨칠만큼 전략적이다. 
    이승만은 미군참전과 동시에 중공군 참전을 예상했으며 ‘어서 참전해주기를’ 기다렸다고 기록이 말해준다. 그가 장제스 제의를 뿌리친 까닭은 이승만의 대만군 참전수락이 중공 마오에게 ‘참전핑계’로 이용당하면 절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중공 스스로 출병해야 유엔이 ‘침략자’로 규정할 것이고, 자유세계 연합군이 중공과 북한을 한꺼번에 격멸시켜야 하는 것이다. 통일전쟁의 궁극적 목표 아니던가. 
    이번에도 유엔은 그대로 해주었다. 중공군이 1951년 서울을 다시 점령(1.4후퇴)한 직후 2월1일 유엔 총회는 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침략자(aggressor)로 규정한 결의안을 찬성44, 반대7, 기권9로 통과시켰으며, 중공군의 즉각 철수를 명령한다. (총회결의 제498호).      

    ◆이승만의 밀서-맥아더의 화답 “원자탄 밀약”

    중공 마오가 조선출병일로 정한 10월15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남태평양 웨이크섬(Wake Island)으로 불러 만난다. 1945년 루즈벨트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인계받아 1948년 선거로 재선된 트루먼이 한국전쟁을 맡긴 전쟁의 영웅 맥아더를 만나는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이 회담의 주제는 특정한 것이 없었다. 중간 선거를 앞둔 트루먼이 정치권의 한국전쟁 시비를 잠재우고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의 영광을 나눠 받아 여론에 반영시킴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얻어내려는 일종의 선거용 정치회담 성격이 짙었다. 
    압록강변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기 열흘 전에 열린 회담이다. 트루먼이 물었다.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할 확률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 전쟁 초기에 개입했다면 큰 영향을 주었겠지만 이제 한국전쟁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더 이상 그들을 의식하거나 굽실거릴 이유도 없고, 현재 만주지역 중공군은 30만 명쯤입니다. 그들은 공군력이 없으므로 우리 공군력과 해군력이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습니다.”
    회담이 한시간 반 쯤 끝나고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훈장을 달아주고 나서 공항으로 향할 때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장군, 정치할 생각은 없습니까?” 사실은 이것이 맥아더의 대권출마를 경계하는 트루먼의 속내였음은 물론이다. 
    맥아더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면서 “각하에게 도전할 장군이 있다면 그건 아이젠하워”라고 맞받았다. 
    귀국하는 트루먼은 맥아더의 ‘중공참전 가능성 희박’ 발언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중간선거 운동이 막바지인데 ‘라이벌’ 맥아더가 미국내 여론을 다독이는 명약같은 발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중공의 참전 가능성을 애매하게 흐린 맥아더의 그 말은 맥아더가 ’오판‘을 했다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언론이 ’중공군 참전 불가‘ 발언만 집중보도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곧 등장하는 대규모 중공군 기습에 미군이 몰살당하는 패전책임을 맥아더에게 몽땅 뒤집어씌우는 ’공격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보여준 편지...정일권 회고록
    한국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대장은 도쿄에서 열다섯 번이나 시찰 나온 맥아더 장군과 만나 여러가지 대화를 나눈 사이였다. 그가 회고록에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남겨놓았다. 
    1950년 10월 말부터 잡히기 시작한 중공군 포로들의 진술을 듣고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한 무렵의 내막이다. 

    「...노대통령은 내 보고를 듣고 나서 “역시 중공이 나왔구먼. 이젠 겁쟁이 트루먼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하고 지극히 태평이었다. 전쟁의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소. 맥아더가 잘 알아서 할 것이오“하고는 ”정 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왔소.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겉으로는 부인했으나 북진 전략에 대한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맥아더 그는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원폭(原爆)사용도 불사할 각오라고 내게 굳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전략가로서의 심모(深謀)는 참으로 탁월하다오“라고 격찬해 마지않았다...」 
     
    정일권은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두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썼다.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대통령의 편지와 맥아더가 보낸 답장 사본이다. .
    웨이크 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트루먼을 만나는 맥아더에게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는 편지를 또 보냈던 것이었다.  
    「...북진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워싱턴과 영-불은 소련 및 중공의 군사 개입을 겁내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본직(이승만)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 해서 (트루먼이) 북진을 방해하는 백악관의 작전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영매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미국 전문가 이승만 다운 노파심이다. 선거철에 트루먼이 맥아더를 만나는 속내를 뻔히 아는 이승만은 혹시라도 맥아더가 미국내 정치권의 영향으로 ’북진통일‘의 결심이 흔들릴까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역시 기독교정신과 반공으로 맺어진 영혼의 전우임을 확인한다. 이승만이 정일권에게 보여준 맥아더의 답장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건널 것입니다. 본직은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어디까지 본직의 전략을 뒷받침해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칠 것입니다. 하지만 불퇴전(不退轉)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원폭(原爆) 사용도 불사할 것입니다…1950년 10월 13일」 
    회담 개최 이틀 전에 한미 전쟁지도자 두 사람이 나눈 편지들이었다.
    이승만과의 약속대로 맥아더는 웨이크 섬에서 본심을 숨기고 트루먼이 ’듣기 원하는‘ 말만 꺼내놓았던 것이다. 맥아더는 뒷날 회고록에서 회담에서의 대화내용과 본심을 진술하고 있다. 
     
    「...웨이크 회담 의제는 내 입장이 이미 다 알려진 것들로서 새로운 것이 없었다. 중공의 개입 가능성이 가볍게 제기되었다. 그 자리 모든 참석자들은 중공이 개입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중략)...외국에 있는 국무성의 외교첩보망이나 현지 사령관이 적국의 전쟁의지를 알려고 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CIA의 정보보고는 북경정부가 개입할 것이란 어떤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의 정보망에 의하면 압록강 주변에 중공군이 대거 집결해 있으나 그들의 의도는 알 수 없다. 
    나의 군사적인 예상은 이렇다: 우리는 상대가 없는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것으로써 중공군이 공격해올 경우 압록강의 남북을 불문하고 중공군의 기지와 수송로를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군 사령관이 이미 황폐화된 한반도에 대병력을 투입하는 모험을 범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입했을 경우 군수물자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한 중공군의 전면적 붕괴 위험성은 너무나 엄청나다...(중략)...나의 이런 의견과 주장에도 트루먼측으로부터는 그 어떤 반론이나 경고도 없었다. 그런데 그 회담 후 마치 내가 대통령에게 단정적으로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왜곡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대규모 중공군 참전에 놀란 트루먼의 일방적 후퇴명령으로 초래된 ’패전‘의 책임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뒤집어씌웠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 ▲ 중공군의 인해전술, 무기보다 심리전과 매복 기습등 게릴라전법으로 승부한 마오였다.
    ▲ 중공군의 인해전술, 무기보다 심리전과 매복 기습등 게릴라전법으로 승부한 마오였다.
    ◆겁먹은 트루먼, 한만국경 폭격 금지령

    이승만의 통일전쟁을 결정적으로 차단시킨 트루먼의 결정이 나왔다.
    맥아더가 중공군의 침투와 보급로를 끊기 위해 압록강 철교 폭격 허가를 합참에 신청했을 때, 
    11월6일 백악관 회의를 소집한 트루먼 대통령이 ”한만국경 폭격 금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내용은 ‘압록강 양안 5마일내 일체의 작전과 공습을 하지 말라’였다.
    즉, 압록강을 중심으로 북한쪽과 만주쪽 8㎞ 지역을 공격하면 “소련군이 개입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 정치적 결정이었다. 맥아더가 펄펄 뛰며 항의하자 북한쪽 폭격금지는 해제된다. 
    그러나 만주쪽 역시 8㎞㎞만으론 폭격기 비행이 불가능한 것, 중공 영공을 일체 침범하지 말라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트루먼과 애치슨의 “3차대전 예방론”이었던 것이다. 
    11.6 명령은 한술 더 떠서 국경지역 공격엔 “미군 대신 한국군을 앞세워야한다”는 지시를 목박아놓았다. 
    이를 알아챈 중공군은 쾌재를 부른다. 무장이 약한 한국군을 차례로 격파하고 남으로 동으로 특유의 숨바꼭질 게릴라전 ‘인해전술’을 구사하며 진격한다. 
    ▶자승자박 대통령 명령◀
    참으로 이해할수 없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이다. 적군의 수송선-보급선을 보호해주고 자국의 장병들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명령 아닌가. 자승자박 속수무책 그대로다. 아무리 3차대전을 막자는 명분이지만 현지사령관의 판단을 무시한채 막연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겁쟁이의 소행이다. 뒷날 맥아더는 트루먼의 명분을 ‘낱낱이 공박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소련이 참전할 근거도 이유도 없으므로 그것은 ’무식자의 맹목적 횡포‘였다는 분석을 들이대고 있다. 
    ▶진기한 기록 ’인해전술‘◀
    마오쩌둥의 인해전술은 전쟁사에 진기한 기록을 세운다. 공군력도 없고 무기도 훈련도 턱없이 부족한 중공군이 가진 것은 사람뿐, 장제스가 버리고 간 국민당군만 수십만이 남아있으니 이를 총동원하여 ’소비‘함으로써 강대국 미국을 이겨버린 것이다. 공산게릴라 전술의 달인 답게 심리전, 매복, 기습, 위장술로써 낮에는 숨고 밤에만 대량의 인간총알들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피리소리, 괭과리 소리, 짐승같은 고함소리...총이 없어 농기구를 들고 숲속에서 계곡에서 언덕에서 홍수사태처럼 쏟아져 나와 덮치는 육탄전쟁--눈빛 속에 하얀 군복이 그 자리에 엎드리면 폭격기가 구별할 수도 없는 변장술도 귀신 같다. 폭격해도 폭격해도 금방 숨었다가 암흑 속에서 덮치는 비밀병기떼, 바로 ’유령전쟁‘이었다. 맥아더가 경악한바 ”완전히 새로운 전쟁(An Entirely New War)“이라 보고한다.  
    ★혼비백산한 맥아더는 그제서야 자신의 오판을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공군력으로 보기좋게 격멸하려던 전술이 완전실패하고 소규모의 ‘인민지원군’이 아니라 상상초월의 대규모 적군앞에서 SOS를 날린다. ”만주 공격을 금지한채 한반도 국지전으로 끝내려던 모든 희망은 포기해야 한다. 중국의 선전포고 없는 침략은 세계 대전 차원이며 이는 사령관의 결정 범위를 넘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결단을 내려달라. 병력과 무기를 대폭 증강하라.“ 
  • ▲ 6.25중 웨이크 섬에서 회담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 6.25중 웨이크 섬에서 회담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트루먼 ”원자탄 사용할 수 있다” 폭탄 발언
    맥아더의 보고를 받은 워싱턴은 그러나 여전히 무사인일이다. 긴급소집한 국가안보회의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은 “중국의 전면전에 말려들면 안된다. 미군은 중공군에 이길 수 없다”면서 증국 배후에는 소련이 있음을 지적하고 맥아더의 참패는 미국남북전쟁시 북군이 남군을 얕보다가 참패한 불런(Bull Run) 패배 이후 최악이라 비난에 열을 올렸다. 
    트루먼은 11월30일 중국의 ‘부도덕한 침략’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중국이 북한에서 유엔군을 공격한 것은 유엔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소련의 식민지확장정책을 돕는 행동을 중지하라”면서 중대 발언을 한다. 기자가 ‘원자탄 사용 여부’를 묻자 “필요하다면 현지사령관이 한국에서 원자탄을 쓸 수도 있다”고 말해버렸던 것이다. 
    놀란 여론이 들끓자 트루먼은 해명한다. “원자탄을 보유했으므로 개연성을 지적한 것일 뿐 핵 사용을 결정한 바 없으니 오해하지 말아달라.”

    ◆맥아더, 중국본토 26개소 원자탄 투하 재량권 요구
    이때 맥아더는 이미 만주와 중국본토의 원자탄 폭격 비밀계획을 짜두고 있었다. 
    당시 맥아더의 지휘를 받는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래트메이어(George Stratemeyer) 장군의 일지가 반세기 지난 뒤 공개되었는데 트루먼의 원폭발언 다음날 12월 1일자 내용이 그것이다. 
    즉, 맥아더는 원자탄 사용계획을 세밀하게 작성하였고 총26개의 원자탄 투하 승인을 합참에 요청하였다는 기록이다. 맥아더가 지목한 원폭 투하지역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중공의 만주지역 보급선, 군수생산공업지대, 본토의 수도 베이징, 상하이, 난칭 등 대도시들, 동시에 두만강 넘어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중공군의 보급차단은 물론, 중국대륙의 초토화 및 소련의 공군력까지 파괴함으로써 침략군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달성할 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의 공산국을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는 목적을 완결하는 ‘맥아더의 반공전쟁‘ 마스터 플랜이라고 했다. 
    이 원폭작전은 말할 것도 없이 진작부터 승리를 목표삼은 반공전쟁의 두 지도자 이승만-맥아더의 비밀맹서문이 생산한 작품이었다. 
    맥아더는 UP통신 회견때 “한국에서 승리 못하면 유럽에서도 패배한다”고 장담하였다.
    12월 9일 장진호(長津湖)에 진을 친 미군1개사단이 중공군에 완전 포위되어 전멸위기에 빠졌을 때, 맥아더는 원폭투하 재량권을 다시 요구한다. 그러나 백악관도 합참도 마이동풍이다. 처칠의 영국 때문이다. 
  • ▲ 후퇴하는 미군이 폭파한 대동강 철교. 북한동포들이 남하하고 있다.
    ▲ 후퇴하는 미군이 폭파한 대동강 철교. 북한동포들이 남하하고 있다.
    ◆영국 경악...트루먼에 “원폭 사용 말라“ 압박
    트루먼의 ’원폭 발언‘은 세계에 핵폭탄 충격을 안겼다. 영국 노동당정부 수상 애틀리( Clement Richard Attlee, 1883~1967)는 당장 미국에 가겠다고 연락하였고, 프랑스는 애틀리를 만나 한국전쟁의 확전을 막아달라고 부탁한다. 영연방 인도, 호주, 중동 중남미 국가들까지 동조하였다. 12월4일 워싱턴으로 날아간 애틀리는 백악관에서 트루먼과 4일부터 7일까지 회담을 거듭, ”원자탄을 사용 말라. 만약 사용하려거든 영국의 사전 동의를 받으라“고 했다. 트루먼은 ”검토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된 바 없다“고 변명한다. 애틀리는 문서로 약속하자고 들이댄다. 고개를 흔든 트루먼은 그러나 벌써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무엇을?
    ★애틀리가 떠난 뒤 백악관은 ’미군 철수‘ 논의가 분분해졌다.
    갈팔질팡 겁많은 유화론자(柔和論者)들은 북진 허용때 통일을 약속했던 유엔결의안도 눈에 보일 턱이 없다. 결론은 ”38선에서 침략자를 막자“는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방임된 한국전선은 중공군의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다.
    팽더화이는 ”우리가 공격을 하지 않는데도 미군은 하루 백리씩 도망쳤다“고 써놓았다.
    클렘린의 스탈린은 중공군의 38선 돌파를 승인하고 축하전보를 보냈다.

    ◆1.4후퇴...이승만 ’천국행 티켓‘ 들고 부산행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하러 참전했느냐?“
    땅을 치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이 대동강 철교를 폭파했다는 보고를 듣자, 북한 동포들이 ”중공군에게 도살될 것“이라며 격노한다. 흥남철수작전에는 ”북한동포를 최대한 구해달라“는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마을마다 전투부대를 만들자는 이승만은 미8군을 찾아가 ”다리 끊어진 한강에 부교를 많이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피난 가려는 서울시민들이 벌써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막강한 미군 무기도 인해전술엔 쓸모없다니, 믿을 것은 오직 원자탄 뿐인데...이승만은 마지막으로 원주-홍천 저지선 국군부대를 격려하고 돌아와 두 손을 모은다. 이대로 남북통일은 물거품이냐. 아니다. 한중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기도는 끝날 줄 몰랐다.
    중공군은 지난번 북한군처럼 38선을 넘은지 사흘 만에 서울에 들어온다. 1.4 후퇴다.
    1952년 1월3일 “다시는 남행 비행기는 타기 싫다”던 대통령 부부가 부산행 군용기에 올랐다. 그들의 옷 속엔 권총과 ’천국행 티켓‘(독약)이 들어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