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AE식 '골드 스탠더드' 깨고 사우디에 농축 허용IAEA 추가의정서 없이 우라늄 농축 길 연 첫 사례韓, 2035년 협정 만료 앞두고 재협상 기회 확보해야원전 생태계 주도권 놓지 않으려는 미국의 계산웨스팅하우스 사례가 보여준 협상 대가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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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7일(현지시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 참석 중인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튀르키예 앙카라 대통령궁에서 열린 레젭 타입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주최 환영 만찬에서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조건부 우라늄 농축을 허용하는 원자력협정('123협정')을 체결하면서 같은 목표를 놓고 미국과 협상 중인 한국 원자력 외교의 향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엄격한 사찰을 보장하는 '추가의정서'(Additional Protocol) 없이도 우라늄 농축·재처리로 가는 길을 열어준 것이 핵심이다. '쿠팡 표적 규제' 논란으로 한미 간 신뢰가 흔들리는 국면에서 한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원자력 정책 전환이 만들어 낸 기회의 창을 살려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게 됐다.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22일(현지시간) 체결한 협정은 IAEA의 통상적 사찰 대신 협정문에 명시된 제한적 사찰만 적용받도록 했고, 이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별도의 국가안보 면제(national security waiver)에 서명했다. 사우디는 미국과 2년간의 공동연구를 거쳐 상업적 타당성이 확인되면 자체 농축에 나설 수 있다. 자체 핵연료 생산 권리를 포기한다는 이른바 '골드 스탠더드'를 수용하며 2009년 미국과 협정을 맺은 아랍에미리트(UAE)와는 대조적이다. 사우디가 맺은 협정은 90일간 미국 의회 심의를 거치도록 돼 있으나, 의회가 반대 결의를 채택해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재의결에 상·하원 3분의 2 동의가 필요해 발효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우세하다.이번 체결은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5월 공포한 행정명령 14299호('국가 안보를 위한 첨단 원자로 기술 실시')가 예고한 수순에 가깝다. 이 행정명령은 국무장관에게 2029년 1월 3일까지 최소 20개국과 신규 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향후 10년 내 만료되는 기존 협정은 재협상하라고 지시했다. 사우디와의 이번 협정은 이 행정명령이 명시한 '신규 20개국' 목표의 첫 사례에 해당한다.◆韓, 행정명령 14299호로 사실상 재협상 시간표에 올라1956년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해 2015년 한 차례 개정을 거친 한국은 사우디와는 달리 '향후 10년 내 만료되는 협정의 재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행 한미 원자력협정의 유효기간은 2035년 6월이다. 사우디 협정이 한국에 자동 적용되는 사례는 아니지만, 미국 스스로 세운 재협상 시간표에 한미 협정의 만료·자동연장 통보 시한이 정확히 걸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개정 협상을 앞당길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물론 미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CL)에 올려둔 상태라는 점은 부담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이 지난 2월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을 면담하고 직접 요청했지만 민감국가 지정 해제는 현재로서는 요원한 상태다.협상의 발판은 이미 마련돼 있다. 한미는 지난해 11월 정상회담 공동설명자료(팩트시트)를 통해 한미 원자력협정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민간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를 미국이 지지한다는 정치적 합의를 확인했다. 그러나 합의 후 8개월이 지나도록 고위급 협의는 지난달 초의 한 차례가 전부이고 구체적 이행 방식은 정해지지 않았으며, 2차 협의마저 이달에서 다음 달로 밀리는 분위기다.◆웨스팅하우스 사례가 보여준 美의 셈법이런 우려의 배경에는 미국이 원자력 협력을 대가로 실리와 통제권을 최대한 확보하려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한전·한국수력원자력이 지난해 1월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합의가 대표적 사례다. 이 합의로 한수원은 체코 원전 수주를 유지하는 대신, 앞으로 50년간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웨스팅하우스와 1기당 6억5000만 달러 규모의 물품·용역 구매 계약을 맺고 1기당 1억7500만 달러의 기술사용료를 내야 한다. 수출 가능 지역도 나뉘어, 한수원은 동남아(필리핀·베트남)·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아프리카 일부(모로코·이집트 등)·남미(브라질·아르헨티나)·요르단·튀르키예·UAE·사우디에서만 단독 진출할 수 있고, 북미(미국·캐나다·멕시코) 전역과 체코를 제외한 EU, 영국, 일본, 우크라이나는 웨스팅하우스의 독점 지역으로 남는다. 이 사례는 협력을 확대하는 만큼 대가와 통제권도 함께 커지는 패턴이 원자력 협상 전반에서 반복되고 있는 셈이며, 한미 협정 개정 협상에서도 한국이 얻어낼 권한의 범위만큼 미국이 요구할 대가의 크기도 커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쿠팡·조선업 갈등, 원자력 협상 발목 잡기문제는 협정 개정을 최종 결정할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관심이 지금 다른 곳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최근 워싱턴 조야에서는 한미관계가 위중한 국면에 들어섰다는 진단이 잇따르고 있다. 쿠팡을 둘러싼 미국 기업 차별 논란이 대미 투자 지연 문제와 겹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다는 것이다. 강경화 주미대사가 급히 귀국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상황을 보고했고, 정부 내 통상라인과 안보라인 사이에서도 이견이 노출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미 원자력추진잠수함(핵잠) 협의 역시 중동 정세 불안과 쿠팡 사태가 겹치며 교착 상태에 놓인 것으로 전해졌다.실제로 백악관은 지난달 초 쿠팡에 대한 차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식화했고, 청와대는 법과 절차에 따른 조사였다고 반박했다. 미 하원 법제사법위원회는 관련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의 조사가 경쟁 차단을 목적으로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도 지난달 하원 청문회에서 미국 기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우가 무역합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하며 쿠팡과 메타를 직접 거론했다. 통상 압박의 강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핵추진잠수함·우라늄농축·재처리를 아우르는 안보 패키지 협상 전반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지목된다.◆미국의 결핍과 한국의 결핍, 정확히 맞물린 비대칭그럼에도 협상이 결국 재개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근거는 양국 원자력 산업의 결핍이 정확히 맞물려 있다는 데 있다. 미국은 30년 가까이 신규 원전을 제때 완공하지 못했다. 조지아주 보글 원전 3·4호기는 기존 계획의 2.5배인 350억 달러를 넘게 쓰고서야 상업운전에 들어갔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V.C. 서머 원전 2·3호기는 90억 달러의 손실만 남긴 채 2017년 건설이 중단됐다. 여기에 농축 우라늄 필요량의 95%(2022년 기준)를 수입하고 핵연료 수입의 35%를 러시아에 의존하는 공급망 구조가 겹친다. 반면 한국은 킬로와트당 약 3571달러라는 미국(5833달러)·프랑스(7931달러) 대비 압도적인 건설단가와 평균 5.3년(2008~2018년)의 공기, 미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설계 인증을 받은 APR1400을 갖추고도, 저농축 우라늄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고리원전이 내년 95.1%의 포화율에 도달하는 등 사용후핵연료 저장 한계에 직면해 있다. 미국에는 원전을 제때 지을 역량이 없고 한국에는 연료 주기를 스스로 완결할 권한이 없으므로 건설 역량과 연료 주기 권한을 맞바꾸는 거래 구조 자체는 이미 성립해 있는 셈이다.심상민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10월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원전의 예산범위 내 적기 건설의 노하우와 안정적 생태계를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와 미국이 원자력 진흥을 위해 협력하기로 할 경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조선업 협력으로 포괄적 합의를 이끌어 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와 유사하게 '미국 원자력 산업을 다시 위대하게'(MANIGA)라는 구호를 앞세워 관세 협상에서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자는 이른바 '마니가' 구상을 제언했다.◆협상 교착 대비한 차선책 5가지… "협상력 약화" 경계론도완전한 농축·재처리 권한을 한 번에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비한 단계적 대안도 이미 제시돼 있다. 이찬송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해 8월 보고서에서 우라늄-235 기준 5% 미만의 농축만 허용받는 방안, 국내에 농축시설을 짓되 기술 접근은 차단하고 소유권만 인정받는 '블랙박스 모델', 미국 내에서 20% 미만 농축을 허용받고 생산물의 소유권을 확보하는 방안, 2015년 협정 제5조의 '합작사업' 조항을 근거로 미국 내에서 한미 공동 농축사업을 벌이는 방안, 그리고 초우라늄 분리·변환 기술 등 해외 재처리 기술 공동개발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 등을 제언한 바 있다.이 가운데 5% 미만 농축안은 한수원 원전 대부분이 4~5%대 저농축 우라늄을 쓰는 현실에 부합해 기술적 타당성과 비확산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기 쉽다는 평가를 받고, 미국 내 농축안은 프랑스 오라노가 2024년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농축시설을 짓기로 한 사례가 참고 모델이 된다. 다만 블랙박스 모델은 비핵국가에 적용된 선행 사례가 없는 과도기적 대안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물론 이런 차선책을 검토하는 것 자체가 협상 상대에게 선호 변화나 의지 약화로 읽혀 협상력을 스스로 깎을 위험이 있지만, 재처리 분야에서 미국의 포괄적 장기 동의를 얻어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핵잠 협력과 민수용 농축·재처리 협상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기보다 두 트랙으로 분리해 다루고 핵잠 도입 논의는 뒤로 미룬 채 민수용 권한 확보에 협상력을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제언이 나오는 이유다.결국 관건은 시점이다. 미국 스스로 정한 재협상 시간표에 한미 협정이 올라와 있고, 사우디 체결로 워싱턴의 원자력 협정 정치가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금이 개정 협상의 비용이 가장 낮은 구간이다. 쿠팡 사태로 대표되는 통상·안보 갈등이 협상의 속도를 좌우하겠지만, 갈등이 길어질수록 행정명령이 정한 시한과 한미 원자력협정의 자동연장 통보 시한, 초기 20년 만료 시점 사이에서 한국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은 좁아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