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철훈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지난 3일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인 모습. ⓒ뉴시스
6·3 지방선거가 끝났지만 선거를 둘러싼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투표지 부족 사태와 일부 투표소의 혼란, 선거관리위원회의 미숙한 대응은 국민에게 또 한 번 깊은 불신을 안겼다. 선거는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선거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 민주주의 자체가 흔들린다. 그렇기에 지금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책임 공방이 아니라 선거 제도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다.
특히 이번에는 개헌 논의의 초점을 선관위 개혁에 맞출 필요가 있다. 부마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역사적·이념적 쟁점은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러한 문제를 한꺼번에 묶어 논의하다가는 정작 시급한 선관위 개혁이 또다시 정치적 공방 속에 묻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개헌은 이른바 '원샷 개헌' 방식으로 선관위 개혁에만 집중해야 한다. 선거 관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 개혁부터 완수해야 한다.
무엇보다 감사원의 선관위 감사 권한을 헌법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선관위는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외부 통제와 감시가 제한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어떤 국가기관도 견제 장치 없이 운영될 수는 없다. 독립성은 필요하지만 무제한적 면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헌을 통해 감사원이 합법적으로 선관위를 감사할 수 있도록 하고 추가로 외부인으로 구성된 감찰 제도를 도입해 상시적인 견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선관위가 그간 보여준 '셀프 개혁'은 한계를 드러냈다. 2022년 소쿠리 투표 사태 이후 혁신위원회를 구성했고, 2025년 투표지 반출 논란 이후에는 신뢰회복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민이 체감하는 신뢰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선관위원장 제도도 손질이 필요하다. 현재처럼 대법관이 겸직하는 구조로는 상시적인 관리와 책임 있는 운영을 기대하기 어렵다. 선거 관리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선관위원장을 상임직으로 전환해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투표지 부족 문제로 선관위와 시위대가 대치했던 현장에서 한 시민은 "국민을 개, 돼지로 아느냐"고 항의했다. 다소 거친 표현이지만 그 안에는 선거 행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허탈감이 담겨 있다. 국민은 단순히 투표장에 가서 한 표를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주권자이며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다.
여야 정치권은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행정부와 입법부, 지방 권력까지 장악한 현 정권과 여당은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선관위 개혁 요구를 '음모론'이나 '정치적 공격'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국민적 불신을 해소해야 할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검찰개혁을 추진할 때 보여준 집념과 추진력을 선관위 개혁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만약 이번에도 '정치적 계산기'만 두드리며 개헌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국민의 분노는 선관위라는 기구를 넘어 행정부, 입법부, 지방 권력까지 모두 거머쥔 현 정권의 무능과 독선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6·3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의 경고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국민은 지배나 관리의 대상인 '개, 돼지'가 아니다. 현 정부가 공언했듯,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권자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수용하는 첫걸음은 선관위를 성역 없는 감시와 견제의 틀 안에 두는 것이다. 이를 위한 '원샷 개헌'을 조속히 완수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다음 선거까지 현행 선관위 체제를 그대로 방치한 채 국민의 참정권을 맡길 수는 없다. 여야는 이 사안만큼은 정쟁을 멈추고 오직 국민만 바라보며 공론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사라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정치권이 이번에도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국민은 선관위뿐 아니라 이를 방치한 권력 전체를 심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