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확한 채점 기준 논란 … 실기시험 '오답 처리'에 응시자 반발채점기준·정답 공개 요구 잇따라 … 공단 "비공개 방침 유지"행정심판 기각 결정 … "시험 재량권 존중"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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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산업인럭공단 홈페이지에 공개된 2025년 5월 행정심판 주요 재결 사례. ⓒ한국산업인럭공단
국가기술자격시험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의문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최근 공인노무사 시험에서 발생한 결시생 합격 오류에 이어 전기기사 실기시험에서는 채점 기준의 불분명함을 둘러싼 논란이 수험생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
답안과 채점 기준을 공개하지 않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오랜 비공개 관행이 시험의 신뢰성을 흔든다는 지적으로도 이어지며 자격시험 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 요구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산인공, '부당한 오답 처리' 주장하는 수험생에 "행정심판 제기하라"전기기사 시험을 준비했던 김선홍(47) 씨는 2024년 10월 치러진 제3회 전기기사 실기시험에서 58점을 받아 합격 기준인 60점에 2점이 모자라 불합격 처리됐다. 전기기사 시험은 전기 분야 국가자격 취득을 위해 매년 1·2·3회로 나뉘어 필기와 실기로 시행되며 실기시험은 현장 실무를 반영한 도면 작성과 문제풀이 등으로 평가된다.김 씨는 문제 11번의 소문항 3번에서 출제된 '비율차동계전기(RDf) 작동 원리' 도면 완성 문제에서 부당한 오답 처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험지에 실선으로 변류기(CT), 과전류계전기(OC), 비율차동계전기(RDf) 각 장치를 연결해 도면을 완성했음에도, 시험지에 점선으로 신호체계를 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문항이 오답 처리됐다고 주장했다.채점 결과에 불복한 김 씨는 공단 자격품질관리국 국가자격채점센터에 채점 기준과 답안 공개를 요구했지만 공단 측은 김 씨와의 통화에서 "채점 기준은 제공할 수 없으며, 이의가 있을 경우 행정심판을 제기하라"면서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는 필요한 자료를 제출할 수 있다"고 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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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문제 명확하지 않아" … 중앙행정심판위 "시험위원 양심과 판단에 따라"김 씨는 지난 1월 해당 시험의 불합격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취지로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했다.김 씨는 심판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호체계까지 도면에 그려야 한다면, 문제에서 그러한 지시사항이나 조건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어야 함에도 '앞선 문항의 도면을 참고하라'고만 되어 있다"고 했다. '작성된 답안'과 '신호 체계를 점선으로 추가 표시되는 답안'이 모두 동일한 작동 원리를 가지는 도면이며 기능적으로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주장이다.김 씨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출문제 풀이 자료와 시중 전기학원 강의, 각 대학의 전기공학 석·박사 학위 논문, 전문 서적 등 자료를 제출했다. 그는 "각 대학의 전기공학과 석·박사학위 논문, 다수의 전문학원 교재와 강의에서도 실선으로만 그리고 있다"고 항변했다.그러나 중앙행정심판위는 같은 해 5월 "제출한 기출문제 풀이와 논문 등의 자료만으로는 이 사건 문제의 정답을 복수로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이 사건 시험의 채점위원은 채점기준에 따라 채점하면서 그 과정에서 오류나 잘못이 있다고 볼만한 객관적인 정황이나 자료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김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아울러 "주관식 시험의 출제 및 채점에 관한 사항은 전문적 지식과 소양을 가진 시험위원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행해지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러한 판단은 존중되어야 한다"며 "법률을 위반하거나 합리성 등이 결여되어 재량권을 일탈·남용하였다고 볼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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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기준·문제 비공개', 법적 근거 논란 속 일관된 거부이러한 논란의 핵심에는 공단이 시험 문제와 정답을 공개하지 않고 채점 결과 점수와 합격 여부만 통보하는 정책을 수십 년째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 자리한다.공단은 과거부터 "시험 문제은행 유지가 곤란해진다", "출제·채점의 공정성이 훼손된다", "불필요한 이의 제기나 소송이 급증한다"는 이유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며 공개 요구를 거부해왔다. 특히 문제은행 방식을 기반으로 한 자격시험의 경우 문제 공개 시 기존 문제 재활용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새 문제를 개발하는 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비공개의 주된 이유로 내세웠다.하지만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2012년 제12회 소방시설관리사 시험 행정심판에서 "응시자가 요청할 경우 자신이 작성한 답안지는 공개해야 한다"고 결정하며 내부 지침만을 근거로 한 비공개 결정은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권익위는 "공공기관이 보유·관리하는 정보는 특별한 비공개 사유가 없는 한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정보공개제도의 취지를 재확인했다"고 설명했다.그럼에도 공단은 이 결정 이후에도 홈페이지 안내문 등을 통해 시험문제, 정답 작성·교부, 정답 파일 등 시험 관련 일체의 정보를 비공개대상 정보로 분류하고 있으며, 정보공개법 제9조 제1항 제5호를 근거로 "시험에 관한 사항은 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이나 연구·개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정보"로서 비공개를 고수하고 있다.한편 공단은 2022년 산업안전기사 3회차 시험에서 채점 기준이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돼 대규모 불합격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응시자들의 답안지와 채점 기준 공개를 거부하며 "채점에 이상이 없다"는 입장만을 유지하다가 국회와 수험생들의 지적이 이어지자 추가 합격자를 발표한 바 있다.당시 공단은 누가 봐도 같은 뜻임에도 오답 처리가 된 것에 대해 "채점이 너무 엄격히 이뤄졌다"며 "'뜻이 같고 해석이 같다'면 정답의 폭을 넓혀주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답변했다. 내부 채점 기준이 자의적으로 해석·운용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응시자들은 문제 해설과 채점 기준이 공개되지 않아 동일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험에 불합격한 응시자가 본인의 답안과 채점 과정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받지 못한다면 자격시험 제도의 신뢰성은 지속적으로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