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 '소 휴전회담' 18일...이승만 협상술에 로버트슨 녹초 되다아이젠하워의 한미방위조약 약속문서 받아내...이승만도 양보
  •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⑪ 경무대서 '한미 휴전전쟁' 18일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선물’은 충분히 가지고 왔다.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에게 보내는 선물을 들고
    로버트슨 특사는 26일 아침 9시10분 경무대에 도착하였다.
    빠바방~~군악대가 팡파레를 울리며 연주를 시작하였다.
    신록이 우거진 아름다운 대통령관저 넓은 뜰에는 3군의장대가 도열하고
    현관엔 한국정부 모든 국무위원들과 장성들이 나와 미국특사 일행을 환영하였다.
    로버트슨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의장대 사열을 받아야했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한미 양국의 휴전협상 담판은 이렇게 화려하고 거창하게 시작되었다.
    노련한 이승만은 미국특사를 국빈급 특별대접으로 협상의 첫 카드를 내민 것이었다.
  • 6.25남침 3주년 이승만대통령의 '난국돌파' 연설. 아래에 로버트슨 입경 기사.ⓒ조선DB
    ▲ 6.25남침 3주년 이승만대통령의 '난국돌파' 연설. 아래에 로버트슨 입경 기사.ⓒ조선DB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기념촬영을 하고 첫 회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측은 백두진 국무총리, 변영태 외무장관, 신태영 국방장관이 배석하였고,
미국측에선 로버트슨 옆에 브릭스 주한대사와 양 국무성동북아과장이 앉았다.
이날 첫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NBC방송 존 리치 기자가 토의내용까지 녹음했다.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로버트슨씨, 나와 극민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별사절이자 덜레스 국무장관의 대표로서
 귀하를 환영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게 생각한다. 귀하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에 한국에  왔다.
 나는 귀하의 방한중 우리가 어느 정도의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로버트도 맞장구 쳤다. “뜨겁게 환영해 주시고 각하와 대화할 영광을 가질 수 있음에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미국에 있는 귀하의 친구 두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의 문안과 메시지를 휴대하고 왔다. 우리 양국간의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풀리기를 기대한다”
한미 3명의 지도자, 이승만은 프린스턴대 박사이고 아이젠하워는 컬럼비아대 총장을 지냈고
덜레스는 프린스턴대 박사 출신으로 이승만과 동문이다.
로버트슨이 덜레스 장관의 친서를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국내에선 공개되지 않고 미국 언론들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아이젠하워 미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닉슨 미부통령을 이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하여
  파견할 것을 제안하고, 회담장소로 일본 혹은 오키나와가 선택될 것”이며, 이런 조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조속한 휴전성립을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직접교섭을 행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라고 전하였다.
낮12시 15분까지 2시간 30분이나 이어진 첫날 회담에서 이승만은 주로 로버트슨의 말을 듣는
시간을 가지면서 다시 한번 한비방위조약의 ‘즉각적인(immediate)’ 체결과 경제원조, 그리고
한국육군 20개 사단의 증강등을 조목조목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로버트슨은 휴전 반대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가 
‘즉각적인 변화’를 보여야한다는 점을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휴전 준수- 이것이 로버트슨이 서울에 온 ‘특사로서의 단 하나의 임무’이다.

이대통령은 회담후 기자들에게 “로버트슨씨가 좋은 생각을 가져와서 많이 양해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로버트슨사도 “매우 우호적인 회담이었다. 우리는 서로 오해를 없애는데 진전을 보았고 또 만날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로버트슨 특사의 침통한 표정과 또 외교소식통이 전하는 ‘낙관 불허론’으로 미루어보아 회담진행은 “결코 순조로운 것이 아니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라고 조선일보는 기사를 썼다.
  • 경무대서 첫 회담전 악수하는 이승만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
    ▲ 경무대서 첫 회담전 악수하는 이승만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
    팽팽한 협상..."한가지 합의하면 또 새로운 조건 꺼내는 이승만"

    6월27일=이틀째 회담에서 로버트슨은 한국이 휴전협정을 지지하고 준수한다면,
    또한 동시에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무기한 유엔군에 맡길 것에 동의한다면,
    한미방위조약을 미-필리핀 조약과 유사한 수준으로 체결하는 문제를 즉시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아이젠하워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유엔군이 한국의 북진통일에 협력할 때에만 작전지휘권을 계속 위임할 것이며
    방위조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휴전 조인 이전에 체결되어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였다.
    28일= 일요일에도 논쟁은 계속되었고, 로버트슨은 3-4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회담이 장기화
    되리라는 예상으로 출국 스케줄을 바꿔야 했다.
    29일=클라크와 로버트슨에게 이승만은 “한국전쟁은 내전이 아니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생존투쟁”이라 규정하고 군사적 승리만이 전세계 공산 야욕을 잔념시킬수 있을뿐더러,
    싸워서 이겨야만 한국이 ‘제2의 중국’처럼 공산화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하였다. 로버트슨은 “미국은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 통일을 실현시킨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면서 방위조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한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잘라 말했다.
    30일=회담이 평행선을 달리자 클라크와 브릭스 대사는 이승만 대신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휴전을 반대하면 미국은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침을 전달하였다. 초지일관 고집을 꺾지 않는 이승만의 의지를 꺾으려는 협박이었다.
    7월1일= 로버트슨은 덜레스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은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shrewd, resourceful) 인물인데다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national suicide)로 몰고 갈 능력이 충분하고 매우 감정적이며 비논리적인 광신자(fanatic)“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받아야만 한다“는 동질감도 밝히면서
    따라서 협박과 회유의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이승만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며 그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보고하였다. 
    2일= 이승만은 휴전후 개최한다는 정치회담에서 통일을 실현시키겠다는 미국의 제안이
     “실현성도 없고 어리석은 시간낭비”이며 한국을 어린애로 보고 달래려는 ‘당근’인줄 알면서도
    이것을 역협상카드로 던졌다. “만약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은 한국통일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준다는 확실한 약속을 한다면, 휴전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이런 약속도 없는 한 국민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다소 완화된 자세를 보여 준 것이었다.
    ★3일= 로버트슨이 정전후 전쟁을 재개하려면 "미국의회의 승인은 필수적"이라고 버티자 
    이승만은 역사적 근거를 들이대며 대한민국의 방어는 '미극의 의무'임을 설명한다. 
    암덩어리처럼 평생 가슴에 박혀있는 강대국의 횡포, 그것은 구한말로 거슬러올라가는 
    식민시대의 비극, 미국-일본 합작을 통해 저질러진 한일병탄부터 강의를 시작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한국인은 1910년과 1945년 두차례나 미국의 배신에 버림받았소.
    조선왕국과 체결했던 ‘조미수호조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일본침략에 협력하였고
    해방후 한국과 사전협의도 없이 한반도를 동강내어 소련의 강압에 굴복, 분단시키더니
    이제와선 우리에게 일방적인 휴전을 강요하는 상황은 또 하나의 팔아넘기기(a another sellout), 즉 한국을 일본에 넘기고 소련에 넘기고 중공에 넘기려는 ‘세 번째 배신’이 되지 않겠소?”

    불쌍한 대한제국의 슬픈 에피소드 <비운의 딘막극 2장>

    제1장 = 1905년 8월 뉴욕의 이승만, 루즈벨트 대통령과 허망한 만남
    한성감옥에서 6년째 옥살이하던 이승만이 석방된 것은 순전히 영어를 잘한 덕분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놓고 한판 패권을 다툰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고종황제는
    미국대통령에게 원조를 청할 특사를 찾다가 ‘왕실의 역적’으로 몰려 옥살이 중인
    이승만을 풀어주어 미국으로 급파한다.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일방이 외부로부터 불공정-모욕을 당하면 타방이 거중조정으로 돕는다)는 규정에 매달려 고종이 나라를 지켜보고자 짜낸 궁여지책이다. 
    1904년말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면담신청을 했건만 이듬해 봄 여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가 8월 4일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5월에 대한해협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한 일본이 미국에 부탁하여
    전후처리 강화회담을 맡아 분주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욕 롱아일랜드 사가모어 힐에 있는 여름 백악관에서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를 30분간 만나주었다. 
  •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유학생 이승만.
    ▲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유학생 이승만.
     
  •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26대 대통령.
    ▲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26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