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포로송환협정 조인 직전에 반공포로 2만7천명 석방처칠 경악 "이승만 없애라" ...아이크, 이승만 달래기 나서
  •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⑩ 반공포로 석방 전후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포럼 대표

    D데이 6월18일 오전0시, 수용소내 포로들은 잠은커녕 창밖만 뚫어져라 내다보고 있다.
    초저녁부터 내리는 빗발 속에 칠흑같은 어둠 저편에서 깜빡깜빡깜빡 손전등 불빛 신호 세 번!
    “나가자” 포로들은 일제히 막사를 뛰쳐 나갔다. 철조망은 누군가 벌써 넓게 끊어놓았다.
    수천명의 포로들이 밀려나가며 성급한 사람들은 철조망에 담요를 덮고 기어 넘어간다.
    탕 탕 탕...10분쯤 지났을 때 총소리와 함께 미군 경비병들이 나타났다.
    검은 그림자들이 미군들을 덮치며 얼굴에 고춧가루를 쳐바르고 무장해제를 시켜
    두팔을 묶어 무릎 꿇렸다. “멈추지 마! 30리 뛰어야해!”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친다.
    탈출한 포로들은 정신없이 뛰었다. 막사 대장이 나누어준 사복과 며칠분의 비상식량을 움켜쥔
    포로들은 무작정 달린다. 날이 밝기 전에 미리 지정된 장소 “30리 밖까지” 도망쳐야만 한다.
    미군에게 다시 체포되면 절대 안 된다. 
    논산(論山)지구 포로 1만1천38명 중에 탈출 성공 8천24명, 3천여명이 탈출을 못했다.
    미군 총격에 사망 1명, 부상 2명이다. 300여명은 다시 체포되어 끌려왔다.
    같은 시간 전국의 포로수용소에선 ‘반공포로 탈출 대작전’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었다.
  •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자료사진)
    ▲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자료사진)

▶ 암행밀사들의 작전지령...철조망 끊어놓고 대기...탈출포로 경찰이 보호
이승만 대통령의 비밀특명을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처음에 D데이를 11일로 잡았다가
18일로 연기시켰다. 달빛이 없는 초순을 택한 것, 그동안 더욱 면밀한 작전이 완성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사실은 이승만이 D데이를 변경시킨 것은 포로송환협정이 18일 조인된다는
정보를 알기 때문에 파괴력을 극대화시키려면 바로 직전에 파탄을 내야 하는 법.
원용덕은 잠은 신당동집에서 자고 경무대 경찰서 뒤편 일본식 집 골방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육군보좌관 김길수(金吉洙)대령과 헌병총사령부(이하 헌총사) 문종욱(文鍾郁대형을 불러
포로석방 작전명령을 짠 원장군은 6명의 헌총사 간부들에게 비상을 걸었다.
이들 임기택(林奇澤) 중령, 김삼용(金三龍)중령, 김진호(金鎭浩)중령, 조용집 소령,
황동준(黃東俊)소령, 최세경(崔世卿)소령에게 담당지역을 배정하고,
사전 암행공작등 일체의 현장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각자 지역특성에 따라 부분적인 수칙을 달리했으나 석방작전 주요매뉴얼을 이렇다.
1) H아워에 전면 소등, 미군 발전기를 끈다. 2) 수용소 막사별로 탈출순서를 정한다. 
3) 철조망은 미리 절단, 절단기는 포로들에게 주고 철조망 타고 넘을 가미니도 준비한다. 
4) 탈출 포로들은 사복을 입혀 민가에 분산 피신시킨 뒤, 경찰에 알려 보호한다.
5) 미군과 충돌은 최소화, 그날밤 근무때 여자 얘기등으로 경계를 해이 시키고,
불가피할 경우 고춧가루를 뿌려 무력화 결박함. 가급적 살상 사고는 피하도록 한다.
암행지휘관들은 포로 대대장들에게 사소한 임무까지 반복주지 시켜 준비완료 보고를 받았다.
그날 밤 10시, 포로 지도자들은 취침소등이 되자 그때서야 포로들에게 밀령을 가르쳐주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유의 날이 왔소. 이승만 대통령께서 드디어 우리 석방명령을 내렸소. 
지금부터 하라는 대로 해야 하오. 철조망을 넘으면 적어도 30리는 벗어나시오.
거기 경찰이 우리를 보호해줄 겁니다...“ 이 지령대로 석방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 수용소 문을 당당히 걸어나오는 반공포로들.(자료사진)
    ▲ 수용소 문을 당당히 걸어나오는 반공포로들.(자료사진)

  • ▶ 미군 장갑차 열고 고춧가루 퍼부어...부평에선 포로 수십명 사망

    대부분 수용소들이 미군 초병들을 제압하고 포로석방 작전에 성공하였으나
    경북 영천(永川)지구와 경기 부평(富平)지구에선 예상밖의 ‘교전’을 치루어 적잖은 희생자들이
    발생하였다.. 두 사건을 1984년 부산일보사가 발간한 [비화- 임시수도 1천일]에서 간추려본다.

    영천지구= 헌총사 밀사 조용집 소령은 17일 영천에 내려와 경비중대장 김규진(金圭軫)소령과 작전계획을 짰다. *18일 새벽2시 석방 *17일밤 11시 절단기를 수용소에 투입 *정문 미군보초 납치 *철조망 밖 연락책임자들 지정 등을 결정한 얼마후 조소령은 크게 낭패하였다. 
    김소령이 평소에 친분을 쌓은 미군 수용소장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인간적인 협조’를 부탁한는
    바람에 작전이 물거품 된 것, 미군대령은 즉각 경비를 강화하고 포로간부들을 영창에 넣어버리는 것이었다. 조소령과 김소령은 어쩔줄 몰라 금호강 모래밭에서 밤을 새우며 묘안을 찾던 중에
    대구 육군헌병사 김병삼(金炳三) 중령이 부르는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김중령은 김소령 앞에 검은 보자기를 풀렀다. 그 속에선 커다란 장도칼이 나왔다.
    그것은 조금전 헌총사 김문호(金文豪)소령이 나타나 전해준 것, 그 뜻을 알아채린 김중령이
    거사실패로 낙담한 김소령을 불러 보란듯이 껴내놓은 것이다.
    “이 칼은 대통령 각하께서 보내오신 것이오. 오늘밤 안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지 못하면
    우리 둘은 이 칼로 자결해야 하오.” 비장한 각오를 다진 그들은 조소령과 함께 새작전을 짠다.
    수용소는 이미 대구에서 동원한 미군장갑차 30대가 포위하고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한판 붙을 수 밖에 없는 형편, 두 사람은 남전(南電: 지금 한전) 영천출장소를 찾아 소장에게
    밤9시 단전시켜줄 것을 간청하였다. 소장이 “미군이 문책하면 안된다”며 거절할 때에
    곁에 있던 젊은 전공이 나섰다. “사고로 위장해서 제가 끊겠어요. 소장님이 허락하신다면...”
    구세주를 만난 두 소령은 미리 조직한 특공대 30명을 대기시키고 전공과 함께 밤9시를 기다렸다. “끊어라” 조소령의 명령에 영천 포로수용소는 암흑세계로 변했고 동시에 특공대 30명은
    전광석화와 같이 행동 개시. 포로복장으로 위장한 특공대원들은 포로들을 탈출시키면서
    3명이 1개조로 미군 경비병들을 급습, 수갑을 채웠다.
    동시에 장갑차 헤드라이트를 사격한 특공대원들은 장갑차에 뛰어올라 고춧가루 포대를 쏟아넣어 비명을 지르는 미군들을 일시에 붙잡았다.
    수천명 포로들은 금호강쪽으로 탈출, 사복경찰과 반공청년대원들이 민가에 수용하였다.
    협조를 거부했던 미군 수용수장은 돌발사테를 당하자 미군병사들에게
    “한국군과 싸우지 말라. 이것은 정치적 문제이니 방해 말라”고 뒤늦게 지시했다고 한다.
  • 태극기와 멸공 애국 글자를 몸에 새긴 반공포로.(성명 미상, 자료사진)
    ▲ 태극기와 멸공 애국 글자를 몸에 새긴 반공포로.(성명 미상, 자료사진)
  • ★ 부평지구= 이곳 포로수용소는 미국기지 내 미공병단 옆에 있어 처음부터 포기상태였다.
    미군은 18일 아침 방송으로 전국의 탈출사태를 접하자 포로들을 작업장에도 내보내지 않았다.
    이날 오후 3시쯤 철조망 밖에서 헌병장교가 수용소 경비 헌병을 기합주는 듯 
    반복하여 호통치는 소리가 안에서 술렁이는 포로들에게 다 들려오는 것이었다.
    “다른 수용소는 다 탈출했는데 여긴 무얼 하느냐. 빨리 나오기만 하면 우리가 다 도와줄 텐데...” 이 말을 듣자 포로들은 그제야 상황을 알고 탈출준비를 서둘렀다.
    미군측은 탈출방지를 위해 한국군 경비들을 철수 시키고 해병대를 출동시켜 겹겹이 경계망을
    강화하였으나 밤 9시 수용소는 전면 단전, 암흑천지로 돌변하였다.
    조편성을 마친 포로들은 50명씩 스크램을 짜고 철조망에 담요를 덮으며 탈출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미해병대가 착검한 총으로 저지에 나서자 후미에 따르던 포로들이 방향을 바꿔
    뒤쪽으로 달려가자 인근 헬기장 서치라이트가 켜지며 사격하는 바람에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사망포로 47명, 부상 60여명, 탈출한 538명은 분산 잠적, 군경 및 청년단원들이 피신시켰다.
    이튿날 19일 오전 9시 부평 초등학교 교정에서 시민 궐기대회가 열리고
    인천까지 경인가도를 행진하는 시민들은 뒤늦게 몰래 탈주하는 포로들을
    검문하는 미군들로부터 숨겨주는 인간띠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이렇게 사흘동안 석방된 반공포로들은 전국에서 모두 2만 7천여명이 된다.
    중공군 포로들은 한명도 없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 반공포로 석방의 충격에 싸인 각국 반응.ⓒ동아DB
    ▲ 반공포로 석방의 충격에 싸인 각국 반응.ⓒ동아DB
    폴폴 뛰는 처칠 "배신자 이승만, 유엔군이 권력박탈하라"
        
    세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서울발 아침 긴급뉴스는 강대국들을 무차별 강타하였다.
    런던서 잠들었던 처칠이 침실을 뛰쳐나오고 도쿄에서 아침 샤워하던 클라크는 면도칼을 떨어트렸다고 한다. 워싱턴 아아젠하워는 즉각 백안관 안보회의를 소집하여 흥분한 얼굴로 분노를 토하였다. “이승만은 우리의 적이다. 전쟁하는 적들보다 더 무서운 적이다.”
    수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공산측과 겨우 타결한 포로송환 협정, 그 최종서명이 오늘 18일로
    예정되어있는 판에 이승만이 산통을 깨버렸으니 이승만에 대한 비상대책이 더 급하다고 말했다.
    누가 적인가를 재규정하자는 주장, 이승만은 더 이상 신뢰하면 안된다는 주장, 한국군 지원과
    경제원조도까지 당장 끊어버리자는 주장 등등이 나왔다. 

    처칠은 “유엔 권위를 파괴한 극히 심각한 중대범죄”라고 펄펄 뛰면서 아이젠하워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이승만은 세계 평화의 적이다. 배신자 이승만이 존재하는 한 한국전쟁에 협조 못하겠다. 파병16개국군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승만의 권한을 박탈해야 한다.”고 ‘최후통첩’을 한국에 보내라며 성화를 부렸다.
    백악관회의에서도 처칠과 똑 같이 ‘이승만 제거’ 논의가 다시 본격화하였다.
    휴전을 결사반대하고 단독북진 통일 주장을 포기하지않는 이승만, 그런 자살행위를 왜 고집하느냐 말리면 “공산지배를 받느니 자살을 택하는 길 밖에 없다”는 이승만을 만나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협박’이 입으로만이 아니라 과감히 행동할 인물이라는 점을 벌써 판단하고 있던 참에 
    이번에 반공포로 석방으로 실증되었다며 "거봐라, 내가 뭐라더냐?" 책임공방도 일어났다. 
    미국 정부는 두 가지 난제에 봉착했다.
    하나는 실제로 이승만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회수하여 단독북진에 나서는 것,
    둘은 이승만이 또 포로를 석방할 경우, 공산측이 반발로 미군포로를 돌려주지 않을 위험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이승만의 자유행동을 방치하면 안되는 상황이다.
    유엔사령관 클라크는 우선 모든 포로수용소 경비 강화령을 내리고 한국군 경비병을 미군으로
    교체하는 한편, 미군 2사단에게는 비상사태에 대비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것은 준비된 Ever-Ready Plan(이승만 제거작전)을 명령만 내리면 실행하겠다는 태세를
    워싱턴에 알리고, 이승만에게는 “꼼짝 말라”고 경고장을 보내는 강력한 무력시위이다. 
    여차하면 유엔군이 계엄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연금한다는 .작전은 이승만도 알고 있다.

  • 반공포로 석방후 이승만의 특별담화 "내 책임하에 명령했다"ⓒ조선DB
    ▲ 반공포로 석방후 이승만의 특별담화 "내 책임하에 명령했다"ⓒ조선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