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심도 불운도 게임의 일부장수가 칼을 직접 뽑았다면 이미 진 상황
  • 승복할 줄 모르는 민족은 단합할 줄도 모른다

    올림픽과 대선 후보 경선레이스 관전


    단군신화에 곰과 호랑이가 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누가 오래 견뎌 인간이 될 것이냐를 두고 내기를 한 적이 있다. 당연히 호랑이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왜냐하면 곰은 잡식성이고 호랑이는 육식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 어처구니없는 설화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세상에 완전하게 공평한 룰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한 교훈이 아닐까? 불공평을 탓하자면 재벌집 선남선녀나 사돈의 팔촌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부터 원망해야 할 테니 말이다.
     
    오심도 불운도 게임의 일부

     

  • 유달리 한국선수들이 오심에 멍든 올림픽이다. 허나 어쩌랴. 심판의 오심 가능성조차 인정하고 게임에 참여한 것을! 펜싱에서 신아람 선수가 마지막 1초의 오심 때문에 졌다 하여 온 국민이 이 더위에 열불을 냈지만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어떤 종목이든 경기에 임할 때에는 심판의 오심조차도 따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평소에 갖춰졌어야 했다. 따지고 보자면 주심의 잘못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현장 교통순경의 수신호가 신호등에 우선한다. 시계보다는 주심의 지시를 더 중시하였어야 했다는 말이다. 1초가 아니라 1분이었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억울해도 선수(무사)는 울어서도 퍼질러 앉아서도 안 된다. 이왕지사 “기계는 고장날 수도 있고, 사람인 이상 실수가 있게 마련”이라며 대범하게 툭툭 털고 나왔더라면 본인은 물론 국가의 품격까지도 업그레이드시켜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만 냥을 벌기도 한다. 그랬었다면 전 세계인들이 오심(사건)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신아람이란 한 인격체에 주목했을 것이다. 동정이 아니라 존경을 보냈을 것이다. 돌발적인 상황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평소 교육이 되어 있어야 한다. 순발력은 동작에만 중요한 게 아니다. 사고의 순발력은 더 중요하다.
     
    져주기로 게임 몰수당하고 쫓겨나오는 수치스런 사건 하나에 한국이 딴 모든 메달의 빛이 바래 버렸다. 스포츠맨십, 올림픽 정신을 말하기 전에 먼저 돈 내고 들어온 관중에 대한 배신이다. 청춘들의 꿈을 그렇게 망치게 만든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이제 대한민국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많이 따오는 것이 중요한 시대도 지났다. 스포츠에서 메달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 더한 감동이 있다. 하여 때로는 동메달이 금메달보다 더 값질 수도 있고, 승자보다 패자가 더 멋진 감동을 선사할 수도 있다. 이기는 법도 배워야 하지만 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메달에 상관없이 어떻게 경기에 임하느냐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우연과 필연, 실수와 행운이 교차하며 4년마다 되풀이되는 그 속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찾는다. 경기에 참가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지어 꼴찌에게도 인생 역전시킬 행운의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그게 올림픽이다. 평소 운동하는 틈틈이 선수는 물론 감독과 코치들에 대한 인문학 교양강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머쥘 수 있다. 그래야 같은 메달도 더 빛나게, 즉 부가가치를 높일 수가 있다. 히딩크 감독이 실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에겐 남다른 품격이 있다. 하여 항상 연봉 이상의 것을 챙긴다.
     
    장수가 직접 칼을 뽑았다면 이미 진 것
     
    전쟁에 나가는 최고의 지휘관에게는 당연히 그 지위에 해당하는 멋진 검(劍) 한 자루가 하사되게 마련이다. 장수의 상징이기도 한 그 칼은 매우 화려하고 크다. 옛 그림에 보면 항상 병졸이 둘러메고 따라다닌다. 현재 전국 박물관에 남아 있는 멀쩡한 칼들은 대부분 이 칼들이다.
     
    우리나라 엉터리 영화나 사극에서는 절대무공을 자랑하는 장수(주인공)가 언제나 진두에서 지휘하고, 직접 칼을 빼어들고 적들을 도륙하는 장면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데, 실제 전쟁에서는 이런 조폭들의 싸움 같은 품격 떨어지는 장면이 없다. 지휘관은 각자의 지위에 따라 진의 뒤쪽에 위치해서 병사들을 독려하게 마련이다. 특히 최고 지휘관은 언제나 진의 맨 뒤 높은 곳에 자리잡는다. 그런 좋은 언덕을 먼저 차지하는 것이 승패의 우선 관건이었다. 당연히 칼은 고사하고 그 어떤 무기도 들고 싸우는 일이 없다. 가장 안전한 곳에서 전장을 살피며 전투를 지휘하기 때문이다.
     
    적의 화살이 날아올 정도의 거리에서라면 무슨 정신으로 작전을 짜고 군사를 지휘하겠는가. 장수가 직접 칼을 뽑아 적을 베야 할 정도면 이미 끝난 전투로서 죽은 목숨이니 그 칼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박물관에 남아 있을 리 없다 하겠다. 그러니 직접 피를 묻힌 칼들은 대부분 부러지거나 이빨이 빠져 다시 대장간으로 보내졌다고 보면 된다.
     
    볼수록 화만 돋우는 게임

     
    하니 마니 하다가, 억지로 진행되던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공천헌금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차마 정쟁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치졸한 싸움. 허구한 날 부정, 부패, 고발, 배신, 욕설, 핏대, 트집잡이로 날 새우는 나라, 뭐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사건 하나를 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판을 엎었다 뒤집었다, 헌 갓장이 티 뜯듯 하고 있다. 기껏 어물전 열어 놓고 꼴뚜기 장사하고 있으니 본전 날리고 망신살만 뻗치고 있다.
     
    어차피 본 게임도 아닐 것 같은 민주통합당 역시 올림픽에 가려 김빠진 일정 채우느라 더운 날에 진만 빼고 있다. 고작 백신 하나 개발해서 수만 배로 부풀려 구국의 만병통치약인 양 떠드는 솜사탕장수만 때 아닌 대목을 맞고 있다. 이 땡볕에 뭣 하러 지지고 볶고 쫓아다닌담? 어차피 불임정당, 언제 먹어도 안서방이 먹을 건데. 주식 올라 돈 벌고, 책 팔아 돈 벌고. 장외 그늘에 누워 영화나 보면서 공부하는 척, 배실배실 웃으며 시치미 떼고 새치기할 기회만 엿보고 있다. 재주는 곰이 부리는데 왕서방 아닌 안서방 주가만 올라가고 있으니 왕코미디다. 이번 올림픽에서 게임 몰수당한 져주기 배드민턴 경기만큼이나 재미없다.
     
    승복할 줄 모르는 국민은 단합할 줄도 모른다
     
    문(文)의 나라 특징은 승복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승복하는 그 순간부터 되레 원수가 된다. 조선 사대부 문인들이 그랬다. 굴복은 잘하면서 승복은 못한다. 선비는 왕한테 우겨도 죽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귀양이다. 죽이지 않으니 끝까지 우길밖에. 힘없는 선비 죽였다간 나중에 폭군 혹은 쪼잔한 임금이었다는 소리 듣기 때문이다. 선비는 귀양 보내도 달리 뒤탈이 없다. 혹여 사약(賜藥)이라도 내려올까 열심히 사모곡 향임시(向任詩)를 지어 바치면 그때 풀어주거나 불러주면 된다.
     
    간혹 왕에게 우기다 죽임을 당하기라도 하면 나중에 충절로서 가문의 영광이 된다. 하여 끝까지 우기는 것이 선비의 절개인 양 받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선비 정신에는 지고는 못 사는 근성이 배어 있다. 당연히 지고도 졌다 하지 않고 끝까지 우겨야 한다. 결국 낯가죽 두껍고 질긴 놈이 이긴다. 하여 일상에서 염치 차리는 것조차 어느덧 체면 깎이는 일로 치부된다.
     
    조선 시대 내내 귀양 간 문신(文臣)은 부지기수지만, 귀양 간 무신(武臣)은 없다. 왕의 마음에 안 드는 무장은 승복을 하든 안하든 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귀양 보냈다간 그곳에서 난을 일으킬 게 뻔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가 딱 한번 있는데 바로 백의종군했던 ‘바보 이순신’이다. 다행히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남이 장군과 임경업 장군처럼 모반죄로 능지처참을 당했을 것이다. 그게 조선의 전통이었다. 그게 조선을 나약하게 만든 원인이다.
     
    장수의 칼은 적을 베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망하는 것은 적이 강해서라기보다 내부 분열 때문이었음은 역사가 수없이 증명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권 교체가 어느 야당이 잘해서라기보다 언제나 집권당이 스스로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원수가 따로 있으랴.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의 적이다. 토사구팽? 팽(烹)은 사냥 후에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도 개 나름. 훈련이 안 되어 사냥에 방해되는 몹쓸 개들부터 먼저 삶았다. 기권이든 불참이든 패배다. 이번 대선 후보 경선 포기해 놓고 뒤에서 궁시렁대거나, 경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자들은 무조건 팽(烹)해야 할 것이다.
     
    장수의 칼은 전장에 나가 직접 적을 베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군을 벨 때 사용하라는 칼이다. 즉 지휘용이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거나, 배신하거나, 거짓 보고를 올리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무기를 빼돌리거나, 군량미를 착복하거나, 겁먹고 도망가는 자를 베는 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수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없을 때 자신을 찌르라고 주는 칼이기도 하다. 적을 베는 칼이 아니라 부하와 자신을 다스리는 칼이다. 유능한 지도자라면 그 칼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선비의 품격, 신사의 품격
     
    그때그때마다 바꾸면 그건 룰이 아니다. 불리해도 지켜야 하는 것이 룰이다. 억울하게 진 게임 없다. 아무튼 졌으니까 진 거다. 어떻게 졌던 무조건 승복하는 것이 무(武)의 정신이다. 승복하고 단합하기 위해 게임을 하는 거다. 우기기 잘하는 민족이 실은 가장 비겁한 민족이다. 떼지어 우기는 것은 단합이 아니다. 유리하면 뭉치고 불리하면 흩어지는 사람을 지사(志士)라 하지 않는다. 모리배(謀利輩)라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고집을 가장한 비겁한 선비 나라가 아닌 당당하고 멋진 선비 나라가 되어야 한다. 우리도 신사의 나라가 되어 보자는 말이다. 올림픽을 금메달로만 즐기지 말고 품격, 즉 국격을 겨루는 장으로 봐야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눈치나 술수로 몇 단이니 하지 말고 품격으로 승부해야 한다.
     

  • 승자든 패자든 올림픽에 나가 싸우고 돌아오는 모든 선수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자. 올림픽에 참가한 것만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비록 메달은 못 땄다 하더라도 모든 선수의 연고지마다 “잘 싸우고 돌아왔다!”는 환영현수막이 내걸려야 한다. 스포츠맨십은 선수에게만 요구하는 덕목이 아니다. 구경하고 응원하며 환희를 즐긴 국민들부터 품격이 우러나야 한다.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운 자만 우대하고 죽거나 다친 용사들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영광이든 슬픔이든 함께 나눌 수 있어야 그게 마을공동체고 국가공동체가 아니겠는가? 기실 고대 올림픽도 지중해 연안에 산재해 건설된 그리스 연방 수많은 도시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만든 축제였으니 말이다.
     
    참고로 한국인들은 박수를 턱 아래에서 치는 바람에 마지못해 치는 줄 오해받는 일이 많다. 간이 약한 사람, 소심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이 그렇게 친다. 박수라고 해서 다 같은 박수가 아니다. 소리만 요란하다고 박수가 아니다. 저 좋아라 하고 치는 박수도 있지만 환영과 감사, 격려로 보내는 박수가 대부분이다. 글로벌매너에선 머리 위로 들어올려서 치는 것이 정격(正格)이다. 기립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치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 관리도 되고 심신도 건강해진다. 무엇보다 그 순간 축제 분위기가 두 배로 업(up)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