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인철씨 충격 증언 "50년 전북인사 5백여명, 인민군이 때려 죽여"
  • ▲ 2014년 9월 26일 전북 전주 효자공원에서 역사적인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추모 행사는 지난 1950년 9월 26일 전주형무소에서 패퇴하던 좌익 세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500여 전북 우익 인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 뉴데일리
    ▲ 2014년 9월 26일 전북 전주 효자공원에서 역사적인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추모 행사는 지난 1950년 9월 26일 전주형무소에서 패퇴하던 좌익 세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500여 전북 우익 인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 뉴데일리



    2005년 12월 1일 발족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일제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있었던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사건 중에서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상을 밝히는데 주력해 왔다. 특히 과거사위는 6.25 전쟁 당시 있었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고 2006년부터 4년 동안 전국 13곳에 대한 발굴 작업을 통해 1,617여 구의 유해와 6,020여 점의 유품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사건의 대부분은 한미 연합군이나 국군 헌병대, 경찰이 연루된 '미제사건'들이었다. 이를테면 무고한 양민들이 보도연맹원이나 좌익분자로 몰려 경찰 등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내용들이다.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비극적인 전쟁이 발생하면서 '양측 모두' 억울한 희생이 뒤따랐다. 전쟁 중은 물론, 전쟁 후에도 지독한 후유증으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고 가정이 파탄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과거사위가 소명하려는 사건에는 하나같이 '좌익세력'이 피해자로 등장하고 있다. 발표 내용만 보면 한미 양군과 경찰은 반민주적ㆍ반인권적 행위를 저지른 잔혹한 반동분자(反動分子)들이다. 이같은 과거사위의 진실(?) 규명 노력과, 각종 영화에서 미화되는 북한 인민군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남한을 침략한 북한군이 마치 억울한 피해자처럼 비쳐지는 심각한 착시(錯視)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지난 9월 26일 전라북도 전주의 작은 공원에서 64년 만의 진혼곡이 울려 퍼졌다. 9.28수복 직전, 도망치던 북한 인민군이 전북 우익인사 수백명을 삽과 곡괭이 등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상기하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단발마의 비명으로 수많은 인사가 영문도 모른채 생을 마감했지만 그 누구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던 사건이었다. 오래 전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며 내려온 북한 인민군은 본인들의 '원활한 도주'를 위해 5백여명을 때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유가족이 부지기수. 그러나 남아 있는 유가족 중 '억울하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은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지금도 '좌익분자'로 낙인찍혀 죽음을 당한 이들의 가족들은 '진상 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건만, 반대로 인민군에게 도륙당한 이들의 가족들은 60년째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우익인사가 좌익에게 죽음을 당한 게 부끄러운 일인가? 이날 추모식에 나타난 유가족은 여전히 숨을 죽인 채,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조용히' 고인의 넋을 달래는 모습을 보였다.

  • ▲ 향토사학자 이인철씨. '전주형무소 학살희생 애국인사 추모식'을 기획한 장본인이다.   ⓒ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향토사학자 이인철씨. '전주형무소 학살희생 애국인사 추모식'을 기획한 장본인이다. ⓒ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이날 추모식을 진두지휘한 향토사학자 이인철(85)씨는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잔학한 사건인데, 이장 이후 64년에 이르는 오늘까지 제대로 된 추모식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유족들조차 전주형무소에서의 죽음에 관한 사실을 침묵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잊혀진 사건으로 치부돼 왔다"고 개탄했다.

    '전주형무소(舊 전주교화소) 학살 사건'은 한미연합군이 서울 탈환을 앞둔 1950년 9월 26일 자정 무렵부터 27일 이틀간 북한군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우익 인사 1,000여명 가운데 500여명을 곡괭이와 삽 등으로 학살한 사건을 일컫는다.

    희생자들은 1950년 7월 20일 전라북도 지역을 침공한 북한군이 지역의 추종 세력을 동원, '반동분자'로 규정해 전주형무소에 가둔 우익 인사들로, 대한민국 건국 초기 지도자급 인사인 손주탁 반민특위위원장과 오기열, 류준상 초대 제헌국회의원을 비롯해 이철승 건국학련위원장(前 국회 부의장)의 부친 등이 포함됐다.

    당시 학살당한 인사 중 300여명의 시신은 가족 등에 의해 수습됐으나 나머지 175구는 합동 매장됐다 1955년 전주시 효자공원 묘지에 이장, 안치됐다.

  • ▲ 시신 175구가 함께 묻힌 애국지사 묘역. 왼쪽에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진 묘비가 서 있다.   ⓒ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시신 175구가 함께 묻힌 애국지사 묘역. 왼쪽에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진 묘비가 서 있다. ⓒ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이인철씨는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서 좌익 세력에 의해 우익 인사들이 대거 숙청됐다는 사실을 쉬쉬하고 있는 이유는 반세기 동안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들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지역 정서상으로는 북한에 대한 반감이나 원한이 뼛속 깊이 사무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이 지역에선 그런 게 전혀 형성이 안돼 있습니다. 당시 인민군은 철수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조만간 반드시 다시오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1.4 후퇴 때 정말로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전부 숨어 버린 겁니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나 할까요? 상상을 초월한 공포심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거죠.


    이인철씨는 "6.25 당시 북한군의 많은 병력이 남쪽으로 내려 온 것은 식량 조달 때문"이라면서 "곡창지대라는 점 외에도 이곳 '민성(民性)'이 좋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환경적으로 북한 인민군이 모여들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던 까닭에, 소위 '빨갱이'들의 출몰이 해당 지역에서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곡창지대라는 점 외에도 이곳 민성이 좋다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백제문화권이라 민심이 점잖고 부드러운 편이거든요. 그런데 미군이 인천으로 들어온 겁니다. 이들은 대전을 방어하기 시작했죠. 남쪽에 있는 북한군이 오대산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거죠. 미군과 연합군이 합심해서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타고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서니, 자연히 빨치산이 만들어졌습니다. 오갈데가 없으니까 죄다 지리산으로 모여든 거죠. 


    이인철씨는 "전라북도가 제일 마지막까지 공비토벌작전이 이뤄진 지역"이라며 "53년까지 계엄령이 선포됐었고 지리산 공비토벌이 진행됐었다"는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했다. 오늘날까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작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과거 좌익 세력의 본거지로 사용됐었다는 서글픈 역사 때문이라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 ▲ 추모식에 참석한 인사들이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추모식에 참석한 인사들이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이인철씨는 "이같은 지역 정서 외에도 전주형무소에서 있었던 참극이 주목 받지 못했던 이유는 역사적인 검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마저 특정하기 힘들 정도로 빈약한 자료들이, 자꾸만 이 사건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과 관련해선, 뒤늦게 진실을 규명하고 싶어도 정확한 '명부'가 없다는 게 한계였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여기에서 죽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단 말이죠. 그냥 죽었다는 말뿐이에요. 심지어 때려죽인 사람도 없어요. 사회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것들이 다 없어진 거죠. 그리고 전쟁 난리통에 가족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져 각종 기록과 증언들이 일치가 안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십대 초반, 경찰에 지원하며 우연한 기회에 '전주형무소 학살사건'을 목도한 이인철씨는 전쟁이 끝난 이후 이 사건의 실체를 파헤쳐보기로 마음 먹었다. 혈혈단신 진상 조사에 나선 이인철씨. 그러나 문건은 커녕, 마땅한 증언조차 나오지 않는 사건을 재조명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조사가 답보 상태를 거듭할 무렵, 이씨는 미육군전쟁범죄조사단(KWC)의 사건 기록서를 접하면서 큰 전기를 맞게 된다.

    그러던 차 아주 귀중한 정보를 입수하게 됐죠. 미육군전쟁범죄조사단(KWC)의 사건 기록서를 접하게 된 겁니다. 전주에 있는 우익인사 중에 전주형무소에서 희생을 당한 후손들이 계신데요. 이 중 일곱 분이 몇년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청원을 냈습니다. 그동안 우익이 좌익을 죽인 사건들은 죄다 파헤치면서 왜 좌익이 우익을 죽인 사실은 조사하지 않느냐는 게 청원의 골자였죠. 당시 위원회는 KWC의 기록과 '6·25사변 피살자명부' 등을 참고 자료로 살펴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과거사위에서 집계·조사한 보고서를 읽어봤다는 이씨는 "훑어보니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아주 많이 일치했다"며 "이로써 진실에 한발짝 더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밝혔다.

    26일 전에는 수용자들 중 일부를 석방했습니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 1백여명 정도가 기적적으로 풀려났다고 해요. 신의 조화지요. 그런데 26일 딱 중단을 시킨 거죠. 작전상 내보내지말라는 명령이 전해졌고 그때부터 붙잡은 사람들을 죽인 겁니다. 인민군은 26일부터 한 사람씩 호명해 무참히 살해를 하기 시작해 27일 오전까지 만행을 저지르다가 급히 도망을 치게 되죠. 미군은 28일 늦게 전주에 들어옵니다. KWC도 이때부터 기록을 수집한 거구요. 29~30일 미군이 촬영한 현장 사진들은 다 저에게 있습니다. 


  • ▲ 추모행사에 참여한 군악대 사이로 '우익인사 학살 현장'을 찍은 사진들이 보인다.   ⓒ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추모행사에 참여한 군악대 사이로 '우익인사 학살 현장'을 찍은 사진들이 보인다. ⓒ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이씨는 "애당초 전주형무소에 주둔한 인민군 102경비연대에 내려온 지시는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데려가라'는 지시였다"며 "사지육신이 멀쩡한 사람은 함께 데려가라는게 상부 지시였지만 당시 인민군은 아무 죄없는 우익 인사 다수를 살해하고 도주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1950년 9월 20일 전주형무소에 주둔한 인민군 102경비연대에 내려온 지시는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데려가라"는 지시였습니다. 놔주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이때 명령을 받은 부대 사람들은 고민을 했겠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으니 올라갈 길은 막혔고, 이런 상황에 명령을 따르자니 심히 부담이 되고. 따를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저들을 데리고는 못갈 것이라 판단하고 죽이기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학살당한 사람들이 돌발적으로 많아진 게 아닌가 싶어요. 본인들도 도망은 가야겠고, 처리할 방법은 없으니..


    이씨는 "참사 당일 옆에 있던 동료의 기지로 죽음을 모면한 분이 계시는가하면, 때마침 가족이 면회를 와 살아난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어떤 분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인민군 소리에 "그 사람 아까 나갔어요"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민군이 "누이 동생이 와서 오빠를 찾고 있는데.."하고 안타까워하자 그제서야 "사실 제가 그 사람입니다"하고 이실직고를 하고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이 중에는 나갔다가 죽음을 당한 분도 계시고, 용케 살아난 분도 계십니다. 진짜로 가족이 찾아왔던거죠. 어떤 사람은 자기를 부르는 인민군 소리에 '예'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옆에 사람이 주먹으로 얼굴을 냅다치는 바람에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싸움을 벌였는데요.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불려 나갔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람은 나가면 죽으니 대답하지 말라는 뜻으로 얼굴을 후려친 거죠. 


    이씨는 "이번 추모식을 계기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유족들의 신분 회복을 위한 사업을 벌일 것"이라면서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희생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사업도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오는 12월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의 실체를 알리는 포럼을 전주에서 개최할 것"이라며 "이 자리에서 숨진 우익 인사들의 명단은 물론 그동안 모아왔던 각종 자료 일체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이인철씨와의 일문일답 전문

  • ▲ 향토사학자 이인철씨.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향토사학자 이인철씨.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이 사건을 제일 처음 인지하신 게 언제입니까?

    ▲ 1950년 9월 29일 처음으로 인지했습니다. 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죠.

    - 실례지만 당시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요?

    ▲ 22살때입니다.

    - 우연히 그 사건을 목격하게 되신 건가요?

    ▲ 전 이북사람입니다. 조금 설명해드릴까요? 6.25때 저는 젊은 나이에 남쪽 대구에서 '진주(進駐)경찰'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모했습니다. '진주'라함은 군대나 경찰이 쳐들어간 뒤 현지(북한)에 주둔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래서 북한에 올라가는 경찰을 따로 '진주경찰'이라 불렀습니다. 저도 당연히 진주를 하려고 원서를 냈죠. 당시 경찰은 군인과 똑같은 전투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합격한 이후 진주가 중단됐고, 응모했던 전원은 전국 각 경찰서에 배당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전라북도 경찰국으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훈련소는 마산에 있었는데요. 훈련을 마치자 곧바로 선발대에 선발됐습니다. 당시 대학물을 먹은 제가 영어를 한 두 마디라도 할지모르니 미국들과 함께 움직이는 선발대에 뽑힌 거죠. 그때 제 주변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이 엠 어 폴리스맨" 이게 제가 아는 영어의 전부였는데요. 당시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제 팔뚝에 박힌 경찰 마크를 가리키며 "아이 엠 어 폴리스맨"이라고 재차 강조하자 미군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를 받아줬습니다. 그렇게 손짓발짓해가며 차를 타고 전라북도 전주로 향했죠.

    그때가 29일 밤이었는데요. 수백명이 밥을 먹으며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전주경찰서로 배치됐는데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게 바로 그때였죠. 전주형무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을 본 겁니다. 제가 직접 본 것도 있고, 주변인들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어 누구보다도 실상을 잘 알게 됐죠. 그 이후 이 사건의 진상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 당시 전주형무소에서 몇명이 죽었나요?

    ▲ 공식적으로 몇명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전혀 파악이 안된 상태였습니다. 사건의 실체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선, 집단적인 학살이 일어난 후 왜 유가족이 변변한 추모식조차 갖질 않는지 참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향토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됐죠. 40여년 전 발생했던 사건을 관찰하고 들여다보니 '사건의 본질'이 아주 깊은 구렁에 빠져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알고 있는 그 사건이, 어떤 문헌에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고, 정확한 사실조차 파악이 안됐습니다.

    그러던 차 아주 귀중한 정보를 입수하게 됐죠. 미육군전쟁범죄조사단(KWC)의 사건 기록서를 접하게 된 겁니다. 전주에 있는 우익인사 중에 전주형무소에서 희생을 당한 후손들이 계신데요. 이 중 일곱 분이 몇년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청원을 냈습니다. 그동안 우익이 좌익을 죽인 사건들은 죄다 파헤치면서 왜 좌익이 우익을 죽인 사실은 조사하지 않느냐는 게 청원의 골자였죠. 그래서 약 7개월간 현장조사가 이뤄졌습니다. 이때 위원회에서 집계·조사한 보고서를 저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훑어보니 제가 알고 있는 내용과 아주 많이 일치했습니다. 당시 위원회는 KWC의 기록과 '6·25사변 피살자명부' 등을 참고 자료로 살펴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9월 26일 열린 추모식에서 군악대가 고인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곡을 연주하고 있다.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9월 26일 열린 추모식에서 군악대가 고인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곡을 연주하고 있다.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했다면 전주형무소에서 있었던 끔찍한 참변이 진작에 알려졌을 텐데요. 왜 이런 사실이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던 걸까요?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긴 배경은 과거에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바로 알리자는 취지로 시작됐는데요. 사실은 '제주 4.3사건'을 전제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것을 합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탄생한거죠. 제가 알기론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동양에서 제일 큰 학살 사건입니다. 전쟁 통에 총으로 쏴서 죽인 전례는 많지만 망치나 곡괭이, 삽, 낫으로 민간인을 일일이 때려 죽인 사건은 매우 드물죠. 어느 문헌을 봐도 이런 사건은 없습니다. 시신을 보면 대부분 머리가 부서진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 물어보셨죠? 왜 아직까지 이 사건이 수면 아래에 숨어 있는가? 우가 좌를 죽인 게 아니라, 좌가 우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조사를 했으면 결과물이 나와야하겠죠? 위원회는 조사 보고서를 청원자들에게 회신했습니다. 이게 끝이에요. 해당 문건을 보면 '이렇다고 하더라', '이랬다고 한다', '저렇게 보이더라' 등등 확신하고 확정하는 말이 단 한 군데도 없어요. 단순히 '이랬더라' '저랬더라'라는 말만 나와요. 다만 말미에 "이것은 더 깊이 학문적으로 연구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애매한 문구만 들어 있어요. 학술적으로 피해나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도 이 사건의 진상을 제도적, 학문적으로 밝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당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가 끝난 뒤 제가 진상조사를 청원했던 7명 중 한 분을 정중히 모신 적이 있어요. 조사 결과(보고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여쭤봤죠. 그랬더니 "나쁜 놈들, 대한민국을 다 때려 부숴야 한다. 이런 나쁜 놈들.." 하고 분을 참지 못하시더라고요. 원래 이분이 좌익 성향이었는데 이 일로 완전히 우익으로 돌아섰어요. 이 분의 아버지가 제헌국회의원이신데 전주형무소에서 돌아가셨죠.

    - 이 사건에 대해선 그야말로 혈혈단신 외롭게 조사를 해오셨잖아요? 솔직히 선생님 편에 서 있는 사람도 전무하고, 환경적으로 굉장히 어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 애국에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뭘 따질 게 있겠습니까? 어버이께 효를 하는 데에도 조건을 따집니까? 아버지가 해준 게 없으면 효를 안하나요? 이건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즐겁게 안해준다고 국가가 아닌가요? 애국이나 사랑에는 조건을 달면 안됩니다. 단서를 붙이면 안돼요. 애향에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나를 훌륭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고 고향이 아닌 게 아니잖아요? 고향은 고향입니다. 사랑을 해야죠. 어느 때부턴가 저는 나라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우군도 없는 사람이, 여기 사람도 아닌 외지에서 건너 온 사람이 이런 것을 얘기했을때 자극이 될 수 있을거라 믿었어요. 애국의 광적인 충성심에서 이 일에 손을 대게 됐습니다.

    - 조사하시면서 특히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 고인들이 묻힌 묘소를 방문한 분들을 제가 다 압니다. 60여년간 다녀가신 분들의 명단을 다 파악했죠. 조사 차원에서 몇날 몇시에 누가 와서 언제 돌아갔더라라는 세부적인 내용까지 다 파악을 했습니다. 하루는 유족 중 한 분게 전화를 드린 적이 있는데요.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야 이 자식아! 네가 뭔데 그걸 손대? 니가 우리 아버지를 알어?"라고 소리를 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입니다. 욕은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자, "나이를 쳐먹었던 안 먹었던 왜 생뚱맞게 이제와서 난리야"하고 전화를 끊은 적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당신, 이런 거하면 어디에서 돈 나오는 거 아니냐"고 묻는 분도 계셨어요. '우리 이름 함부로 팔지 말라'는 얘기들이 많았죠.

    전주에 있는 학자들이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제가 이런 조사를 하고 다닌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그 양반 왜 그거 하신데?" "어떻게 하려고 손을 대셨대?" "어떻게 결론을 맺으시려고 그러지?" 같은 얘기들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굴욕과 시기, 학대 등을 당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이기지 않고선 진실을 알릴 방도가 없었어요. 진실로 애국이 뭔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단언컨대 이 일을 빌미로 지난 50년간 단 십원 한 장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다, 제 자비로 움직이는 겁니다.

  • ▲ 전주 효자공원에 있는 애국지사 묘역.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전주 효자공원에 있는 애국지사 묘역.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연구와 조사를 계속 하시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기감'도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 오랫동안 이 연구를 지상으로 가져와 하지 않았어요. 전부 지하에서 움직였죠. 한 번은 야당에서 제가 이런 조사를 하는 줄도 모르고 전주 역사에 대한 특강을 부탁한 적도 있어요. 제가 전주형무소 연구를 하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런 부탁도 오지 않았겠죠. 나름 극비 보안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정권까지 이어오게 된 거죠.

    - 그래도 선생님 연구에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시다면?

    ▲ 전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요. 이 연구를 안좋은 일에 활용할까봐 함부로 얘기할 수 없었죠. 단, 역사학자 한 분만 제가 연구한 대부분의 내용들을 알고 계세요.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 전까지 관련 내역을 공개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 역사적으로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지나고 있을까요?

    ▲ 당시 대구와 부산 빼고는 전부 북한군에 점령당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이런 (좌익에 의한)집단 학살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질 못했습니다. 사실 혼돈스러운 게 뭐냐면 6.25 발발 후 약 3~4개월 동안에 우익이 좌익을 죽인 일도 있었고 좌익이 우익을 죽인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아주 혼탁스러운 상황이죠. 전쟁통에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소상히 파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닙니까.

    6.25 당시 북한군의 많은 병력이 남쪽으로 내려 온 것은 식량 조달 때문입니다. 곡창지대라는 점 외에도 이곳 민성이 좋다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백제문화권이라 민심이 점잖고 부드러운 편이거든요. 그래서 마산 앞까지 왔는데 미군이 인천으로 들어온 겁니다. 이들은 대전을 방어하기 시작했죠. 남쪽에 있는 북한군이 오대산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거죠. 미군과 연합군이 합심해서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타고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서니, 자연히 빨치산이 만들어졌습니다. 오갈데가 없으니까 죄다 지리산으로 모여든 거죠. 그런 조건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산으로 데려가기 힘드니 잡았던 반대 세력들을 싹 다 죽여버린 겁니다.

    - 당시 교화소에 있었던 사람들을 포로라는 개념으로 봐야 할까요?

    ▲ 인민군 점령 하에서 봤을 때에는 반국가 행동을 저지른 자들입니다. 포로가 아닌, 역적인 셈이지요. 포로로 봤다면 마땅히 포로 대접을 했겠지요. 인민군이 보기엔 도살의 조건을 갖춘 역적일 뿐입니다. 당시 조선인민군은 국제적인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죽이고 살리는 것밖에는 없었죠. 미군이 몰려오는 극한의 상황에서 '네가 빨리 죽어야 내가 산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만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절대로 이해 못하는 상황이죠.

  • ▲ 유족으로 추정되는 인사가 나와 조의를 표하는 모습.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유족으로 추정되는 인사가 나와 조의를 표하는 모습.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5백여명을 한명씩 때려 죽였다는 게 사실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척살 과정을 좀 상세히 설명해 주실까요?

    ▲ 당시 있었던 일은 구술로 정리가 돼 있습니다. KWC 기록에 의하면 총 여섯군데에서 도륙이 이뤄졌는데요. 형무소 말고도 여러 군데에서 학살이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벽돌공장이나 화장장(사형장) 옆에 구덩이 를 파고 시신을 묻었죠. 당시 형무소 밖에 30~40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었는데요. 한 사람씩 밖으로 나오는대로 곡괭이나 삽으로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장소에 묻었습니다. 총으로 죽인 적이 없어요. 형무소 안에서 듣지 못하도록,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죽이는 방법을 택한 거죠. 수용자들이 동요할까봐. 말없이 끌려나간 이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 5백여명이라면 굉장히 많은 숫자인데..딸린 가족들도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한 집 건너 한 집에서 사람이 죽은 꼴인데, 지역 정서상으로 북한에 대한 반감이나 원한이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았을까요?

    ▲ 당연한 상식이지만, 이 지역에선 그런 게 전혀 형성이 안돼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때에는 '빨갱이한테 우리 아버지가 맞아 죽었다'는 말을 감히 못 꺼내는 겁니다. 왜냐? 내가 빨리 숨어야 하거든. 인민군이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당시 인민군이 철수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조만간 반드시 다시오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1.4 후퇴 때 정말로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전부 숨어 버린 겁니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나 할까요? 상상을 초월한 공포심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거죠. 지난번 추모식 때에도 여러 유가족을 초청했는데 상당수가 안나오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표면화하기 싫은거죠. 돌아가신 고인을 위해 떳떳하게 위령을 하는 자리인데도 말입니다. 이제와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자식된 입장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구태여 지금 나가 이러쿵저러쿵 구설에 휘말리기 싫을 수도 있겠죠.

    - 당시엔 그런 공포감이 이해는 갑니다. 북한군이 또 언제 다시 내려올지 모르니. 움추러드는 것도 당연하죠. 그런데 전쟁이 종료되고, 계엄령도 풀리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는 이런 사실을 말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왜 아직까지도 쉬쉬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는건지 이해가 안갑니다.

    ▲ 전라북도가 제일 마지막까지 공비토벌작전이 이뤄진 지역입니다. 53년까지 계엄령이 선포됐었고 지리산 공비토벌이 진행됐죠. 남쪽에 내려왔다 도망갈 곳이 없어진 북한군 상당수가 산으로 숨어 들어갔고, 그러면서 별도의 집단이 형성됐던 거죠. 그래서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또한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과 관련해선, 뒤늦게 진실을 규명하고 싶어도 정확한 '명부'가 없다는 게 한계였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여기에서 죽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단 말이죠. 그냥 죽었다는 말뿐이에요. 심지어 때려죽인 사람도 없어요. 사회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것들이 다 없어진 거죠. 그리고 전쟁 난리통에 가족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져 각종 기록과 증언들이 일치가 안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번에 추모 행사를 하면서 아는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형님 우리 아버지 얘기 알어? 우리 아버지도 예전에 이렇게 돌아가셨거든" 그동안 이런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터라 깜짝 놀랐죠. 이를 테면 이런 일들이 어려 건 있습니다. 근거가 마련되니까 뒤늦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나서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거죠.

  • ▲ 유족으로 추정되는 노부부가 나와 조의를 표하는 모습.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유족으로 추정되는 노부부가 나와 조의를 표하는 모습.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그 안에서 피눈물 나는 사연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 총 4분이 이런 경우인데요. 모 언론사 책임자로 계시는 분의 아버님도 추석날 우익인사로 잡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이 분들로부터 기가막힌 증언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당시 형무소에 갇힌 사람들을 인민군이 하나둘 불러내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나간 사람들이 도통 돌아오지 않으니 십중팔구 죽었겠구나하고 생각한거죠. 그래서 어떤 분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인민군 소리에 "그 사람 아까 나갔어요"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민군이 "누이 동생이 와서 오빠를 찾고 있는데.."하고 안타까워하자 그제서야 "사실 제가 그 사람입니다"하고 이실직고를 하고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이 중에는 나갔다가 죽음을 당한 분도 계시고, 용케 살아난 분도 계십니다. 진짜로 가족이 찾아왔던거죠. 어떤 사람은 자기를 부르는 인민군 소리에 '예'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옆에 사람이 주먹으로 얼굴을 냅다치는 바람에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싸움을 벌였는데요.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불려 나갔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람은 나가면 죽으니 대답하지 말라는 뜻으로 얼굴을 후려친 거죠.

    - 당시 점령군에게 어떤 명령이 내려왔나요? 건장한 사람은 데려가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죽이라는 내용이었나요?

    ▲ 1950년 9월 20일 전주형무소에 주둔한 인민군 102경비연대에 내려온 지시는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데려가라"는 지시였습니다. 놔주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이때 명령을 받은 부대 사람들은 고민을 했겠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으니 올라갈 길은 막혔고, 이런 상황에 명령을 따르자니 심히 부담이 되고. 따를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저들을 데리고는 못갈 것이라 판단하고 죽이기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학살당한 사람들이 돌발적으로 많아진 게 아닌가 싶어요. 본인들도 도망은 가야겠고, 처리할 방법은 없으니..

    26일 전에는 수용자들 중 일부를 석방했습니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 1백여명 정도가 기적적으로 풀려났다고 해요. 신의 조화지요. 그런데 26일 딱 중단을 시킨 거죠. 작전상 내보내지말라는 명령이 전해졌고 그때부터 붙잡은 사람들을 죽인 겁니다. 26일부터 한 사람씩 호명해 무참히 살해를 하기 시작해 27일 오전까지 만행을 저지르다가 급히 도망을 치게 되죠. 미군은 28일 늦게 전주에 들어옵니다. KWC도 이때부터 기록을 수집한 거구요. 29~30일 미군이 촬영한 현장 사진들은 다 저에게 있습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27일 오후 12시에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이곳 전주형무소 인근에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고해요. 이게 무슨 일인고 하니, 유가족이 시신을 수습하러 잔뜩 모여 있는 것을 상공에서 보고, 인민군이 모여 있는 줄로 여긴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하다말고 죄다 도망을 쳤죠. 이런 일도 있었다는 증언을 해주신 아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건입니다. 이걸 땅 속에 묻어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당시 이곳에서 무참한 살육이 벌어졌고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다는 것을 후세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 ▲ 전주 효자공원 애국지사 묘역에 세워진 묘비.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전주 효자공원 애국지사 묘역에 세워진 묘비.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학살이 벌어질 때 호명을 안한 사람들은 살아났겠군요?

    ▲ 아주 많은 증언이 있습니다. 불려 갔다가 용케 목숨을 부지한 분도 계시고, 남아 있다가 살아난 분들도 계시죠. 하지만 전라북도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라 서로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어디에 사는 누가 죽었는지를 서로 몰라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옆에 사람 정도만 기억알 뿐이죠. 좀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살아난 분의 사연을 말씀드린 적이 있죠? 이 분이 나중에 '생명의 은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분은 그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합니다. 군산 경찰관이었다고 하는데요. 아주 애절하고, 지금도 가슴을 울컥하케 만드는 살아 있는 스토리입니다.

    - 인민군이 굳이 수용자들을 죽이지 않고 도망쳤어도 됐을텐데요?

    ▲ 잠정적인 적들이라고 생각했겠죠. 자신들한테 해코지할까봐. 나머지 사람들은 죽일 시간이 없어서 못죽인 겁니다. 이들은 27일까지 학살을 저지르다 도망갔는데요. 미군 정찰대는 28일 밤에 왔고, 저는 29일에 도착했죠. 보통 선발대와 군사정보기관이 먼저 갑니다. 자산보고, 인명보고, 현금보고 등을 하기 위해서죠.
     
    - 당시 죽은 이들을 합장했었죠? 묘비가 꽤 오래돼 보이는데..

    ▲ 이건 효자공원에 세워진 묘를 제가 찍은 건데요. 당시 전라북도지사와 전라북도의회의장, 전주시장, 전주시의회장 등의 직함이 뒤에 새겨져 있습니다. 묘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습니다.

    "몸은 조국을 위해서 물과 불을 가리지 않았으며 칼날에 임했어도 돌아보지 아니하니 이 순결함은 흠이 없는 충성이로다. 어찌 육이오 동족상잔의 벽이 전주 고을에서 생김에 하늘은 헤아리지 않고 저 원수의 독한 손에 칼날로부터 편안히 풀려나지 못하고 옥석이 함께 부서지는 날에 함께 만났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나라에 보답하는 충성스러운 마음을, 얼마나 한스러운 일을 많이 했건만. 선비들이 국를 건설하는 도중에 나라를 추모하는 한량이 있는데 구렁이에 떨어지고 말았노라."

    - 이 비문은 누가 썼나요?

    ▲ 잘 모릅니다. 하지만 문장이 아주 감동적이죠. 한자로 쓰여진 걸 억지로 풀어쓰느라 말이 좀 이상해졌는데요. 당대 석학이 쓴 것으로 보입니다. 글씨도 아주 명필이고요. 대충 두 사람으로 압축되는데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 ▲ 묘비 뒤에 새겨진 작자미상의 비문.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묘비 뒤에 새겨진 작자미상의 비문.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선 학살 규모를 350명 정도로 보고 있군요.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작성한 내용을 살펴보면 최용구 전주지방법원 판사, 최원규 대한청년단, 김시동 지방유지, 이필연 부안군청 직원, 양기열 한독당 조직부장, 하재용 군산시 치안대장, 군산신문 논설위원 주간, 류준상 초대 제헌 국회의원 등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돌아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대부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죠.

    KWC의 기록서와 '6·25사변 피살자명부'를 조합해보면 1950년 9월 26~27일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 102경비연대, 전주형무소장, 간수, 내무서원,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가 300여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형무소 밖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요. 장로교신학병원(現 전주예수병원) 근처 채석장, 완주군수 사택 안마당 방공호, 천주교회 앞 방공호 등에서 5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최기평씨 등 일곱 분이 '적대세력'에 의해 연행돼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된 이들의 명예회복을 요청한 건에 대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7년 2월 13일부터 조사를 시작했고, 2009년 2월 이같은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자, 그런데 기록들을 보면 목격자 혹은 생존자들에 따라 조금씩 피살자 숫자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최OO씨는 당시 1,800명 정도가 수감됐었는데 이 중 700명 정도가 석방됐고 1,000여명을 인민군이 호명해 죽였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전주형무소 작업장에 호를 파라고 지시한 후 뒤에서 삽 등으로 내리쳐 1천여명을 죽였다는 주장입니다.

    피살자 중 175명은 가족이 없어 1950년 10월 중순 형무소 근방 죽산에 합장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시신은 3겹으로 매장했는데, 구덩이에 던진 시신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시신을 눕힌 뒤 다시 흙으로 덮는 식입니다. 미군이 시신을 세는 도중에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해 가기도 하고, 미처 캐내지 못한 시신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OO씨는 당시 감옥 안에 3,000명 가량이 있었는데 이 중 1천여명은 죽음을 모면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눈 짐작으로 파악한 내용들이라 실제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를 보면 26일 오후 5시 40여명의 사람들이 형무소 밖에 있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들이 군인은 아니죠?

    ▲ 인민군 치하, 수복되기 전의 상황입니다. 이 좌익 인사들이 인민군과 합세해 사람들을 도륙하고 함께 도망을 친 것으로 보입니다. 학살에 가담한 형무소 기획부 소속의 간수 중에는 스무살 남짓한 청년도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북한 인민군이 전주를 점령한 1950년 7월 20일부터 9월 28까지 북한 인민군 102경비연대, 내무성 산하 전라북도 정치보위부,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전주시 내무서 등을 중심으로 당과 행정기구를 조직화시켜 남한에서의 점령정책을 전개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1950년 9월 28일 북한 인민군들이 전주에서 퇴각하기 시작했고 전주는 1950년 10월 1일 수복됐어요. 10월 직원들이 복귀했을 때 전주형무소는 이미 전소됐고, 수백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이 사진들을 보세요. KWC에서 찍은 사진들인데요. 팔만 밖으로 나온 사진도 있고, 상반신 전체가 땅에 박혀 있는 시신의 모습도 보이죠.

  • ▲ 향토사학자 이인철씨.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향토사학자 이인철씨. ⓒ뉴데일리 조광형 기자



    - '킬링필드'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사진들이 그동안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었나요?

    ▲ 한 번도 없습니다. 이번 추모 행사 때 현장에서 공개한 게 처음입니다. 죽인 다음에 일부는 묻고 맨바닥에 버린 시체들이 허다합니다. 그냥 흙만 대충 뿌리고 방치한 거죠. 자세히 보면 몸에는 특별한 상처가 없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비교적 말끔한 편이죠. 총살이라면 시신이 아주 엉망이 돼 있었겠죠. 머리를 맞아서 죽었기 때문에 시신이 멀쩡한 겁니다. 보세요. 움직이는 사람들이 죄다 여자들입니다. 전쟁통에 남자들이 모두 끌려가고 죽는 바람에 시신을 거두러 온 이들은 온통 여자들 뿐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게 바로  역사입니다. 실체적으로 존재한 사건이고 어떤 면에선 지금도 진행 중인 사건이죠. 이것을 지금에와서 이렇다저렇다 논하는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지식인으로서 올바른 시대정신이 뭐냐는 부끄러운 반성을 하게 됩니다. 1백년 전, 2백년 전 사건도 아닙니다. 불과 몇 십년 전에 있었던 비극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모른 채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 반대편 입장에 계신 분들은 이 사건을 부정하고 있나요?

    ▲ 부정을 못하죠. 사실이니까. 하지만 시인도 안합니다. 이 문제로 토론도 여러 번 했는데요. 이 사실을 부정하는 분들은 없습니다.


    [사진 = 뉴데일리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