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국군포로 김성태씨… 17살 참전→ 포로→ 13년 수감→ 37년 탄광→ 2001년 탈북"고향 땅 밟았을 땐 하늘 나는 기분… 이북만리 전우들 생각하면 면목 없어""군인연금·정착금 2억5000만원… 사기로 모두 날리고 기초수급자로 전락""쌀이랑 생계급여는 수급자여서 받는 거고… 월 20만원에 의료비도 주니까 혜택"월 20만원 지원금도 尹정부 들어서 지원…"대통령이 준 거야" 윤석열 시계 자랑도
  •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가 뉴데일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기자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가 뉴데일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기자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24일 낮 12시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등이 90도로 굽은 작고 왜소한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를 올려다 봤다. 손 대표는 "우리 아부지가 이렇게 늙었구나"라며 그를 감싸 안았다. 

    할아버지의 집 현관문에는 '국가유공자의 집'이 적힌 문패가 두 개나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깥 햇볕과 대비되는 어둠이 깔려 있었고, 좁은 거실 중간 바닥에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표정 없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우리 어머니, 언제 이렇게 아파서..." 손 대표는 한동안 그의 손을 잡고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김성태, 올해로 92세가 된 국군포로 참전용사다. 1932년 경기 포천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의 나이에 6·25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경기 양주에서 부상당한 중대장을 업고 달리다 포탄에 맞아 쓰러졌고, 참전 사흘 만에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됐다. 이후 13년간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고 37년간 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2001년 마침내 탈북에 성공했다.
  •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와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기자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와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기자
    2년 만에 손 대표를 만났다는 김 할아버지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손 대표가 내민 것은 '독수리'가 크게 그려진 캡 모자. "내래 아버지가 독수리 기운 받아서 더 오래 살아라는 의미로 미국에서 제작 맡겨가 만들어왔지. 오래오래 살아라고. 아프지 말라고." 손 대표가 손수 모자를 씌워주자 그는 치아를 보이며 함박 웃음을 터뜨렸다. 

    멋진 모자를 쓰고 기자와 마주 앉은 김 할아버지는 북한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죽다 살아났지"라고 힘겹게 운을 뗐다. "국군포로로 잡혀 53년도까지 평양 전후복구 사업에 동원됐지. 안전성 건설대에서 기와도 만들고 벽돌도 만들고... 54년도에 탈출을 했는데 붙잡혀서 66년도까지 '13년 만기'로 교도소를 출소했다는 거야." 어느새 그의 얼굴엔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었고 그늘만이 가득했다. 

    5초간 정적이 흘렀다. 이내 김 할아버지는 기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는 게 사람 꼴이 아니야, 그저 감시 대상이지"라고 말했다. "탄광에서 석탄 캐는 게 제일 힘들었어. 그런데 그것보다 감시받는 게 더 힘들었단 말이야. 이 사람 저 사람 다 감시해서 당에다 보고하고... 또 이마빼기에 국군포로라고 적혀있지 않으니깐 서로 추측해서 감시하고 의심받고 경계해야 했고."

    그의 눈동자는 마치 1950년, 당시 17살이었던 소년 시절로 되돌아간 듯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김 할아버지는 당시의 끔찍했던 수감과 노역의 상흔이 떠오른 듯 어느새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일하다 10대, 20대, 30대를 보내고 고향, 부모, 형제를 못 봤던 갈망이 너무 커 탈북을 결심했지... 대한민국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었어." 그의 작은 목소리에서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가 뉴데일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기자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가 뉴데일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기자
    김 할아버지는 북한에 끌려간 지 51년 만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자가 '고향 땅을 밟은 순간 느낀 감정'에 대해 묻자, 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기분이었다"고 답했다. 옅은 미소를 띠며 "내 조국을 피부로 안았기 때문"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런 김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손 대표의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고향 땅을 밟은 그의 앞에는 동료에 대한 죄의식,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사기, 기초수급자 전락 등 고난과 고통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그는 탈북에 성공하지 못해 북한에 억류된 삶을 살아가는, 또는 생을 마감한 수만명의 국군포로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가슴이 아프고 면목이 없다"고 전했다.

    "나의 전우들이 이북만리 북한에서 소리 없이 억압 받으며 탄광에서 채탄하다...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그리다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면서... 그 사람들도 나와 같이 한국에 왔으면 부모, 형제, 친척 다 만나고 얼마나 영광인지 알게 됐을 거야. 그 사람들은 정말 그리운 형제도 못 만났을 거고 노예 생활하다 비참하게 죽었으니깐... 친구들 보기가 정말 면목 없지. 우리는 그래도 고향에 와서 동창생도 만나고 했는데... 죽은 친구들 생각하니깐 가슴이 아파." 그는 끝내 고개를 떨궜다. 

    김 할아버지는 전 재산을 사기로 모두 잃어 수급자로 전락한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일시불로 받은 군인 연금과 탈북민 정착 지원금 등을 합해 2억5000만원을 갖고 있었지만, 2014년 탈북자가 운영하는 'H무역'이란 회사에 투자해 사기를 당했고, 현재는 기초수급자 생활을 하고 있다. 10평자리 임대 아파트에서 쌀과 생계급여를 받고 사는 실정이다. 
  •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가 뉴데일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기자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가 뉴데일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기자
    국군포로 김성태 할아버지가 '귀한용사'로서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은 '매달 20만원'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지난해 말부터 시작됐으며 이전까진 어떠한 국가적 인정이나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방부에서 연간 치료비 1000만원을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국군포로 본인만 사용할 수 있어 고령의 아내 등 가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거액의 사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쌀이랑 생계급여는 수급자여서 받는 거고, 국군포로 지원금은 매달 20만원... 그리고 의료비도 주니 혜택 많은 거지." 

    지원책이 점차 나아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국군포로를 위한 정부의 인정과 예우, 그리고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씻을 수 없었다.  

    대화를 마친 김 할아버지는 별안간 손목을 들어올리며 차고 있던 시계를 자랑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준 거야." 컴컴한 방 안에는 그가 찬 시계만이 빛나고 있었고 흐뭇함이 담긴 목소리는 거실 한복판을 가로질러 퍼져 나갔다. 목소리 끝엔 ' 6·25국가유공자'가 새겨진 모자 두 개가 텔레비전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마지막까지 배웅하러 나간다며 문 앞을 서성이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고, 앓아 누워 있던 할머니 역시 힘겹게 몸을 일으키던 장면이 생각나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독수리 기운 받게 손명화가 준 모자 쓰고 시계 차고 나갈 거야..."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소탈한 웃음과 또렷한 눈동자, 그리고 가느다란 손목과 작은 목소리까지.  
  •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가 윤석열 대통령이 준 시계를 차고 있다. ⓒ정상윤 기자
    ▲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국군포로 김성태(92)씨 자택에서 김씨가 윤석열 대통령이 준 시계를 차고 있다. ⓒ정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