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인 옷 입은 이승만 임정대통령, 경호담당 경무국장 김구(오른쪽).
    ▲ 중국인 옷 입은 이승만 임정대통령, 경호담당 경무국장 김구(오른쪽).
    김구는 그동안 명성으로만 알고 있던 이승만을 처음 만났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소재 임시정부 청사에 나타난 초대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경무국장 김구는 그날부터 ’대통령 경호‘라는 임무가 더 늘었다. 그리고 이승만의 부임을 전후한 당시 임시정부(임정) 상황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기미년 대한민국 원년(1919)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사조가 점차 봉건이니 사회주의니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계에도 사상이 갈라지고,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 부 총장(장관)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에 따라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김구 [백범일지] 돌베개, 1997)

    소련 레닌이 임정과 같은 해 출범시킨 코민테른의 ’국제공산화‘ 물결이 세계를 삼키는 시기, 스탈린의 노림수 ’동방‘의 상하이에 숨어있는 임시정부에도 붉은 태풍이 덮쳐왔다.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국무총리의 공산주의 대결! 첫 걸음부터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은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공산주의와 싸워 이겨야 살아남는 기구한 '지정학적 운명'을 그때 걸머지고 탄생했던 것이다.
  • 상하이 프랑스 조계내 임시정부 청사(자료사진)
    ▲ 상하이 프랑스 조계내 임시정부 청사(자료사진)
    이동휘, 임정 장악후 ’고려공산당‘ 조직...레닌의 공작금 확보

    1919년 9월 통합된 임시정부 국무총리는 이동휘, 그 총리 비서와 국무원(정부) 비서장을 겸직한 사람은 이동휘의 ‘심복중의 심복‘ 김립(金立, 1880~1922, 본명 김익용, 가명 3개)이다. 
    대통령 없는 임정의 실권을 모두 장악한 두 사람이다. 
    이동휘와 동향(함경도 명천)인 김립은 한일합방 직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영, 이동휘와 함께 만주 무관학교 교수도 지냈다. 볼셰비키의 지도로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명망있는 이동휘를 간판으로 내세운 김립은 누구인가. 상하이에서 흥사단 신문 [독립신문]을 만들던 문인 이광수 등 여러명의 증언이 놀랍다. “김립은 책사(策士)로서 임정을 소비에트와 처음 연결한 사람” “파괴도 건설도 탄복할만한 정치수완” “조화를 잘 부리는 음모가” 등이다. 

    임정을 한 손에 쥔 두 사람은 또 한명의 심복이자 볼셰비키 전문가 한형권(韓馨權)을 모스크바로 파견한다. 이동휘가 임정 몰래 ’임정 대표‘ 문서를 만들어 보낸 한형권은 김립의 전략대로 임무를 수행한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한인사회당의 정부다. 빨리 인정해주고 대폭 지원해 달라”
    클레믈린에 한형권을 불러들인 레닌이 물었다. “얼마나 필요하냐?”
    한형권은 크게 부른답시고 200만루블이라 대답한다. 레닌이 웃으면서 “일본을 대항하는데 그걸로 되겠느냐”고 했다. 당황한 한형권은 각지에서 동포들이 도와준다고 얼버무렸다. 레닌은 칭찬하면서 200만 루블을 주라고 외교부에 지시하였다. 200만 루블은 현재 평가로 2,0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쾌재를 부른 한형권과 이동휘-김립은 약속한다. 이 돈은 “임정이 절대 모르게 우리만 써야할 공산혁명 자금이다.” 
    만주까지 마중 간 김립은 한형권과 비밀을 다짐하고 일부 금액을 가지고 돌아온다. 12월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하기 전에 이승만 축출용 비밀 공작금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모스크바 코민테른 본부의 극동국은 1920년 4월 상하이에도 극동국을 설치한다, 책임 비서는 보이친스키, 바로 2년전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결성을 주도했던 장본인이다. 이번엔 중국공산당 결성과 이동휘를 앞세워 한인공산당, 즉 ’고려공산당‘ 설립이 주임무였다. 
    새로 발족한 동양 비서부에 중국부, 한국부, 일본부를 만들었고 한국부(고려부) 조직원은 이동휘, 김립 등 임정 고위층이다. 
    코민테른의 한국혁명 목표는 일석이조(一石二鳥), 고려공산당 만들어 임시정부를 탈취, 또는 전복시키고 소비에트 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그 무기는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국무총리직‘과 코민테른의 공작금, 이를 보이친스키가 잘 운용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앞의 책)
    새로운 공산당 조직에 나선 이동휘와 김립은 임정 내외의 주요인사들은 물론, 상하이에 몰려든 청년남녀들을 비밀리에 포섭한다. 총책 보이친스키는 유망한 지식인들에게 레닌주의 의식화 교육을 맡았다.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것이 이때였다.

    ★이때의 일도 김구는 [백범일지]에 남겼다. 이동휘의 김구 포섭 이야기.
    「공원에 산보가자는 이동휘를 따라가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를 좀 도와주시오”
    김구는 얼핏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무슨 유감이 있나. 이동휘는 아니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대저 혁명이란 유혈 사업으로 어느 민족에게나 대사인데, 현재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오. 따라서 이대로 독립을 하고 나면 또 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될 것이니 두 번 유혈은 우리 민족에게 큰 불행이오. 그러니 적은이(아우님)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우리가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명령을 받지않고 공산혁명을 할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오” 이동휘의 대답을 듣자 김구는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일이라 거절하고 ’자중‘을 권고했다」
  • 1921년 46세 이승만 임정 대통령, 48세 이동휘 임정 국무총리(오른쪽).
    ▲ 1921년 46세 이승만 임정 대통령, 48세 이동휘 임정 국무총리(오른쪽).
    ◆ “매국노 이승만은 반성하고 사퇴하라” 이동휘 막말   

    앞장애서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낸 편지로 보았듯이 ’공석‘을 핑계 삼아 이승만을 빨리 상하이로 오라고 재촉한 것은 다목적 계락이었다. 미국과 이승만의 ’관계단절‘과 하와이 동포의 돈줄 가로채기, 대통령 체제 없애기, 공산당의 권력 독점 등 ’데려다 놓고 죽이기‘ 작전이다. 
    이승만이 나타나자 “위임통치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요구가 약속이나 한 듯 사방에서 터졌다.

    ★’위임통치‘란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말한다. 3.1운동 발발 직전, 병상에 누웠던 이승만은 정한경이 만들어온 문서를 읽어보고 찬동하여 서명한 일이다. 내용인즉 ’새로 설립되는 국제연맹이 한반도에서 일본을 물리쳐주고, 완전독립을 전제조건으로 일정기간 안정화 통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국제연맹 창립에 즈음하여 다른 식민지 약소민족들이 원하던 방식이었다. 대한인국민총회 안창호 회장도 회의를 거쳐 결재하였고 정한경은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상하이 여운형도 중국정부를 방문한 미국특사 크레인을 만나 파리 강화회의 참석을 요청하고 긍정적 대답을 듣자 ‘신한청년당’을 급히 만들어 독립청원서를 크레인에게 주었으며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 김규식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국제연맹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 이동휘 일파는 ’매국노는 사퇴하라”고 밀어붙인다. 김립은 그동안 임정 인사들을 설득해 놓았던 ‘임시정부의 제도개혁문제’를 공식 제기하였고 이동휘는 이를 이승만에게 국무회의석상에서 날마다 요구하며 “성난 사자처럼” 막말을 쏟아낸다.
  • 30대시절 안창호(왼쪽), 김규식 박사.
    ▲ 30대시절 안창호(왼쪽), 김규식 박사.
    ◉이동휘=“위임통치 떠드는 자들은 이완용보다 더 한 역적이다.” 이것은 2년전 임정 통합때 신채호가 한말-‘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며 ‘대통령 이승만’ 선출을 반대하던 비난 그대로다. 
    “유약한 민주주의냐? 강철 같은 철혈주의냐? 선택하라” 이동휘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맹공한다. 철혈(鐵血)주의는 무장투쟁 독립론, 그때 북경의 박용만과 신채호 등은 정부형태의 군사위원회와 ‘철혈단’도 만들었다. 하와이에서 궁지에 몰려 떠났던 박용만은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를 맨 처음 상하이에 알려주고 규탄운동을 벌여왔으며, 이에 호응하듯 이승만의 중국행에 맞춰 무장 암살단이 상하이로 숨어들었다.
    이동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임시정부 체제를 ‘위원제’로 전면 교체하라” 최종목표 ‘소비에트식 위원회체제’를 들이댄다. 모스크바 레닌 앞에서 장담했던 임시정부 혁명안이다. 이승만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동휘는 임시정부를 시베리아로 옮기자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도 거부당한다.

    ◉김규식=자신도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 국제연맹에 냈던 김규식이 '위임통치'를 가지고 이승만을 공박한다.
    “그땐 내가 바빠서 몰랐는데 사과하고 탄핵안이 나오기 전에 사임하시오.” 김규식은 이승만이 임명한 구미위원부 위원장,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장면이다. 이승만이 설명하고 설득하자 김규식은 사퇴하겠다며 욱박질렀다. 이승만은 즉석에서 수리하였다. 

    ◉안창호=뜻밖에도 안창호가 ‘임정 체제변경’에 적극적이었다. 그동안 공산주의 전문가 김립이 주장한 ‘제도변경’의 이유는 ‘효율성’이다. 상하이에 집중된 현행제도는 효율성이 없으니 ‘분산제도’로 변경하여 각자의 소재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상하이에는 김립이 총책으로 각처를 조절하는 연락부만 두어도 된다는 ‘대안’ 제시, 그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임정탈취 작전이다.
    ‘효율성’이란 초기 공산주의에서 주장하고 활용한 자본주의 체제 불지르기 첫 폭발물이다. 
    그것이 '임정 공산화 혁명' 전술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난 2년간 임정을 좌지우지하던 안창호가 '제도변경'에 호응하고 나섰다. 
    제도변경위원회(안창호, 김규식, 신규식)와 외교위원회(안창호, 김규식, 노백린, 신익희)를 구성하고, 날마다 임정 개혁문제를 논의, 이승만 대통령 사임 이후 권력배분까지 갑론을박하는 판이었다. 
    이미 임정은 1년간 이동휘와 김립의 심리전을 통하여 ‘이승만 제거-정부 개조’의 공감대가 무르익었던 것, 공산주의 이론도 실제도 모르는 애국지사들의 순진함이라 이해해야 할까. 사실은 공산주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지역감정과 권력 이기주의가 몇 배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악용하는 것이 공산주의 전술 아니던가. 
  • 박용만, 신채호, 김원봉(왼쪽부터).
    ▲ 박용만, 신채호, 김원봉(왼쪽부터).
    ◆‘레닌 자금’ 들통...이동휘, 사표 던지고 모스크바로

    한형권이 교섭하여 레닌이 제공한 200만루블은 금괴가 많아 엄청 무거웠다. 일단 60만루블만 가져와서 40만루블은 빼돌리고 김립이 상하이로 가져와 나누고 살포하였다.

    「공산당의 공식보고에 따르면, 40만루블 가운데 한형권의 활동비로 6만루블, 도중에 없어진 4만8천루블, 상하이 고려공산당에 15만루블, 김립이 사용한 것이 11만루블이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3권. 앞의 책).
    고려공산당은 15만루블 가운데 본국 국내 조직에 4만5천루블, 중국 및 대만 공산당 조직을 위해 1만1천루블, 일본 공산당 조직을 위해 1만1,500루블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 공작금을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의열단 김원봉이었다. 북경 신채호의 역사서편찬에 지불하고, 이극로의 중국어-러시아어 회화책 출판비, 김규식의 모스크바 여행비로도 쓰였다고 한다.
    고려공산당 당원 포섭용으로 뿌려진 공작금이 얼마인지는 자료도 없다. 일부 인사는 사생활에 호사를 누렸으며, 상하이 청년들 치고 “그 돈을 안써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는 회고담도 전해진다.(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김립은 레닌의 금괴를 빼돌려 북간도 가족을 위해 토지를 매입하고 자기는 상하이에 숨어서 광동출신 중국여인을 첩으로 삼아 향락하였다“(김구 [백범일지] 앞의 책)

    이러니 이동휘와 김립의 비밀자금 약속은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설전이 폭발하고 말았다.
    임정 측은 ”국무총리가 레닌이 임시정부에 보낸 거액을 혼자 착복하였으니 대역범죄“라 들고 일어났다. 이동휘는 ”임정이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제공한 자금“이라며 반격한다. 맞는 말이다.
    ”더 이상 이승만 밑에서는 일을 못하겠다“ 이동휘는 결국 사표를 던지고 사라진다. 임정변혁은 김립에 맡기고 거액을 지키려 사퇴한 그는 몇 달 뒤 모스크바에 나타난다. 레닌과 새로운 '약속'을 위해서.

    ★이승만, 공산당 공세와 파벌 염증...암살 위협에 상하이 탈출

    이승만은 진작부터 상하이 임정에 비판적이었다. 불법적 폭력운동에 매달려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고, 지역파벌 정쟁이나 일삼는 수구적 정치집단의 행태는 구한말 의병활동의 연장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새해 연두교서도 발표하여 현실에 맞는 임정의 활동목표와 벙법론까지 제시하며 설득도 해봤지만 구제 불능 상황이다. 이동휘도 떠났고 안창호마저 사퇴한다며 들락날락이다.
    이승만은 이동녕(李東寧) 등으로 ‘기호파 내각’을 구성해 놓고 ‘결별’을 선언한다. 상하이 부임 5개월 남짓. ”나는 구미위원부에서 할 일이 많다“며 마침내 5월19일 짐을 꾸렸다.
    당시 상하이에는 벼라별 폭력살인 범죄 조직들이 100개를 헤아릴 정도였다고 한다. 북경의 암살단 소문에 일제의 밀착감시까지...시간이 아깝다. 
    은신했던 선교사 집을 나와 며칠 동안 미행을 따돌리며 숙소를 옮겨다니다가, 피치 선교사가 사준 표를 받은 이승만은 마닐라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것도 안면있는 미국 외교관를 우연히 만나 ‘동행’처럼 도움을 받은 덕분이었다. 
    이승만은 기도한다. 위기마다 나타나 도와주는 사람들은 필경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으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