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리빙시어터 첫 내한…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제공동 창·제작 공연
  • ▲ 연극 '로제타' 연습 장면.ⓒ엘로밤
    ▲ 연극 '로제타' 연습 장면.ⓒ엘로밤
    1890년 10월 13일, 큰 키에 푸른 눈을 가진 25살의 미국 여성이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평양에서 의료 선교를 펼쳤던 윌리엄 홀의 아내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한 셔우드 홀의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이었다.

    미국 실험연극의 시초로 유명한 뉴욕의 극단 리빙시어터가 처음 내한해 극공작소 마방진·옐로밤과 함께 연극 '로제타' 시범공연을 13~14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ACC, 전당장 이강현)에서 선보인다.

    이번 작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2022 ACC 국제공동 창·제작 공연사업의 하나로, 구한말 시대의 차별과 선입견에 맞서 싸우며 근대 여성 교육과 의료 봉사에 생애를 보낸 로제타 셔우드 홀의 삶을 무대 위에 재현한다.

    로제타는 조선 여성에게 근대 의료와 교육의 여명을 열어 준 인물이다. 남편과 딸을 각각 말라리아와 이질로 잃었지만 86년 삶 가운데 44년을 한국에서 의료선교에 바쳤다. 국내 최초의 여성 병원인 광혜여원과 맹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설립하는 등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여성들을 교육했다.

    14살 김점동을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인 박에스더와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특수교사 오봉래를 지원했으며, 과부였던 여메례는 여성교육가로 키웠다. 직접 한글점자를 만들어 맹인 소녀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타계한 이후에는 고국 미국이 아닌 한국 땅에 묻혔다.
  • ▲ '로제타' 극작과 연출을 맡은 김정한(요셰프 케이).ⓒ옐로밤
    ▲ '로제타' 극작과 연출을 맡은 김정한(요셰프 케이).ⓒ옐로밤
    리빙 시어터 출신으로 '로제타' 극작과 연출을 맡은 김정한(요셰프 케이)은 몇년 전 로제타 셔우드 홀 기념관이 있는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을 방문했다가 로제타가 남긴 일기장을 읽고 연극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남편과 4살 난 딸이 병으로 죽은 후 로제타가 '나 길을 모르겠으니 하느님 도와주소서'라고 삐뚤빼뚤한 한글로 써놓은 일기를 보고 눈물이 났다"고 전했다. 

    이어 "25살에 말도 모르는 조선에 와서 아프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한 사람의 아름다웠던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라며 "관객들이 연극을 통해 그녀의 삶을 경험하고 느끼고 돌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고 덧붙였다.

    1947년 줄리언 벡과 주디스 말리나 부부가 창단한 리빙 시어터는 미국 오프오프브로드웨이의 시작을 알린 극단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무정부의주의, 인종차별 반대 등 기존 연극 전통에 반항하며 혁신적인 실험극으로 세계연극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등 명배우들이 거쳐갔다.
  • ▲ 연극 '로제타'에서 각각 로제타를 연기하는 8명의 배우.ⓒ엘로밤
    ▲ 연극 '로제타'에서 각각 로제타를 연기하는 8명의 배우.ⓒ엘로밤
    '로제타' 공동제작은 연출가 김정한이 리빙시어터에 협업을 제안하면서 성사됐다. 김 연출가는 "인류애를 보여준 로제타의 삶을 처음 접했을 때 리빙시어터에서 배운 가치가 떠올랐다. 돈과 명예를 떠나 가장 진실된, 이야기가 필요한 곳에 옷을 벗고 춤을 췄던 극단이다"고 설명했다.

    리빙시어터 예술감독 겸 배우인 브래드 버지스는 "리빙시어터는 미국 수퍼볼보다 오래됐다. 우리가 하는 연극은 시대와 사회적 이슈에 따라 스타일을 변화해 왔기에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며 "관객이 객석을 떠나면 어떤 변화를 갖길 원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지만 의미있는 행동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공연은 실제 일기장을 바탕으로 '로제타'의 순간들을 타악기 음악에 맞춰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했다. 리빙시어터에서 50년간 몸담아 왔던 배우 토마스 워커를 비롯한 3명의 배우와 한국 극공작소 마방진 배우 등 총 8명이 '로제타'를 연기한다. 당시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자막 없이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어우러져 극이 진행된다.

    배우 토마스 워커는 "한명의 배우가 주를 이루는 게 아닌, 리빙시어터만의 앙상블 테크닉이 잘 드러난다. 배역을 뛰어넘어 물 흐르듯이 대사가 이어지면서 누군가의 지휘에 따라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연출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