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기념관 이용해 공산주의 선전하는 중국'공산당 선전물'이 '항일전쟁 시기 미술展'으로 둔갑 항일과 담쌓은 모택동이 항일전쟁했다는 그림 전시그림 설명으로 김일성의 '동북항일연합군'까지 미화
  • ▲ 독립기념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안내문. ⓒ뉴데일리
    ▲ 독립기념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안내문. ⓒ뉴데일리
    1940년 8월, 중국의 최고 맹장이자 혁명원로인 팽덕회(彭德懷) 팔로군(八路軍: 공산군) 부총지휘관은 백 개의 단을 조직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백단대전(百團大戰)'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보급망에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장개석(蔣介石)의 국민군과 힘을 합쳐 일본을 물리치자고 약속했던 국공합작 기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팔로군의 지도자이자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게 되는 모택동(毛澤東)은 팽덕회를 극심하게 비판했다.

    "그 정도 눈에 띄는 전투를 하면 안 된다."

    팽덕회는 공개석상에서 몇 번이고 자아비판을 해 상황을 모면했다.

    1956년 일본 군인 엔도 사부로는 중일 우호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군이 중국에 진공(進攻)한 것에 감사한다."

    한국에 대입해본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한 북한 장교에게 "6.25 전쟁 때 남한을 침략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

    팔로군은 1937년 8월 22일 열린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국공산당 항일 10대 강령'을 결의하고 발표했다.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항일을 위해 단결하자'는 것이었다.
  • ▲ 독립기념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전시물(사진 설명). ⓒ뉴데일리
    ▲ 독립기념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전시물(사진 설명). ⓒ뉴데일리
    그러니까, 앞에서는 항일을 선전하는데, 실제로는 항일을 한 부하를 혼내고 일본군에게 공격을 해줘서 감사하다고 한 것이다. 모택동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1964년 7월 10일, 일본 사회당의 방중대표단에게 모택동이 한 말을 인용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첫째, 장개석의 힘을 약하게 해주었다. 둘째, 우리의 공산당 지도부의 근거지와 군대 확충을 도왔다. 항일 전쟁 전, 한때 30만 명에 달했던 우리 군대는 우리 스스로 저지른 실수로 불과 2만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8년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군대는 120만 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택동과 장개석은 함께 힘을 합쳐 일본과 싸우자고 약속했다. 장개석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일본 또한 국민군을 상대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틈을 타 모택동의 팔로군은 세력을 불리는 데 집중했다. 농촌에 가서 민중을 포섭했다. 자치를 인정해주고 공산주의를 선전했다. 국공합작 전 2만 5천이던 공산군 병력이 8년 후 120만이 되었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국민군의 사상자는 321만 명에 달했다.

    장개석은 심지어 팔로군을 지원한다. <초비전사>에 따르면, 장개석은 팔로군에 국민군과 같은 수준의 군비를 지급했다. 하지만 해당 군비는 항일전쟁에 쓰이지 않았다. 신문, 책, 잡지를 통해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비용으로 쓰였다.

    심지어 팔로군은 국공합작을 통해 얻은 장개석 측 군사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하기까지 했다. 대신 싸워주고, 돈까지 쥐어줬는데 뒷통수를 맞은 것이다.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다.

    '싸우라고 했다고 진짜 싸우냐' 모택동은 장개석의 항일투쟁을 지켜보며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장개석은 공산주의자의 거짓말에 이용되어, 훗날 대만으로 쫓겨나게 된다.

    공산군 제4방면군 군사위원회 주석 장국도(張國燾)는 그의 책 <나의 회상>에 모택동이 이렇게 발언했다고 기록했다.

    "일본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라. 우리의 주요한 임무는 팔로군의 실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적의 후방에서 중공이 지도하는 게릴라 근거지를 만드는 것이 긴요하다."

    "애국주의에 현혹되면 안 된다."

    "전선에 가서 항일영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팔로군 간부 이법경(李法卿, 리파칭)은 모택동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중일전쟁은 우리 당의 발전에 있어 절호의 기회다. 우리가 결정한 정책 가운데 70%는 우리 당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 20%는 타협을 (국민당과의)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10%는 대일작전에 사용한다."

    모택동이 왜 팽덕회를 혼냈는지 이제 이해가 가는가. 팽덕회는 모택동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없는 부하에 불과했던 것이다.
  • ▲ 독립기념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전시물. ⓒ뉴데일리
    ▲ 독립기념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전시물. ⓒ뉴데일리
    지난주,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방문했다. 문제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필자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이다. 한중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되었다고 독립기념관 측은 설명하고 있다. 해당 전시는 모택동의 팔로군이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얼마나 열심히 일본에 맞서 싸웠는지 보여준다. 당시 중국인 화가들이 공산군의 지시를 받아 선전용으로 그린 판화들을 가져온 것이다. 설명에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합군'까지 슬쩍 끼워넣었다.

    독립기념관의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문제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겠다. 첫째, 팩트가 맞지 않다. 모택동의 팔로군은 항일을 하지 않았다. 한국인들과 독립운동을 한 이들은 장개석의 국민군이다. 항일을 기념하고 싶다면, 대만의 항일 기록을 가져와야한다.

    둘째, 중국 팔로군을 띄우는 전시를 독립기념관에서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설사 팔로군이 항일전쟁을 정말 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침략한 이들을 감싸안을 수는 없다. 모택동의 팔로군은 훗날 6.25전쟁을 통해 북한과 함께 남한, 미국, 유엔군과 싸우게 된다. 수많은 한국군을 살상하고, 대한민국을 분단하게 만든 원흉이다.

    셋째, 중국의 박물관이 제공한 미술작품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점이다. 중국의 박물관은 중국 공산당의 나팔수에 불과한 기관이다. 독립기념관 측은 작품에 담긴 의도, 역사관 등을 철저히 검열했어야 한다.  

    필자는 전시를 보는 내내 중국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중국 공산당의 선전물로 가득한 전시회를 한국에서 열다니. 여권도 없이, 뜻밖의 여행을 했다. 80여 년 전,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선전했고, 현재는 한국의 독립기념관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선전한다. 공산당의 탁월한 전술 덕분인지, 당하는 쪽의 무지 때문인지 모르겠다. 전자도 후자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대체 우리는 어느정도까지 기꺼이 당해야 하는가.

    이만 끝을 맺겠다. 1959년 7월 루산회의에서, 앞서 언급했던 백단대전은 다시 한 번 문제가 되었다. 결국 팽덕회는 이로 인해 몰락했다. 19년 전의 백단대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이유는 그 무렵 팽덕회가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모택동 측은 팽덕회를 숙청할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팽덕회는 그의 인생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면회 온 조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꼴값만 떨었다."
  • ▲ 독립기념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전시물. ⓒ뉴데일리
    ▲ 독립기념관 '항일 전쟁시기 미술 작품전'의 전시물. ⓒ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