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롯천재' 양지원, '한일가교' 놓는 트롯프린스 '날갯짓'악극 출연에 DJ, 작·편곡 실력까지…알고보면 '팔방미인' 데뷔 20년 기념앨범…컨셉은 '타임머신', 차기작과 연결
  • 데뷔 20년차. 무대 공연 횟수 5000번 이상. 가수 정동원에게 '가수의 꿈'을 심어 준 사람. 얼핏 봐도 상당한 내공이 느껴지는 프로필이다. 경력과 공연 횟수만 놓고 보면 분명 중견 가수급이다.

    놀랍게도 이 프로필의 주인공은 아직 이립(而立: 30세)도 지나지 않은 청년이다. 트로트 가수 양지원. TV조선 '미스터트롯'에서 호소력 짙은 창법으로 뭇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바로 그 가수의 이야기다.

    4살부터 '트로트 신동'으로 화제를 모았던 양지원은 2005년 '제15회 남인수 가요제'에 출전해 최우수상을 거머쥐며 작곡가 정의송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후 한 장의 앨범을 발매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장장 7년 동안 가수 데뷔를 준비하는 인고의 시간을 거쳤다.

    결실을 눈앞에 둔 상황에 불어온 혐한(嫌韓) 바람으로 '한류 가수'의 꿈을 접은 그는 소속사가 폐업하는 이중고로 마이크를 내려 놓을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노래와는 무관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TV에서 "'남자 송가인'을 찾는다"는 광고가 흘러나왔다.

    이를 무심코 넘겼던 양지원과는 달리, 그의 부모는 그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발견했다. 어머니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었던 양지원은 TV조선에 이력서를 보냈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제작진은 그에게 합격 통보를 보내왔다. 양지원에게 '인생 2막'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 아픈 만큼 '성숙'… '미스터트롯'으로 재도약

    "제대하고 아르바이트로 악착 같이 모은 돈으로 앨범을 냈는데 보기좋게 망했어요. (웃음) '현타'가 오더라고요.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고요. 그러던 중 어머니가 '미스터트롯' 광고를 보신 모양이에요. 저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한 번만 도전해보라'는 권유에 못 이겨서 이력서를 냈는데, 운 좋게도 OK 사인을 받은 거죠."

    당시 '신동부'에 들어가 김수찬·김희재·이찬원·김경민 등과 우정을 다진 양지원은 5화 본선 2차전까지 올라갔으나 아깝게 6화에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중도 하차한 그였지만 경연 무대에서 선보인 양지원의 '아우라'는 강렬했다. 'JPL(Ji Won Prince Love)'이라는 팬클럽이 탄생한 것도 이때부터다. 가요계에서도 '열성적'이라고 소문난 'JPL'은 양지원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여자친구다.

    자신을 기다려준 팬들을 위해 지난해 '선물'이라는 곡까지 만들어 헌정한 그는 매주 유튜브 라이브로 팬들과 만나고 공연을 통해 함께 호흡하는 요즘이 너무나 행복하단다.

    데뷔 20주년을 맞아 '기념 앨범'을 제작 중이라는 그는 올해도 팬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활동과 이벤트를 준비 중이라고.

    "현재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 전국 투어 콘서트에 함께 하고 있고요. BTN 라디오 '로맨틱라디오 양지원입니다'와 TBS 라디오 '9595쇼'의 코너 DJ도 맡고 있어요. 내달부터는 신유·홍자·양지원 3인 3색 콘서트도 가질 계획입니다. 게다가 조만간 모 드라마에도 출연해 OST까지 부를 예정이에요. 이게 다 팬 여러분께서 아낌없는 성원과 사랑을 보내주신 덕분입니다."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고 주변에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노래를 부르겠다는 양지원. 그에게서 나오는 '긍정의 에너지'가 영원히 샘솟기를 원하는 건 비단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 ▲안녕하세요. 뉴데일리TV 구독자 여러분. 트로트계의 프린스, 트로트계 왕자 양지원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 '프린스'는 팬들이 붙여주신 별명이죠? (웃음)

    ▲제 팬클럽 이름이 'JPL'입니다. 'Ji Won Prince Love'의 약자죠. 우리 팬분들께서 계속 저를 '왕자' '왕자'라고 불러주시다보니, 저도 모르게 스며들었어요. (웃음) 그래서 지금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제가 '왕자'라고 하고 다니고는 있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하하.

    - 팬들은 지원 씨의 히스토리를 잘 알고 있겠지만, 아직도 지원 씨를 '미스터트롯'에 나온 가수 정도로만 알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요. 오늘은 지원 씨의 과거를 낱낱이 파헤쳐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이름은 본명이죠?

    ▲네, 본명입니다.

    - 고향은요?

    ▲태어난 곳은 부산인데요. 본적은 충북 영동으로 돼 있습니다. 아버지 일 때문에 제가 갓난 아기 때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 데뷔한 시기가 언제죠?

    ▲4살 때부터 '트로트 신동'으로 방송 출연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처음 데뷔한 건 10살 때예요.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죠. 그때 '남인수 가요제'라는 큰 가요제가 열렸는데, 거기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그때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셨던 작곡가 정의송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 곡을 받게 됐죠. 이후 대형 트로트 회사를 통해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 그 어린 나이에 그런 큰 경연대회에 나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트로트가 너무 좋고, 트로트를 부르면 신나고, 트로트를 부르면 몸이 안 아팠던 것 같아요. 그런 원동력을 갖고 그냥 무대에 올라가는 게 너무 좋았고, 사람들 앞에서 제가 잘하는 걸 보여드리는 게 좋았어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제가 정말 몸이 아프더라도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집에 있는 반주기로 노래를 부르면, 다음날 신기하게도 몸 상태가 좋아졌어요. 그러다가 노래를 못 부르게 막으면, 또 몸이 아파지고….

    - 마치 무병처럼?

    ▲네, 신기하게도요.
  • - 자, 이렇게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트로트 신동으로 깜짝 데뷔를 했는데요. 이로부터 3년 후 홀연히 일본으로 건너가셨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 관계자분들이 어떤 분의 공연을 보러 오셨는데 우연히 저를 보신 거예요. 그때 그분들이 저를 트로트계의 '남자 보아'로 만들어보자는 계획을 세우셨어요. 그래서 저 혼자 두 달 만에 짐을 싸서 일본으로 넘어갔어요.

    당시 일본 회사에서 내건 조건이 있었어요. 이 친구는 3~4년 동안은 무조건 일본인이 있는 곳에서만 생활해야 된다는 것이었죠. 왜냐하면 나중에 데뷔했을 때 제가 일본 사람처럼 너무 노래를 잘하고 말도 잘하는데, 알고보니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주변을 놀라게 한다는 콘셉트였거든요.

    - 13살이면 아직은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인데요.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너무 외로웠을 것 같아요.

    ▲정말 많이 외로웠죠. 그리고 지금도 저는 친구가 많이 없어요. 왜냐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다 일본에서 검정고시로 통과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음악이 제 유일한 친구였던 것 같아요. 음악 공부와 함께 어학원을 다니면서 일본어도 열심히 배웠는데요. 4년 뒤에는 언어가 완벽하게 되더라고요.

    이후엔 신주쿠 오오쿠보 근처 코리아타운에서 혼자 자취를 했어요. 그러면서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당시 회사는 한 달에 한 번씩 약간 오디션 느낌으로 저를 테스트했는데요. 거기에서 만장일치가 나와야 프로모션 앨범을 낼 수 있었어요. 그렇게 되기까지 2년 넘게 더 걸렸죠.
  • - 듣자하니 지하철 같은 데서도 앨범을 돌렸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제가 5년차 정도 되던 해에 드디어 프로모션 앨범을 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조건은 회사가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부푼 꿈을 안고 공연 장소로 갔는데, 버스킹용 스피커가 한 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이만큼 전단지가 쌓여 있었어요. 그리고 일본어로 '양지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진 띠를 어깨에 두른 뒤 네모난 밀감 박스 위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미션이었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일본 엔카 가수들이 밟아가야 하는 정통 코스였어요. 그 다음에는 약간 노래 교실 같은 곳을 수백 군데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5천엔, 1만엔 이렇게 받은 걸로 생계를 유지했죠. 그렇게 1년 정도 생활했던 것 같아요. 방에 돌아와서는 '가요 무대' 같은 NHK 방송을 뚫어지게 보고 따라도 하면서 저 프로그램에 꼭 나가고야 말겠다는 야망을 품었죠.

    - 일본에서 정식으로 데뷔한 건 언제인가요?

    ▲정확히 일본으로 건너간 지 7년차 되는 해에 메이저로 데뷔했어요. 회사로부터 제안이 들어와서 자켓용 프로필 사진을 찍고, 뮤직비디오도 찍고, 라이브 카페에서 프로모션 콘서트도 시작했어죠. 당시 4500분 정도 와 주셔서 정말 성황리에 잘 끝났어요. 3개월 정도 그렇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반한 분위기가 조성된 거예요.

    뉴스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계속 부각됐고, 그러한 정치적 사건들이 계속 터졌죠. 당시 과격한 사람들이 한국 식당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있었는데요. 2014년 동일본 대지진이 또 터지면서 아예 방송계가 올스톱됐어요. 그러면서 한국 가수들은 TV에 출연시키면 안 된다는 방침이 내려왔죠.

    저는 당장 3개월 뒤에 꿈의 무대였던 NHK의 '가요 콘서트'라는 프로그램에 나갈 예정이었어요. 시청률이 한 20% 정도 나오는 프로그램인데요. 일본 인구가 1억4천만명 정도 되니, 어마어마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 프로그램 출연을 앞두고 정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어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외면받고, 공격받아야 되는 그 서러움이 좀 벅차 오르기도 했었고. 하지만 전 6개월 동안 꿋꿋이 버텼어요.

    이후에도 도쿄에서 진도 7.9 지진을 겪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요. 2014년 말 회사에서 '어차피 1년 동안은 활동을 못 한다. 지금 한국에서 건너온 모든 가수들도 방송 출연이 안 되는 상황인데, 어떡하겠냐'고 묻더군요. 그때 제가 일본에서 잘 되는 줄 알고, 많은 기대를 걸고 계신 분들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무릎 꿇고 빌었던 것 같아요. 제발 여기에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 분들은 정말 단호하시더라고요. 더 이상은 안 된다며 거절하셨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됐죠.
  • - 결국 일본 레코드사에서 지원 씨를 한국으로 돌려보낸 거군요.

    ▲그때는 많이 원망스러웠죠.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오히려 더 잘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한국 회사 쪽에서 일본에서 활동했던 게 너무 아깝다며 앨범을 하나 내주셨거든요. 그런데 그 앨범이 나왔을 때 '세월호'라는 대참사가 터지면서 또 한국 가수들의 설 자리가 없어졌어요. 국가적으로 너무 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때 저는 군대를 가라는 신의 계시로 알고 바로 입대했어요.

    그렇게 정신없이 군 생활을 했는데요. 일병 5호봉 때 한 간부가 저를 부르는 거예요. 그러고선 '지금 너네 회사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더군요. 제가 있던 '인우기획'이라는 회사가 폐업 신고를 했다는 소식이었죠. 그때 저녁에 근무를 설 때 달을 바라보면서 멍때렸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이제 난 나가서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군 생활을 마쳤어요. 그러다가 이제는 든든하게 저를 지지해줄 수 있는 버팀목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냥 가수를 포기하기로 결심했어요.

    - 아르바이트를 정말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시기에 저는 회사로부터 정산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사실 돈이라는 걸 벌어본 적이 없었죠. 왜냐하면 저한테 너무 많이 투자를 하셨는데, 제가 이렇게 회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제대 후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는데요. 아르바이트를 하면 일당을 손에 쥐는 게 그렇게 재미가 있더라고요.

    제 통장에 50만원, 100만원 차곡차곡 쌓이는 그 재미 때문에 1년 동안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아르바이트에 미쳐서 생활했던 것 같아요. 당시 고깃집, 마트, 떡공장 등 다양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요. 1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시 노래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돈을 지독하게 모았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제작한 노래가 바로 '아싸라비아'라는 노래예요. 말아 먹었죠. (웃음)

    - 그 정도면 소위 '현타'가 올 법도 한테요.

    ▲너무 하기 싫더라고요. 제가 피땀 흘려가며 노력해서 제작했는데 그건 저만 좋은 거였어요. 당시에는 트로트라는 장르가 지금처럼 이렇게 흥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많이 외면당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렇게 되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죠.
  • - 그러다가 '미스터트롯'을 만났군요.

    ▲사람이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어느날 밥상에 앉았는데 고기도 있고 생선도 있고 이상한 거예요. 느낌이 이상했어요. 그때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미스터트롯'에 한 번 나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셨어요. "'제2의 송가인', '남자 송가인'을 찾는다"라는 '미스터트롯' 광고를 보신 모양이에요. 저는 단호하게 "트로트가 이렇게 외면 받는데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을 나가냐"고 거절했어요.

    "나는 지금 생활이 너무 좋다. 내가 공장에서 일을 해도 좋고, 내 통장에 지금 쏠쏠하게 돈이 쌓이는 이 느낌이 너무 좋다. 그리고 일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밥도 먹고, 제 시간에 잠자고 이 생활이 너무 행복하다. 다시 한 번 그 세계에 발을 들여서 고달픈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라고 딱 잘라 말을 했죠. 그랬더니 어머니가 우시는 거예요.

    "그래도 엄마 소원인데 한 번만 좀 도전해보면 안 되겠니? 엄마도 정말 속상하다. 일본에서 실패하고 돌아왔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때마다,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핑계를 대는 것도 이제 한계다"라고 토로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나가니 일에 집중이 안 되는 거예요. 계속 그 이야기가 귀에 맴도니까.

    그래서 한 두 달 정도 고민을 하다가 힘들게 이력서를 써서 TV조선에 보냈어요. 그런데 바로 전화가 왔어요. "양지원 씨, 예선 보러 오셔도 될 것 같아요"라고. 그때 제가 첫 번째로 불렀던 노래가 '미스고'라는 노래였는데요. 당시 올하트를 받으면서 지금 여러분께서 보시는 양지원이라는 가수가 세상에 나오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 '미스터트롯' 이후의 행보가 궁금한데요. 어쨌든 핫스타가 됐어요. 근데 뭐랄까 더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약간 소강 상태를 보인 것 같거든요. 그 이후에 어떻게 지내왔습니까?

    ▲제가 많이 부족했더라고요. '미스터트롯'을 쭉 모니터해보니, 대중들이 생각한 양지원의 노래 실력은 정말 머리 위에 있는데, 실제 저는 바닥에 있더라고요. 노래를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저를 점검하고 돌아보는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양지원이 앞으로 어떤 인생을 걸어야 하고,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건 무엇인지 생각을 많이 했어요.

    - 그런 고민 끝에 앨범을 내셨죠.

    ▲지난해 '도돌이표'라는 콘셉트를 갖고 '리프라이즈'라는 앨범을 발매했어요. 앨범에 있는 '선물'이라는 노래와 '건배'라는 노래는 제가 작사·작곡·편곡까지 다한 노래예요. 그 중에서도 '선물'이라는 곡은 저를 1년 동안 기다려주신 우리 팬 여러분을 위해 만들었죠.

    앞서 제가 팬 여러분에게 "저를 안 떠나 주시고, 1년 동안 제 곁에서 기다려주시고 응원해주시면 제가 뭔가 노래로써 좋은 목소리로 꼭 보답하겠다"고 약속했었거든요. 그래서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편곡하고 가사도 많이 바꾸고 정성을 쏟았죠. 마침내 그 노래를 공개했을 때 팬 여러분들이 듣고 많이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러면서 마치 자신의 이야기 같다는 말씀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 - 올해로 데뷔하신 지 20년이 됐죠? 이 정도면 거의 중견 가수 아닙니까? (웃음)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 앨범'을 지금 준비 중이시라고요?

    ▲제주도에서 2박 3일간 드라마 타이즈로 뮤직비디오 촬영을 끝냈고요. 이번 앨범과 다음 앨범이 연결되는 '세계관'이 존재합니다. 힌트로 한 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타임머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번 앨범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앨범 안에는 양지원의 20년을 고스란히 갈아넣은 신곡들로 채워졌고요. 10곡 정도의 트랙리스트가 발매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편곡하고, 스케줄이 끝나면 제 작업실로 가서 새벽까지 곡 작업을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그 와중에 지금 악극도 출연하시잖아요? 열기가 굉장히 뜨겁던데요. 어떻습니까?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노래를 부르거든요. 노래를 부르니까 더 그 감성에 빠져들 수 있는 것 같고, 양지원의 120%를 더 보여드리는 것 같아서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감독님한테 "제가 발연기인데, 과연 잘 할 수 있을까요?"라고 여쭤봤거든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안 되는 건 없다. 무조건 해보자"고 용기를 주셔서 하게 됐습니다.

    베테랑이신 임호 선배님, 양금석 선배님 등 많은 선배분들과 함께 연기를 하고 있는데요. 처음엔 아무 것도 모르고 대본만 열심히 읽었죠. 한 6개월 정도 지나고 무대에서 내려오니, 선배님들이 제 어깨를 두드려 주시면서 "너 연기 많이 좋아졌다"고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그때 뭔가 울컥하더라고요.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우리 국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이에요. 지금 전국 콘서트를 하는 중이니 기회가 되시면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아마 부모님께는 정말로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요. 많이들 오셔서 다함께 즐겨주셨으면 좋을 것 같아요.
  • -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어요.

    ▲지금 감사하게도 너무 많은 곳에서 양지원을 찾아주시고, 너무 많은 곳에서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셔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아주 행복합니다.

    일단 '불효자는 웁니다' 전국 투어 콘서트에 함께 하고 있고요. 오는 6월 25일 부산 벡스코에서 신유·홍자·양지원 3인 3색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에요. 이후 전국 투어도 다닐 계획입니다.

    제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모 드라마에도 캐스팅된 상태예요. 그 드라마의 OST도 제가 부를 예정입니다. 연말에는 디너쇼도 가질 계획이고요. 정말 5·6·7월까지 스케줄이 계속 풀로 차 있어서 너무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 매주 금요일 유튜브채널 '양지원TV'도 진행하시잖아요?

    ▲얼마 전에 정말 감사하게도 동시 접속자 수가 1만명이 넘었어요. 또 많은 분들께서 양지원TV 출연을 의뢰해 주신 상태인데요. 요즘 가수들은 너무 포화 상태인데, 가수들이 설 자리가 많이 없거든요. 그런 분들은 저에게 문의를 주시면 제가 양지원TV를 통해서 가수분과 노래를 홍보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빌려드리려고 합니다. 이 가요계뿐만 아니라 사회는 다 똑같더라고요.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구조로 돼 있어요. 서로 도우면서 덕도 나누고 그렇게 살아야죠.

    앞으로 더 밝은 양지원의 에너지를 가지고 항상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는 그런 음악으로 열심히 노래 불러보겠습니다. 앞으로도 양지원 많이 사랑해 주시고요. 마지막으로 '뉴데일리TV'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취재 = 조광형 기자
    영상 = 이기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