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서울수복과 10.1 국군의 날 & 한미동맹
  • ▲ 1950.9.28 서울 탈환때,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해병대 용사들. 이 사진은 뒷날 행사때 것.ⓒ뉴데일리DB
    ▲ 1950.9.28 서울 탈환때,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해병대 용사들. 이 사진은 뒷날 행사때 것.ⓒ뉴데일리DB
    “우리 국군이 먼저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아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우리 해병이 미해병과 연합작전으로 서울 시내를 절반쯤 탈환중이었을 때다..

    인천상류작전에 이은 서울 수복 전투에서 미해병1사단은 주요건물을 점령할 때마다 미국 성조기를 게양하는 것이었다. 국군은 그러잖아도 마음이 불편하던 차에 대통령 말을 듣자마자 점거중 조선호텔을 미군 몰래 빠져나간다.

    9월 27일 새벽 3시, 대형 태극기를 몸에 칭칭 감고 중앙청에 접근, 북한 패잔병을 제압하며 우리 해병대 3명은 5층 꼭대기에 올라가 둥근 돔의 창문에 태극기를 달아놓았다. ★9월 28일 서울 수복 성공. (흔히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두 병사가 태극기를 올리는 사진을 9.28 당시 사진으로 오해하는데 그것은 뒷날 행사때 모습이다)

  • ▲ 6.25때 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육참총장.ⓒ뉴데일리DB
    ▲ 6.25때 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육참총장.ⓒ뉴데일리DB
    “우리 국군이 먼저 38선을 돌파하라.”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총사령관 정일권 육참총장에게 명령하였다.

    전시작전권을 맥아더(유엔군사령관)에게 맡긴 것은 작전일원화는 물론, 무기도 전투력도 빈약한 한국군을 이참에 강화시키려는 목적에서다. 그러나 전쟁목표 통일을 관철하기 위해 전쟁당사국 대통령으로서 국군통수권은 빠짐없이 행사한 전쟁 지도자가 미국통 국제법박사 이승만이다.

    “유엔군 사령관 재가 없인 곤란한데요.”
    난처해진 정일권이 망설이는 표정이 되었다.
    “장군, 그대는 어느 나라 장군이오? 그대의 군대는 어느 나라 군대요? 남북통일은 우리 국군이 주도권을 잃지 말고 끝까지 해내야 하는 사명 아니겠소.”

    76세 대통령은 34세 소장에게 타이르듯 손을 잡아 격려한다. 아무리 격분할 때라도 이승만은 얼굴만 실룩일 뿐, 호통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공산군의 6.25침략 직후 유엔이 한국 파병을 결의할 때 ‘침략자 격퇴’만 합의했을 뿐, ‘한반도 통일’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없었다. 따라서 유엔군은 일단 '38선 Stop' 모드로 들어갔다.

    이승만이 이에 굴복할 사람이 아니다.
    일찌감치 이승만은 6.25후 7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3차대전을 하자는 게 아니오, 이번 전쟁은 공산군 스스로 38선을 깼으므로 국제적 의미가 없어졌으니 계속 북진하여 북한 땅에서 공산군을 몰아내야 한다. 이 전쟁이 ‘분단 복귀’가 되어선 결코 아니되며, 하나의 국가였던 한반도를 자유통일 국가로 원상복구 시켜야 할 책임이 미국에 있다. 미국이 그은 38선을 공산군이 없애지 않았는가. 한반도 평화가 미국의 평화이다. 이 전쟁은 통일전쟁이오, 나는 통일될 때까지 싸울 것이니 미국이 도와주기 바란다.”

    한국육군3사단은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제일 먼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한다. 
    이날이 바로 10월 1일, 뒷날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제각기 다른 육해공군 생일을 10월 1일로 합쳐 ‘군국의 날’로 정하였다. ★10월 1일 ‘국군의 날’ 유래.

    미국무성은 수도 서울도 이승만에게 양도하지 말라고 했다. 
    맥아더는 그러나 아랑곳 하지않고, 중앙청에서 수도 반환식을 일방적으로 거행한다.
    “대통령 각하. 서울은 이제 각하의 것이오.”
    눈물을 흘리는 이승만의 손을 잡고 두 영웅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이승만은 최고의 태극무공훈장을 맥아더 가슴에 달아주었다.

    유엔과 미국은 뒤늦게 38선 돌파를 승인하고, 맥아더는 총진군 명령을 내린다.
    "전쟁은 승리하는 것이다" 맥아더의 신념이다.
  • ▲ 1953.8.8 대통령관저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키국무장관. 뒤에 서서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뉴데일리DB
    ▲ 1953.8.8 대통령관저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키국무장관. 뒤에 서서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뉴데일리DB
    10월 1일은 또한 역사적인 ‘한미동맹’ 본조인 68주년이다.

    책으로 열권을 묶어도 모자란 역사의 대장정, 이승만의 ‘한미동맹’을 향한 투쟁사는 그의 파란만장한 90평생 생사의 영욕에 다름 아니다. 체결전 50여년, 체결 후 12년, 숨질 때까지였다. 얼마나 미국의 괄시를 감내해야 했던가.

    20대 청년시절의 꿈을 꼭 반세기만에 쟁취한 한미동맹, 이승만을 죽이겠다며 거부하고 도망치는 미국을 설득과 협박으로 굴복시켰던 그 역정을 간단히 일지식으로 정리해보자.

    ★1895 = 20살 배재학당 입학순간 “나는 영어보다 중요한 자유를 알았다.” 미국에 미친 청년선비 이승만, 미국 독립선언서 등 독립역사 모든 걸 외워버린다. “미국 같은 나라 만들자.”는 취지의 졸업식 영어 연설 제목은 <The Independence of Korea>
    ★1899~1904 한성감옥 = ‘성령’ 받아 기독교 ‘회심’. 미국 같은 자유민주공화국 독립을 하나님께 맹세함. 옥중 생활 기록과 옥중 저서 '독립정신'에 상세히 밝힘.
    ★1905~1910 미국 유학 = 목표 ‘5년내 박사학위’ 회득 성공. 박사논문은 (한미동맹을 위한) 미국의 힘과 국제관계의 100년간 역사적 현장검증 연구. 프린스턴대학교는 이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판.
    ★독립운동기간 활동기록 생략
    ★1948 = 대한민국 건국직후 한미방위조약 등 나토식 동맹을 미국에 요구.
    ★1949 = 트루먼은 이승만의 철군 반대 등 모든 요청 무시, 주한 미군 전면 철수.
    ★1950 = 미국무장관 애치슨 라인 발표. 한국을 방위선에서 제외.
    ★1950 = 소련, 김일성에 남침 승인. 중국 마오쩌둥 전면 침략.
    ★1951 = 영국 처칠의 휴전 요구에 미국 굴복. 판문점 협상 시작.
    ★1952 = 이승만 휴전 결사반대. 직선제 개헌, 대통령 되어 미국과 투쟁. 미국 ‘이승만 제거’ 작전 준비. “말 잘 듣는 장면” 선호, 결국 포기.
    ★1953 =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미국 격분. 경무대서 40일간 담판 협상.
    ★1953 = 7월 27일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 이승만 서명 거부.
    ★1953 = 8월 8일 경무대서 한미방위조약 가조인. 10월 1일 워싱턴에서 본조인.
    ★1954 = 11월 18일 한미동맹 발효.

    숙원의 한미동맹을 체결한 후에도 이승만은 미국에 격렬한 통일공세를 펼친다. 
    협상용이 아니다. 뼈에 사무친 민족지도자의 사명감 때문이다.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시켜 준댔으니 약속을 지켜라. 
    안되면 한미동맹도 무용지물이다. 단독북진통일 하겠다."

    국제전략가 이승만의 변화무쌍한 전술, 길고 긴 이야기를 여기 요약할 방법은 없다. 
    결론적으로 미국이 약속한 군사경제원조 10억달러를 받고서야 비준서를 교환, 한미동맹이 발효한다. 서명 1년 3개월 만이다. 이승만은 자진사퇴할 때까지 7년간 미국서 30억달러를 가져왔다.

    최근 주한미군 전우회가 10월 1일을 '한미동맹의 날'로 지정, 국가기념일 삼자고 나섰다.
    반대로 한국 정부는 유엔에게 '종전 선언'을 해달라며 북한과 손발을 맞추고 있는 모양새다. 게다가 내년 대선에 나선 모 후보는 '미군 사드부대 철수'를 공약으로 떠든다고 한다. 우물안 불장난이 점입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