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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길 칼럼] 뒤늦게 하와이 김노디에 건국훈장?

이승만 '한국인 정체성 독립교육'이 키워낸 청년지도자…미국 유학 후 독립운동 헌신
좌파 단체가 '백년전쟁' 다큐서 날조… 이승만과 불륜 분위기로 몰아갔다 패소판결
대한민국 첫 외자구매청장, 외자도입 부패 방지 맡아… 이승만 별세 후 묘비 건립자금

입력 2021-09-24 15:16 | 수정 2021-09-26 00:26

▲ 1919년4월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회의 참가자들.

웬만한 지식인이라면 하와이에 들렀을때 '이승만' 이름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에 유엔총회 연설후 하와이에 들러 독립유공자 2명에게 훈장을 수여하면서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이름을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정말 건망증인가.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인가.
더구나 건국훈장을 받은 김노디는 이승만 박사가 독립운동할때 직접 키워낸 대표적 제자였다.

우선 김노디가 누구인가 살펴본다.
한국이름은 김혜숙(1898~1972), 일곱 살 때 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난 이민자의 딸이다.
이승만 박사는 1912년 YMCA서 기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05인사건 주모자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 다음해 하와이에 정착한다. 교민 6천명을 헤아리는 아메리카 최대의 한국동포사회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할 때 이승만은 이민자 자녀들을 모아다가 교육을 시작한다. 
하와이 8개섬을 ‘조선8도’에 비기며 순회강연으로 빈곤한 노동자들을 설득, 교육을 포기한 어린 자녀들을 직접 호놀루루에 데려와 “길고도 험난한 교육 독립운동”의 여정을 출발하였다.
그 참에 청년시절부터 이승만이 꿈꾸던 남녀공학을 단행한다.

미국 감리교단의 간섭이 심하자 이승만은 교단을 탈퇴, 어린이들을 ‘한국인’으로 키우는 정체성 독립교육을 고집한다. 한국기독학원을 세우고 기숙사를 짓고 한국인 독립 교회를 광화문 모양으로 짓는다. 

그 첫 세대 어린이들 중에 김혜숙이 있었다. 
뛰어난 재능과 꼼꼼하고 너그러운 성품, 우등생 소녀가 하와이 교육과정을 마치자 이승만 박사는 오하이오 소재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시킨다. 김혜숙은 고학으로 오벌린 대학(정치학과)까지 졸업한다. 
결과는 예상대로 유능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탄생, 이승만의 노선을 적극 지지한 김혜숙은 글자 그대로 이승만의 동지 심복이 되었다. 

▲ 오하이오 오벌린대학 졸업무렵의 김혜숙.

1919년 국내의 3.1운동을 기획한 이승만은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 건국강령 발표’등 사흘동안 한인대표자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첫 한인의회)를 개최한다. 김혜숙은 모교 오벌린대학 교수들을 초청하고 특히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역설하는 연설과 6개 결의문 채택에 앞장서 현지언론에 보도되는  주목을 받는다. 

그때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을 따라 김노디는 미국 전역을 누비며 이승만이 조직한 ‘미국인 독립운동 네트워크'(League of Korean Friends:한인친우회) 확장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이때 미국인에 친숙한 미국 이름 Nodie Kim 김노디로 개명한다). 
그 전국 순회과정에서 평소 이승만을 흠모하여 돕던 백인여성이 시기 질투한 나머지 두 사람을 엮어 고발한다. 그 주법에 따르면 미혼의 성인 남녀가 같은 기차 좌석에 앉아 여행하면 불법, 이승만과 김노디는 소송에 말려들었다. 이민국의 조사에서 김노디는 이승만 일행이 탄줄 모르고 지인 미국인과 기차에 탔다가 알게 되었다며 다른 칸에 탔다는 동반자 미국인의 증빙서류를 제출한다. 결국 싱겁게 끝난 해프닝이었다.

그런데 국내 좌파단체가 2013년 소위 ‘백년전쟁’이란 역사다큐를 제작, ‘이승만과 박정희는 친일파’로 조작방송 하였을 때 ‘이승만의 두 얼굴’이라며 김노디의 사진을 몽타주로 붙여 ‘불륜’인양 모략하였다. 이에 이승만기념사업회 측이 제기한 소송 결과는 대법원의 ‘TV 제재’로 결판 났다. 
그러나 막강한 공영방송의 여파가 얼마나 무서운가. 
역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아직도 그 영상물은 ‘이승만 죽이기’ 무기로 작용하는 형편이다. 끈질긴 ‘대한민국 죽이기’ 전술이다.

김노디는 미국본토에서 활약할 때 1927년 시카고 한인교포 이모씨와 결혼, 이념이 안 맞아 이혼하지만 유복자 딸 한 명을 둔다. 그리고 30년대 중반 손모씨와 재혼하였다.

▲ 6.25전쟁중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후 경제부흥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위해 "한국의 MIT를 만들자"며 세웠던 인하대의 현재 캠퍼스.

1934년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결혼, 하와이로 돌아온다. 
그때까지 김노디는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학원의 교장으로 경영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만큼 이승만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이다.
하와이 교민단체의 간부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모금활동에도 적극적이던 김노디는 해방후 이승만의 건국작업에도 하와이 교민들과 함께 그야말로 불철주야 헌신한다. 

6.25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인천 인하대학교를 설립할 때, 이사가 되어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하고 교민들 성금을 합쳐 인하대 출범을 적극 지원한다. (인하=인천+하와이).
1953년 이승만대통령은 김노디를 대한민국 최초의 외자구매청장으로 임명, 영어가 유창하고 미국인 친구가 많으며 치밀한 그녀에게 외자도입과 부정부패 방지의 책임을 맡긴다.  
2년후 하와이로 돌아간 김노디는 이승만 별세 후 묘비 건립자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하와이 동포사회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애틋하다”며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품삯의 3분의 1을 떼어 300만 달러 이상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적으로 지원한 것은 언제 들어도 가슴을 울리는 애국의 역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하와이와 미주 독립운동의 눈부신 지도자 이승만 박사가 김노디 등 무수한 청년지도자를 양성하고, 독립자금과 외교로써 임정을 지휘했던 임정 대통령이자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하여는 입을 다물었다.

돈 모아준 것만 고맙다는 이야기인가. 
역사 편가르기야 그렇다 치고, 굳이 하와이 교민에게 뒤늦은 훈장을 '선물'한 배경이 궁금하다. 
임기 말에 내년 대선을 앞두고 '교민 투표'를 겨냥한 포석 같다는 어느 평자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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