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더스’에서 ‘젖과 꿀의 땅’으로, 그런데…
  • (*이강호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의 '제103회 이승만포럼' 강론을 전재합니다. 포럼은 지난 17일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항복함으로써 한반도는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해방(解放)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광복(光復)은 아니다. 빼앗긴 주권(主權)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 한다면 주권을 갖는 나라를 세워야 광복이라 할 수 있다.

    해방과 건국
     
    독립(獨立)이라는 차원에서는 더욱이 그렇다. 일제에 병합되기 전에도 조선은 온전한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벗어나는 독립국가 건설이 과제였다. 뿐만 아니라 그 독립은 단순히 속방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근대적인 국가의 수립이라는 과제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 과업이 일제의 보호국(1905)이 되고 최종적으로 병합(1910)되면서 좌절되고 유보됐었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그렇게 좌절되고 유보되었던 과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출발점이었다. 단순히 잃었던 나라 조선의 회복이 아니라 왕조체제와는 전혀 다른 근대국가 즉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세우는 일이 이제 당면의 과제가 되었다. 그래야 진정으로 광복이며 독립일 수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그 과업이 이루어졌다.

    근대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반도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로써 한국인은 오랜 질곡 끝에 비로소 속방 상태가 아닌 독립된 주권국가의 일원일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권리 없는 신민(臣民)이 아닌 자유와 권리를 가진 국민(國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그 경과는 어떤 점에서 마치 엑소더스(Exodus)와 같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건국은 자유민주체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또 다른 차원에서의 위업이기도 했다. 해방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3년, 격렬한 정치적 진통이 이어졌다. 해방의 감격에 뒤이은 소박한 민족주의적 열망이 팽배하던 때였다. 어떻든 남북 단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있었다. 우리 한국인이 앞으로 어떤 이념과 체제로 살아갈 것인가의 선택이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체제를 선택했고 그리하여 한반도의 사람들은 비록 남쪽 절반에서나마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후의 역사가 증명했다. 북한은 결국 현존하는 지옥도가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번영의 길로 나아갔다. 북한은 ‘공산’을 택했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를 택한 결과였다. 

    이승만이 이끈 대한민국 건국은 그 자체가 예언적 위업이다

    우리 현대사는 경제사로 정리하자면 두 단어로 요약된다. 기아(飢餓)와 기적(奇蹟)이다. 해방 후 한반도에는 그 각각을 대표하게 될 두 개의 정치체(政治體, body politic)가 태어났다. 기아를 대표하는 것은 북한이고, 기적을 대표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사도 그렇게 요약된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아에서 기적으로 나아간 역사였다. ‘한강의 기적’이다. 

    이념의 선택이 그 운명적 길을 예비했다. 북한이 선택한 사회주의는 기아의 숙명적 예약이었고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는 기적을 향한 약속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끈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 대한민국의 건국은 그 자체로 예언적 위업이다. 

    엑소더스에 이어 ‘젖과 꿀의 땅’으로... 박정희의 노선은 이승만의 계승

    하지만 어떤 예언적 약속이든 그 실현은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땀의 몫이다. 그 한복판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박정희는 한국을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번영의 길로 이끌었다. 대한민국이 세워질 때의 선택 자체가 그 성취에 대한 예언이었지만 그것은 열망할 수는 있어도 누구도 자신 있게 예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감히 예감할 수 없었지만 모두가 열망했던 그 길로 대한민국을 이끌었다. 

    그 박정희는 5·16으로 등장했다. 자유민주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끌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물러나면서 한국은 정치적 혼란과 위기를 맞게 되었다. 5·16으로 등장한 박정희가 그 혼란과 위기를 수습 했고 이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라는 건국이념이 예비했던 번영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 같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끈 부국의 성취는 이승만 대통령의 엑소더스에 뒤이어 드디어 ‘젖과 꿀의 땅’으로 들어서게 한 것과 같은 위업이었다. 그런데 그 성취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이 예비했을 뿐만 아니라 일찌감치 갈파했던 노선의 계승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이제 천하의 근본은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라 한 청년 이승만

    1901년 4월 19일 자 「제국신문」에 청년 이승만은 약관 26세에 사설 하나를 썼다. 

    "옛 글에 말하기를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라 하였은즉 (중략) 그때는 세계 각국이 바다에 막혀 서로 내왕을 통하지 못하고 각기 한 지방만 지키고 있으매 백성들이 다만 그 땅에서 생기는 곡식만 믿고 살았은즉 (중략) 지금으로 말할 지경이면 세계만국이 서로 통상이 되었은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상업흥왕함에 달렸으니 지금은 천하의 큰 근본을 장사라고 할 수밖에 없도다. 
    대저 농사에서 생기는 이익은 땅에서 나는 것인즉 정한 한정이 있거니와 장사의 이익은 사람이 내는 것이라 한정이 없는 고로 지금 영국으로 말할 지경이면 그 나라의 부강함이 천하 각국 중에 제일인데, 그 토지인즉 불과 조그만 섬이요, 또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땅이 기름지지 못하여 농사에는 힘을 쓰지 아니하고 전국 백성들이 상업에 종사 하여 기교한 물품을 만들어 남의 나라에 가서 금은으로 바꾸어다가 자기 나라를 부요하게 바꾸어 놓고 있으니… (중략) 
    나라가 점점 빈약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들어 필경은 지탱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니 이런고로 지금은 상업을 불가불 천하에 큰 근본 이라 할지라. 그런즉 나라의 흥망이 또한 거기 달렸은즉 (중략) 대저 오늘날 세계 큰 싸움과 다름이 모두 이익과 권세에는 장사보다 더 큰 것 이 없은즉 (중략) 당장의 급선무로 (중략) 아무쪼록 장삿길을 널리 열어서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것보다 몇 천 배나 되게 하기를 바라노라." 

    말하자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아니라 상자천하지대본(商者天下之大本)이라는 것인데 이승만은 오늘날의 표현을 빌자면 무역입국(貿易立國)을 일찌감치 갈파한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박정희의 수출입국 노선은 따지고 보면 이승만이 1901년 청년 시절에 갈파한 ‘상업흥왕’의 길을 현실로 구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1971년 김대중의 장충단 공원 연설 

    문재인 정권은 김대중 정권을 민주정권 1기라 칭하면서 스스로를 그 계승자로 자처했다. 그 김대중은 일찍이 1971년 대선에서 여러 선동적 공약을 내건 바 있다. 그런데 김대중의 공약은 현란한 만큼이나 매우 어처구니없었다. 특히 <대중경제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경제공약은 포퓰리즘 선동의 결정판이었다. 다음은 김대중의 장충단 공원 유세의 한 대목이다. 

    "건설이라는 것은 국민 전체가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요, 나라의 경제의 혜택이 마치 우산살 퍼지듯이 모든 국민에게 고르게 퍼져나 갈 때, 그 경제건설은 잘 된단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세종대왕 시대가 선군의 시대라는 것은 그 당시에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울산공업 단지도 없었지만, 우리가 선군의 시대라는 것은, 비록 그 시대에는 무명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 다녔지만, 국가의 혜택이 고르게 분배 되었던 것이오."

    1971년 김대중의 이 같은 언설은 그 70년 전인 1901년의 26세 청년 이승만의 견식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만약 김대중의 노선대로 갔다면 한국인은 이후 "고속도로도 없고, 공업단지도 없는 나라에서 무명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 다니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가 이 같은 허무맹랑한 포퓰리즘을 제압해가면서 이룩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 박정희는 포퓰리즘과 함께 민주팔이 깃발의 이면에서 끊임없이 발호하는 위험을 제압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상시적 비상체제’의 숙명을 짊어진 정치

     박정희 시대 한강의 기적은 평화가 만발한 속에서 우아하게 양탄자를 걷듯이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분투의 장정이었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체제의 근본을 부정하고 위협하는 세력과의 근원적인 대결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 대결은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피할 수 없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었다. 대한민국의 탄생 자체가 양립할 수 없는 이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선택이 남과 북의 운명을 갈랐다. 운명은 숙명과 다르다. 숙명은 피할 수 없는 짐이지만 운명은 선택이다. 국가도 그러하다. 어떤 국가든 지정학적 조건은 숙명이다. 그러나 이념과 체제는 선택하는 것이며 그 선택이 운명을 가른다. 그런데 운명은 늘 숙명을 동반한다. 피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 운명적 선택을 하고 운명적 선택과 함께 숙명적 짐을 진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체제의 이념은 미래의 번영을 약속하는 운명적 예약이었다. 그러나 운명적 선택에는 반드시 짊어져야 할 숙명적 짐이 있다. 그 선택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이다. 양립할 수 없는 이념 가운데 하나를 택한 이상 그 선택을 부정하는 쪽의 위협과 도전을 피할 수 없다. 그에 맞서 선택을 지켜내지 못하면 예약된 운명이라 해도 미래를 주지 못한다. 따라서 적대적 도전에 맞서는 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박정희가 이끈 ‘한강의 기적’은 바로 그런 조건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박정희의 정치’는 대한민국이 불가피하게 안아야 했던 ‘상시적 비상체제’로서의 숙명을 짊어진 정치였다. 5.16뿐만 아니라 10월유신도 바로 그러한 차원의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 숙명의 짐을 지고 ‘피의 골짜기’를 지나온 나라를 ‘땀과 눈물의 강’을 건너 ‘번영의 바다’에 이르게 했다. 

    민주팔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 시대는 ‘위대한 시대’였다. 그리고 ‘위대한 정신’이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라는 의지와 성취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시체를 닦고 지하 1,000m 막장의 갱도를 마다하지 않았던 정신이 있었기에 위대한 개발시대의 문을 열어 갈 수 있었다.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세대가 넘는 세월 동안 우리의 번영을 지탱해왔던 '위대한 정신'에 어느 틈엔가 의심이 깃들고 불건강의 싹이 자라났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권리만을 앞세운 무책임과 불평불만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선동이 가해졌다. 허약해지고 불만에 찬 정신들이 그에 반응하기는 너무나 쉬웠다. 

    만약 이 같은 일들이 단지 사회경제적 상황의 객관적 악화만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면 불건강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땀을 비웃는 ‘노력충’이라는 말과 ‘헬조선’이라는 언사가 유행을 탄다. 남 탓 나라 탓이 만연하고 ‘뜯어먹기’가 ‘경제정의(正義)’라는 이름으로 행세를 한다. 비용과 세금을 누가 낼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너도 나도 ‘여하튼 더 많은 복지’를 외친다. ‘청년구직활동지원금’으로 에어컨, 한약, 닌텐도 게임기를 구매하고, 문신 제거도 하고 컴퓨터 메모리 구매, 충치 치료비, 영양제 구입비로 쓴 사례도 있다. 

    그러면서 일자리 세습조항까지 만든 민노총 귀족노조 철밥통에는 저항도 하지 않고 그 들의 선동에는 시도 때도 없이 놀아나고 있다. 대기업의 일자리를 바라면서 그 총수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구속하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대기업을 때려잡겠다는 자들을 지지했다. 재벌개혁의 내용이 무엇인 지는 잘 모른다면서 재벌개혁에는 ‘아무튼 찬성’이고 그러면서도 재벌기업에 취직은 하고 싶어 한다. 

    인지상정이라고만 할 수 없다. 정신의 와해다. 단순히 풍요의 부산물이 아니다. 지금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진통은 그 차원을 넘어서 있다. 고의적으로 조장된 ‘좌경화’의 문제가 있다. 

    86년 세대와 87년 체제의 타락

    1987년 민주화는 산업화에 뒤이은 민주화의 성취라 했다. 그러나 이제, 지금의 상황은 그 평가를 무색케 한다. 86세대는 87년 체제 주역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향유자였다. 87년의 계층적 차원에서 진정한 주역은 그 이전 산업화의 성공으로 성장한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중산층이었다. 그런 점에서 87년의 민주화는 결과적으로 박정희 개발시대의 성공과 풍요가 선사한 또 다른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이 경과하는 가운데 그 선물은 변질되고 급기야는 탈취되고 말았다. 

    전반적으로 좌경화에 감염됐던 86세대가 문제였다. 이들 가운데 스스로를 갱신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던 자들이 그 이후 세대까지 감염시켜 갔다. 이를 차단하고 제압하지 못한 결과 87체제 자체에 타락이 왔다. 

    개인이든 국가든 타락은 건강을 무너뜨린다. 지금 한국은 그런 상태다. 견결한 정신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풍요와 민주팔이의 깃발 뒤에서 암약하고 발호해왔던 붉은 독초가 정치적 건강성을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렸다. 고난의 여정을 잊은 타락은 몰락을 재촉한다. 전례 없는 위기의 시대다. 여기서 주저앉아야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