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출연 취소'로 보직 해임... 2년 후 '정직 6개월' 추가 징계까지
  • KBS가 지난 6일 '진실과미래위원회(이하 진미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일부 전·현직 피디들에게 중징계를 내린 사실이 밝혀지면서, 2년 전 한완상 전 부총리의 라디오 출연 취소를 지시했다 '평사원'으로 강등된 전 라디오 국장의 기막힌 사연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번에 징계를 받은 사원 중 한 명은 당시 라디오프로덕션1담당국장이었던 A씨였다. 한 전 부총리를 섭외했다 취소한 일로 보직 해임돼 한직으로 밀려난 그는 최근 동일한 사안으로 중앙인사위원회에 회부돼 정직 6개월의 추가 징계까지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KBS, 진미위 권고대로 징계… 정직 6개월 처분

    KBS공영노동조합(이하 공영노조·위원장 성창경)은 7일 배포한 '계속되는 보복성 징계,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사측이 8월 6일 전직 피디 1명(A씨)에 대해 정직 6개월, 다른 두 명의 피디는 각각 감봉 6개월과 3개월, 그리고 또 다른 2명에게는 경고 등 모두 5명에게 징계를 통보했는데, 이들은 모두 과거 사장시절에 부장급 이상의 보직을 가졌던 자들"이라고 밝혔다.

    공영노조는 "2017년 7월, KBS 1라디오 프로그램의 인문학 서적 소개 코너에, 한완상 전 국무총리가 출연해 책을 소개할 예정이었는데, 한 전 총리의 책이 특정 정치 성향이 강하다고 판단한 담당국장(A씨)이 제작 피디에게 섭외 취소 의견을 낸 사실이 있다"며 "진미위는 담당국장의 이 같은 조치로 한 전 총리의 출연이 취소된 것은 제작 자율성을 침해한 것이라면서 이외 다른 사유 등을 포함해 담당국장에게 정직 6개월의 징계를 내렸다"고 밝혔다.

    이 같은 처분에 대해 공영노조는 "순수한 인문학 서적 소개 코너에 당시 문재인 대통령을 옹호하는 글이 적혀있는 책을 소개하는 것은, 방송 프로그램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보고 담당국장이 정당한 권한에 따른 판단을 한 것을 이제 와서 처벌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고 지적했다.

    공영노조는 "진미위 자체가 불법성인지 여부를 묻는 재판과, 또 사측이 내린 징계의 무효 여부를 결정짓는 법적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과거 '기자협회 정상화를 요구하는 성명서' 작성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당시 보도국장이 해임되는 등 20여명이 진미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징계를 통보 받았다"며 이 같은 무리한 '보복성 징계'를 즉각 멈출 것을 촉구했다.

    "인문학 서적으로 보기 어려워 섭외 취소 의사 전달"

    KBS에 따르면 한 전 총리는 2017년 7월 5일 KBS 1라디오 프로그램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에 출연(녹음)할 예정이었다. 당시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이주향 수원대 교수가 한 전 총리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독자적으로 섭외 요청을 함에 따라, 프로그램 제작 피디는 7월 4일 인문학 산책 출연자 명단에 한 전 총리의 이름을 포함시켰다.

    이후 제작 피디는 녹음 전날인 7월 4일 오후 4시 29분경 담당국장인 A씨에게 출연자 명단을 전송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신규서비스였던 'KBS알리미'에 익숙지 않았던 A씨가 미처 확인을 못해 회신하지 않자, 제작 피디는 오후 8시 5분경 "KBS알리미를 통해 명단을 보냈다. 특히 한완상 선생 녹음을 내일하려고 하는데 섭외 취소를 해야 할지 회신 부탁드린다"는 문자메시지를 재차 전송했다.

    그제서야 알리미 내용을 확인한 A씨는 신간 서적(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의 내용을 인터넷을 통해 살펴본 뒤 이 책이 특정 정파의 입장에서 쓴 '정치 회고록'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A씨는 "이 책은 인간 본질을 탐구한 인문학이 아닌,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회고록"이라며 "정치적 오해를 받을 만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다른 분으로 섭외하라"는 문자를 제작 피디에게 보냈다.

    "언론노조 성토 직후 라디오 담당국장, '평사원' 강등"


    이와 관련, A씨는 지난 6월 2일 KBS 중앙인사위원회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저는 이 건에 대한 결정과 관련해 어떠한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해당 프로그램의 기획의도, 책의 내용 등 개별 사안의 특수성을 고려했다"며 "27년차 PD 직종의 제작책임자로서 전문적 식견과 양심에 따라 공정성·균형성·객관성 등 방송법상 준수 의무 위반 여부를 판단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A씨는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은 인문학에 관한 소개를 주목적으로 하며 철학·문학 등 청취자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인문학을 쉽게 소개해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려는 프로그램이었다"면서 "그런데 한완상 전 부총리가 저술한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는 '한국 정치사 회고록' 성격이 짙었고, 일반적인 인문학 범주에 포함하기도 어려워 프로그램 성격이나 기획의도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A씨는 "저서의 내용 중 촛불을 혁명으로 규정한 부분과 섣부른 통합보다 청산을 얘기한 '개혁 주문'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정치 세력의 이해 가운데 일방의 입장만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했다"며 "게다가 한 전 부총리가 문재인 대통령 당시 대선캠프 싱크탱크에 참여한 전력 등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A씨는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한 전 부총리가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도중, 보수와 진보 가운데 한쪽의 주장만을 방송한다면 프로그램 공정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은 정당한 판단이었고, 제작 피디에게 '다른 분으로 하시죠'라고 전한 것은 그 상황에서 적절한 의사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공영노조에 따르면 한 전 총리의 KBS라디오 출연이 취소된 사실을 전해들은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언론노조)가 2017년 7월 10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KBS에 블랙리스트가 여전하다"며 "담당국장이 합리적 근거도 없이 한 전 총리의 출연을 막았다"고 성토하자, 불과 2시간여 만에 A씨가 '평직원(전략기획실 방송문화연구소 방송문화연구부)'으로 발령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소식통은 "이런 점 때문에 방송계 일각에선 KBS의 인사권을 실질적으로 언론노조가 행사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