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교훈 …"악은 어떤 식으로든 돌아온다"
  • ▲ 김규나 작가.ⓒ제공=김규나 작가
    ▲ 김규나 작가.ⓒ제공=김규나 작가
    이름과 죄명이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취중수술로 환자를 죽게 한 의사, 질투심에 아내의 정부였던 부하를 사지로 내몰아 죽게 한 장군, 무죄인 걸 알면서도 사형을 언도한 판사,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아이들을 익사케 한 교사…….

    바다 한 가운데 작은 섬, 대저택에 초대된 것을 행운이라 여겼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진다. 자신들을 불러 모은 오웬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사건 당시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왜 이제와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차례차례 살해당한다. 죄가 무겁다고 판단될수록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자신들 가운데 살인자가 있다고 의심하면서 한 명씩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공포이자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 명 모두가 죽고 섬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영화와 드라마로 꾸준히 리메이크되는 작품이다. 불치 판정을 받은 오웬이란 자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을 외딴섬에 고립시킨 후 정의실현을 명분으로 평생 참아왔던 살인 욕구를 마음껏 해소하는 범죄 스토리다.

    법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는 문명사회에서는 개인이 개인을 단죄해선 안 된다. 인간이 만든 법이기에 구멍도 많고 그 틈으로 빠져나간 죄인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법의 판단을 따르지 않으면 사회의 질서와 안전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법의 울타리를 용케 빠져나간 죄악과 범죄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축제를 벌이다가 파멸을 맞이하기도 한다.

    “법이 날 지켜줄 거라던 믿음이 사라져버렸군”

    사기 탄핵으로 권력을 잡은 이들이 집권한 지 2년이 넘었다. 그동안 법의 칼날은 권력의 시녀가 되어 굿판을 벌이듯 춤을 추었고 많은 사람들을 입맛에 맞게 편 가르고 처벌하고 가두었다. 그렇게 이 나라는 어디 한군데 멀쩡한 곳 없이 북한과 똑같은 공산전체주의 사회로 한발 한발 무너져가고 있는 중이다.

    저들의 완전한 승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 다들 잊었을지 모르겠지만 김태우 수사관, 신재민 전 사무관의 폭로가 있었고, 손혜원의 문화재 지정구역 부동산 투기 및 부친의 독립유공자 선정 의혹, 서영교 재판 청탁과 같은,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된 권력비리는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이다보니 태블릿PC 조작보도 혐의가 있는 손석희의 실체가 우연한 계기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고, 최근에는 유시민·이해찬의 운동권 시절, 밀고와 배신의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그때는 그게 옳은 일이라고 여겼소. 내가 원하는 걸 그들이 갖고 있었지. 다이아몬드 말이야. 그깟 목숨들보다 가치 있는 것이었소.”

    저들은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보물을 빼앗기 위해 원주민 부족을 몰살한 탐험가처럼, 그 무엇도 수치스럽다거나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정의롭다. 동료를 팔거나 배신을 일삼아도, 경제와 외교와 국가 안보가 무능으로 거덜이 나도, 그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절대로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이기는 것, 자신들이 더 많이 갖는 것, 자신들이 더 높이 올라서는 것, 이것이 그들의 정의이고 그들만의 진실이다.

    악은 선에 의해 교화되거나 동화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악은 더 큰 악이 잡아먹고, 커다란 탐욕은 자신이 집어삼킨 작은 탐욕들이 내부에서 일으키는 불평불만으로 무너진다. 이것이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근본 원인이다.

    한 예로 1980년대 합수부에 끌려갔던 운동권 사람들은 수십 장에서 수백 장의 진술서를 작성, 자신의 동지들을 고발한 덕에 고문 받지 않고 살아나왔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풍요를 누렸고 권력마저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맥락으로, 깨어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처럼 미국 주도하에 북한이 자유개방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씨 일가의 눈치를 보며 언제 죽을지 몰라 마음 졸이는 대신,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미래를 약속 받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살인자는 밖에 있는 게 아니오. 그는 여기에 있소. 우리 가운데 하나가 오웬이란 말이지.”

    조직의 붕괴는 하층부의 불만에서 시작되지만 언제나 상층부 개개인의 더 큰 욕망으로 인해 완결된다. 수십 년 그들에게 충성했던 자들의 명단을, 세계 마지막 남은 공산체제 잔재를 뿌리 뽑을 리스트를 북한 권력층에서 공개하게 될 거라는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이 만 천하에 큰 소리로 울려 퍼질 때, 대한민국에 살면서 북한의 하수인 노릇을 해온 자들은 어떻게 될까. 살아남기 위해, 가족과 자식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숨거나 달아나거나, 더 큰 죄목으로 다른 이를 고발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텅 비게 될 청와대, 텅 빈 시청본관, 텅 빈 노조 사무실들과 시민이니 정의니 연대니 하던 무수히 많은 하부조직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서로의 뒤통수를 때리고라도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이 어디선가는 벌써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설가의 상상력에 불과한 여담이겠지만, 언젠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선물한 칼이 화제가 된 적 있다. 선물이란 받는 사람에게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왜 하필 그 선물이었을까,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청와대는 얼마 전 취임 2주년 기념으로 출입기자들에게 엿을 선물했다고 한다. 무슨 의미였을까. 연일 찬양하는 기사를 쏟아내던 기자들은 엿을 받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으나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고 과거를 묻고 살아온 사람들, 신의 심판을 대신한다는 오만으로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 모두 죽이고 자신 역시 죽음을 선택하는 이야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문학과 예술은 인생을 반영하지만 작품의 결말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나는 자성(自省)이 없는 한, 한번 죄 지은 자는 또다시 죄를 짓는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또다시 배신한다. 남에게 해를 끼쳐 온 사람은 적은 물론 아군까지, 끝내는 자신까지도 망친다. 그렇게 악은 어떤 식으로든 돌아온다. 부메랑처럼 가속도가 붙어서 악을 자행한 본인에게 칼날이 되어 되돌아온다. 그것이 좋은 문학의 법칙, 흥행하는 영화의 법칙, 우리가 살아낼 가치가 있는 인생의 법칙이다.

    *‘TMTU. Trust Me. Trust You’는 김규나 작가가 ‘개인의 각성’을 위해 TMTU문화운동을 전개하며 ‘개인이여, 깨어나라!’는 의미를 담아 외치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소설가 김규나(장편소설 <트러스트미> <체리 레몬 칵테일>, 산문집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