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내가 지시하며 옆에서 같이 작업"… 변호인 "검찰 유도신문, 증거 될 수 없어"
  • 검찰이 그림 대작(사기) 혐의를 받는 가수 겸 화가 조영남(74·사진) 씨를 신문할 때 유죄 취지의 진술만 영상으로 담아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부로부터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부장판사 오연수)은 지난 20일, 8년 전 자신이 그린 그림 '호밀밭의 파수꾼'을 800만원에 판매했다 대작(代作) 논란에 휘말려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앞서 '대작 작가' 혹은 조수가 그림을 대신 그려줬다는 의혹으로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과 이 사건은 조금 다르다"며 "한 미술 전공 여대생이 해당 그림을 그렸다는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어 범행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검찰조사에서 '조영남이 그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진술도 나왔으나 이는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해 객관적인 증거로 사용하기 힘들고, 피고인도 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이 이 작품을 그렸다며 상반된 주장을 펼쳐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특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진술조서는 '진정성립(어떤 문서나 사실이 맞다고 확인해 주는 것)'이 안 되고, 주관적인 참고인 진술 외에는 충분한 증거도 제시되지 않아 다른 사람이 그렸다는 범죄가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나머지 부분은 더 살필 필요도 없다"고 판결했다.

    "검찰 제시한 피의자신문조서, 증거능력 없어"

    이와 관련, 조씨의 법률대리를 맡은 신민영(법무법인 예현) 변호사는 21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재판 과정에서 검찰 진술조서가 통째로 부정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며 "이날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증거의 능력이 전무하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신 변호사는 "원래 피의자 진술을 영상 녹화할 경우엔 반드시 조사의 개시부터 종료까지 전 과정을 녹화해야 하는데, 검찰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진술이 담긴 중간시점부터 녹화해 형사소송법에 저촉되는 위법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신 변호사는 "이에 따라 재판부는 검찰이 유도신문으로 얻어낸 진술은 객관적인 증거로 볼 수도 없다며 해당 신문조서는 '진정성립'이 되지 않으므로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조씨는 같은 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당시 서울대 재학생 두 명을 아르바이트로 썼는데 제가 다 지시를 하고 바로 옆에서 같이 작업을 했었다"며 "엄연히 내 작품인데 검찰은 제가 여학생에게 그림작업을 전적으로 맡긴 뒤 내다 판 것처럼 공소장에 썼다"고 말했다. 이어 "어제 판사님께서 검찰이 내세운 증거를 전부 무효화시켰는데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2011년 조씨의 그림 '호밀밭의 파수꾼'을 800만원에 산 A씨는 2016년 조씨가 '그림 대작' 의혹에 휘말리자 그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이후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은 조씨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으나 A씨의 항고를 접수한 서울고검은 재수사를 벌여 지난 1월3일 조씨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당시 '조영남을 기소하라'는 검찰시민위원회의 의견을 반영한 서울고검은 그림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붓 터치를 조씨가 할 수 없고, 조씨가 대작 사실을 시인한 점 등을 감안해 사기 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조영남, 사기 혐의 무죄... 2심서 뒤집혀 승소

    이 사건과 별도로 조씨는 2011년 9월부터 2015년 1월 중순까지 송기창 등 '대작화가' 2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자신은 가벼운 덧칠작업만 해 총 17명에게 21점을 판매한 혐의(사기)로 2016년 기소됐다. 조씨의 소속사 대표이자 매니저 장OO 씨도 2015년 9월부터 지난해 4월 초까지 총 3명에게 '대작그림' 5점을 판매한 혐의로 함께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조씨와 매니저 장씨는 대작그림을 판매해 각각 1억5350만원과 2680만원의 수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조씨는 대작화가들로부터 1점에 10만원꼴로 수백 점의 그림을 사들인 뒤 높은 가격으로 재판매했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 검찰은 2016년 12월21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각각 징역 1년6월과 징역 6월형을 구형했다.

    이 사건의 1심 재판부는 2017년 10월18일 조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해 8월18일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대작그림'을 판 혐의로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던 매니저 장씨에게도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현대미술에서 작가가 조수나 전문인력을 두고 미술품 제작을 보조하도록 하는 일은 널리 통용되고 있는 추세"라며 "송기창 씨 등은 조영남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한 기술적 보조자일 뿐 독립적인 작가로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구매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작품을 구매하기 때문에 '조영남이 보조작가를 활용해 그림을 그린 사실을 알았다면 작품을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면서 "더욱이 현대미술작품의 제작 관행에 비춰봤을 때 작가가 모든 구매자에게 보조작가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고지할 의무는 없는 만큼 이를 구매자들을 속인 범죄(기망)행위로 간주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 판결만 남은 상황이다.

    다음은 지난 21일 신 변호사와 본지가 나눈 일문일답.

    - 어제(20일)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재판부가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법적으로는 굉장히 큰 사건인데 다른 기사를 읽어봐도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낸 기사는 하나도 없더라고요. 검찰에서 진술한 걸 법원에서 다 무효화했습니다. 증거능력이 아예 없다고 판시했어요. 흔치 않은 일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조서가 날아가는 것은 정말 드문 일입니다. 한마디로 검찰이 조사 과정에서 절차상 불법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 검찰이 법을 위반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번 재판에서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요. 조영남 씨가 실제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그렸는지 안 그렸는지 여부와, 누가 그렸다 한들 현대미술에선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주장을 수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재판에선 두 번째 논점은 다루지도 못하고 첫 번째에서 끝이 나 버렸습니다. 검찰에서 다른 사람이 그렸다는 걸 아예 입증조차 못한 겁니다.

    검찰이 애초에 제출한 증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조영남 씨가 검찰조사를 받으면서 자기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자백을 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조수(아르바이트생)들도 이 그림은 조영남 씨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진술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재판부가 두 가지 증거를 다 날려버렸습니다. 본인(조영남) 자백이 있는데도 무죄가 나온 겁니다.

    검찰이 진술조서를 작성할 때 영상 녹화를 했는데요. 원래 영상 녹화를 하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녹화를 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중간부터 녹화를 했어요. 명백한 형사소송법(제244조의2) 위반입니다. 소위 '악마의 편집'이 이뤄졌고, 그래서 증거의 능력 자체가 없다는 판결을 받게 된 겁니다.

    그리고 팩트를 말씀드리면, 조영남 씨는 검찰에 가자마자 이건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진술했습니다. 당연히 검사가 받아 적어야 하는데 자기들에게 불리한 진술이라 그런지 받아 적지 않는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앉아 보라며…. 그리고선 그림 한 점을 보여주면서 "이걸 정확하게 보라"며 "다른 사람들도 당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계속 다그쳤습니다. 이렇게 계속 동일한 질문을 받던 조영남 씨는 "그런 것도 같다"며 사실과 다른 자백을 했습니다.

    - 자기가 그린 작품인데 나중엔 왜 그리지 않았다고 말했을까요?

    ▲검찰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잘 생각해 보라"며 계속 조영남 씨를 몰아 갔어요. 조영남 씨는 지난 40여 년간 작품활동을 해오셨고, 지금까지 그린 그림도 4000점이 넘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연작을 했기 때문에 넘버가 붙는 작품인데요. 그렇게 많이 그렸기 때문에 착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그린 작품이 맞다고 얘기를 했는데 검찰이 계속 강하게 다그치자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애매하게 답을 한 거죠.  

    참고인(조수들) 진술이 증거로 인정되지 않은 것도 원래는 '이중맹검(double blind)'이라고 해서 비슷한 작품 5개를 갖다 놓고 '이중에서 골라보라'는 질문을 건네야 하는데, 검찰은 작품 한 개만 갖다 놓고 이게 조영남 씨의 작품이 아니냐는 질문을 계속 던진 겁니다. 질문의 방법 자체가 틀렸습니다. 명백한 유도신문이죠. 그래서 재판부도 조수들의 진술은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하다며 객관적인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 고소인은 만나 보셨나요? 고소인이 문제를 제기하자 조영남 씨가 환불해줬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만나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환불한 게 아니라 조영남 씨가 재구매한 겁니다. 아무튼 이번 사건이 불거지면서 주변에서 조영남 씨가 환불한 작품만 따로 모아 특별전을 열어야 되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작품 구매자들이 조영남 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한 적은 없나요?

    ▲아직까지 없습니다.